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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핸드(Green Hand).
그것은 처음 반을 공격했던 마물의 정체였으며, 현재 봉인진 위를 활보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저 새끼가……!”
카델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균열의 틈새를 가로막은 암녹색 손을 노려보았다. 카델의 분노를 눈치챈 녀석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며 공격을 피해 몸을 굴렸다.
그러나 카델이 다시 균열에서 빠져나오는 마물을 공격하려 들면, 어김없이 달려와 단단한 손바닥으로 아군을 지켜 주는 것이다.
“아아악! 야! 좀 꺼져!”
히스테릭한 고함에 얄밉도록 재빠르게 몸을 굴려 도망가는 그린 핸드. 녀석의 생김새는 고블린에 가까웠으나 몸집은 오우거에 근접했고, 기형적으로 거대한 손이 달린 팔은 거미처럼 길고도 유연했다.
심지어 그 팔의 개수는 총 네 개였다. 두 개는 평범한 팔의 위치에, 나머지 두 개는 날개뼈에. 공방에 전부 뛰어난 손이 앞뒤로 달렸다는 것은, 놈이 아군과 자신을 동시에 보호하는 데에 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봉인 밖으로 튀어나온 그린 핸드는 총 다섯 마리. 녀석들은 적린 기사단을 공격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틈새를 방어하며 아군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지키는 중이었다.
“반! 라이돈! 저 새끼들이 봉인에 접근 못 하게 막아!”
카델의 명령에 언덕에 퍼진 다른 마물을 소탕하던 두 부하가 모여들었다.
“걱정 마세요, 단장!”
“아하하! 여기 재밌네!”
오라를 개방한 반과 마력을 되찾은 라이돈. 두 남자의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그들에게 마족도 아닌 마물 따위야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 봉인의 동쪽과 서쪽을 맡아 그린 핸드를 견제했다.
라이돈은 놈들의 방어를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얼음 창을 쏘아 댔고, 반은 검기로 놈들의 발목을 노려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그동안, 카델은 차분하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직 마력 속성을 재배분할 필요는 없어. 속성 하나로 처리해 주지.’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작은 원을 만들고, 그것을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좁아진 시야는 균열의 중앙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 범위면 되려나.”
봉인을 공격해선 안 된다. 노리는 곳은 균열의 틈새. 정확히 그 너머를 공격할 수 있는 화력의 마법이 필요했다.
손가락을 구부려 크기를 가늠한 카델이 구멍을 채우는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그리고 촛불을 끄듯 불꽃의 위로 훅, 입김을 불었다. 얕은 숨결은 곧 기다란 불꽃의 길을 만들어 냈다.
콰아아아—
정확히 구멍의 너비를 유지한 일직선의 불기둥. 불이라기보단 흡사 레이저포에 가까운 형태였다. 카델은 불기둥의 시작점에 손바닥을 펼쳐 마력이 끊기지 않도록 불어넣었다.
그의 불꽃은 완벽하게 균열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막 빠져나오던 마물도, 그 뒤편의 마물도. 속절없이 타들어 갔다.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은 반과 라이돈에게 묶여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완벽한 토벌이다. 카델은 그제야 개운함을 느끼며 해충을 박멸하듯 끝없이 마물을 태워 나갔다. 이대로 빠져나오는 마물을 통제하며 아군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불길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저건 또 뭐야.”
균열 너머의 무언가가, 카델의 불꽃을 갈라내며 등장하고 있었다.
카델이 봉인의 균열을 예상하지 못한 데에는 그가 스토리의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한몫하긴 했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알고 있기’ 때문에 눈앞의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단 승격 이후, 그가 새로운 퀘스트를 받는 건 외부 봉인에 파견되는 시점이었다. 기사단 승격은 스킵충인 그에게도 제법 의미 있는 이벤트였고, 그랬기에 직후의 퀘스트가 무엇인지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신하건대, 제국 10구역 봉인에서 퀘스트를 받은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메인 퀘스트 정도의 위험한 전투는 발생할 리 없다.
그랬기에 봉인에 균열이 생기고, 마물이 넘어오는 때에도 카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적당히 마물을 상대하다 지원군이 오면 봉인을 보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별것 아닌 사건일 테니까.
하지만.
[돌발 퀘스트 ‘뜻밖의 위기’ 발생!]
[퀘스트를 진행하여 스토리의 전개를 지키십시오.]
[실패 시, 메인 퀘스트의 순서가 뒤바뀝니다.]
‘돌발 퀘스트? 이딴 게 있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예상이 불가능한 퀘스트가 튀어나왔다. 이곳에 나타나선 안 될 존재와 함께.
“저 팔…….”
카델은 갈라지는 불꽃의 마력을 회수하며, 중앙까지 번진 균열의 틈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틈새를 우악스레 파고들며 빠져나오는 거대한 팔 한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린 핸드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거대했고, 더욱 흉측했다. 거무죽죽한 피부에 팔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운 팽팽한 부피감. 얇게 늘어난 가죽 아래에서는 기포가 끓듯 무언가가 바글거리고 있었다.
고작 팔 한쪽만으로도 녀석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고위 마족, 아쉬브카.
‘틀림없어. 저렇게 징그러운 몸뚱이를 가진 놈은 그놈밖에 없다고. 대체 왜 여기서?’
아쉬브카는 분명 그가 상대해 봤던 스테이지 보스 중 하나였으나, 놈이 등장하는 시점은 마계 전쟁이 발발한 후였다. 워낙 임팩트 큰 놈이었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막아야 해.’
