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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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흡혈충 장막의 너머.

반의 기대와는 달리 라이돈은 카델을 보호하지 못했다. 카델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10분 줄 테니까 그 안에 봉인 복구해. 못하면 버리고 카델한테 갈 거야.”

흡혈충 장막이 그들과 기사들의 사이를 차단한 직후. 또 다른 흡혈충이 나타나 마법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맹공격이었다.

아무리 카델이래도 그 모든 공격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라이돈은 위태로워지는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곤 곧장 환언을 사용하려 했으나. 멀리서부터, 카델의 부름이 들려왔다.

“라이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마법사들을 지켜! 절대 봉인을 멈추게 둬선 안 돼!”

그리 외치는 카델의 주위로는, 다른 마법사들을 노리는 숫자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흡혈충이 달려들고 있었다. 라이돈은 분명하게 싫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그의 부정이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카델에게 닿았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라이돈은 카델을 지키는 대신, 마법사들을 보호했다. 결단코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카델의 선택에 대한 짜증과 무능한 인간에 대한 분노는, 안 그래도 제멋대로인 라이돈의 행태를 더욱 막무가내로 만들었다.

마법사들을 감싼 얼음 장막은 두께와 크기가 제멋대로였고, 흡혈충을 노린 얼음 창의 궤도는 아군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주위로는 사정없이 눈발이 몰아쳐 초마다 뚝뚝 기온이 내려갔다.

덕분에 마법사들은 뜻하지 않은 혹한 속에서 요정의 협박을 배경음 삼아 꾸역꾸역 마력을 뽑아내야 했다. 그를 지적할 마틴은 이곳의 누구보다도 봉인에 몰입하고 있었으니. 아무도 군말을 얹지 못했다.

“……짜증 나네.”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 카델을 둘러싼 흡혈충 무리를 바라보았다. 종종 틈새로 빠져나오는 불꽃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금세 사그라졌다.

카델이 고작 벌레 따위에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라이돈은 신경이 쓰였다. 어디까지 카델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고민도 됐다.

좋아하니 되도록 부탁하는 건 전부 들어주고 싶은데. 이 정도로 괴로운 부탁까지 들어줘야 하는 걸까?

“딱 10분이야. 10분만 기다릴 거야, 카델.”

라이돈은 들리지 않을 협박을 중얼거리곤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라이돈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시점. 카델은 지독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다.

갉작. 갉작.

벌레의 가느다란 다리가 쉴 새 없이 장막을 두드렸다.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은 뜨거운 불길마저 주저 없이 물어뜯었다. 놈들은 장막의 불꽃에 타들어 가기는커녕, 불꽃의 마력을 맹렬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벌레가 카델의 장막 위를 덮듯이 달라붙어 그를 서서히 압박해 갔다. 많은 마력을 사용할수록 놈들은 강해졌고, 카델은 약해졌다.

‘설마 벌써부터 흡기충(吸氣蟲)을 꺼낼 줄이야. 아쉬브카가 원래 이렇게 판단력 좋은 마족이었나?’

카델에게 달라붙은 벌레의 정체는 바로 ‘흡기충’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을 공격하는 흡혈충과 모습은 비슷했으나, 흡기충이 빨아들이는 것은 ‘혈액’이 아닌 ‘기운’이었다. 놈들은 마법사인 카델에게서 마력을 뽑아 가는 중이었다.

두 벌레의 습성은 다르지만, 물리면 죽는다는 사실은 똑같다. 오히려 흡기충 쪽이 더욱 악랄했다.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놈들이었으니.

‘나를 죽이면 봉인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야. 아직은 라이돈이 나 대신 마법사들을 호위해 주고 있지만…….’

봉인이 완성되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게다가 서둘러 흡기충을 떨쳐 내지 못한다면 다음 타깃이 라이돈이 될 수도 