카델은 조금씩 돌발 퀘스트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쉬브카는 지금 이곳에 등장해선 안 되는 적이었다. 만약 아쉬브카를 토벌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승패에 관련 없이 그가 알고 있는 스토리의 흐름이 뒤엉킬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계 전쟁이 발발하는 시기가 확 앞당겨진다든가. 아직 제대로 기사단을 꾸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는 걸 지켜볼 순 없었다.
그렇게 카델이 생각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 있을 무렵.
툭. 투둑.
아쉬브카의 팔 가죽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 담긴 무언가를 더 이상 가둬 둘 수 없다는 듯, 살갗이 툭툭 벗겨지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뒤늦게 그 변화를 눈치챈 카델이 장막을 펼치려 했으나, 그 순간.
“라, 라이돈?”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라이돈이 카델의 허리를 낚아채 날아올랐다.
“위험하잖아, 자기.”
라이돈은 카델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채 지면을 향해 얼음 창을 난사했다. 안개처럼 흩어진 냉기의 사이로 재앙의 호수처럼 넓게 퍼진 수천 마리의 벌레 떼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라이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씹어 삼킬 기세로 그들을 뒤쫓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카델이 질겁하며 인상을 구겼다.
‘흡혈충부터 꺼내고 보는 거냐고.’
흡혈충은 아쉬브카가 다루는 벌레의 한 종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벌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쉬브카는 자신의 육체를 벌레로 치환할 수 있었고, 상처를 입어도 벌레의 힘을 빌려 회복할 수 있었다.
고작 팔 한쪽만으로 수천 마리의 흡혈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족. 아쉬브카는 한 방, 한 방이 살인적이었던 셀레브와는 달리, 살인적인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었다.
“절대 물리면 안 돼. 흡혈하는 곤충이니까, 포위되는 순간 송장 된다고 생각해.”
“흡혈이라! 왠지 반이랑 닮지 않았어?”
라이돈은 호쾌하게 웃으며 쫙 펼친 오른손으로 흡혈충을 겨눴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투명한 얼음 결정이 모여들더니, 작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한 점에 모인 맹렬한 마력의 흐름. 그는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응축된 마력을 그대로 튕겨 냈다.
“그래 봤자 벌레는 벌레지만.”
까가가가각.
탄환처럼 날쌔게 발사된 회오리가 폭발적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눈 깜짝할 새에 늘어난 범위를 따라 얼음 결정의 마찰음이 흡혈충의 지저분한 날개 소리를 차단했다. 활짝 벌어진 아가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탐욕스럽게 흡혈충 무리를 집어삼켰다.
날카로운 얼음의 단면과 지독한 냉기가 흡혈충 무리의 사이사이를 가르고. 회오리가 스쳐 간 자리를 따라 얼어붙은 흡혈충이 소나기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흡혈충 절반이 소탕당하자 남은 흡혈충은 추적을 멈추고 공중에 머물렀다. 카델은 깔끔하게 반 토막 난 적의 숫자에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봉인 풀어 준 보람이 있네.”
“응?”
“네가 내 부하라 좋다고.”
“아하하! 나도 좋아, 카델!”
공중에 뭉친 흡혈충은 더 이상 카델을 쫓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흩어져 언덕에 퍼진 마물을 찾아갔다.
그제야 지상으로 내려온 카델이 흡혈충의 움직임을 살폈다. 놈들은 아군이나 다름없는 마물에게 달라붙어 살가죽에 얇고 뾰족한 주둥이를 쑤셔 박았다. 온몸에 얼룩처럼 떼 지은 흡혈충이 들러붙은 마물은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바짝 쪼그라든 상태로 쓰러졌다. 완벽히 흡혈 당한 것이다.
‘아주 비상 물약처럼 이용해 대는군.’
아군 전력에 손해를 보더라도 본인의 힘을 보충하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고.
“모든 공격을 원거리로 전환한다. 반, 너도 최대한 검기와 오라만으로 상대해. 내가 장막을 둘러 줘 봤자 흡혈충을 떨쳐 내지 못하면 의미 없으니까, 무조건 안전거리를 유지하자고.”
카델은 반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며 라이돈을 불렀다.
“라이돈, 너는 날아서 호계 기사단을 찾아가. 찾는 즉시 환언으로 봉인의 상태를 설명하고, 아군이 흡혈충에게 당하지 않도록 엄호해.”
“내가 왜 다른 인간을 지켜 줘야 해? 그냥 카델이랑 여기서 싸울래.”
“그 인간들을 안전하게 데려와야 우리가 멀쩡히 살아 나갈 확률이 높아지니까.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
“흐응, 딱딱해라. 건조해라! 그런 애정 메마른 소리로 날 움직이려는 거야, 카델?”
정말이지 일관적인 투정이었다. 카델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성의 없는 손길로 라이돈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한 번만 가 주자. 착하지?”
그야말로 애완동물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으나, 정작 라이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변태네, 카델! 이건 애정이 아니라 욕정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헛소리 말고 빨리 꺼지기나 해라, 요정.”
“반, 봤어? 카델이 내 엉덩이를 만졌어!”
“그대로 뜯어 버리기 전에 꺼지라고.”
반의 살벌한 일갈에 라이돈은 큰 소리로 웃으며 비행의 고도를 높였다. 카델은 떠나가는 라이돈에게서 시선을 거둬 균열을 확인했다.
‘스토리의 전개를 지키라는 건 아쉬브카가 봉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란 얘기야. 그러려면 봉인의 복구가 우선이다. 라이돈과 내 마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니, 한시라도 빨리 호계 기사단을 끌어와야 해.’
그리고 그동안, 자신과 반은 아쉬브카가 이 이상 몸을 빼내기 전에 흡혈충의 수를 줄여 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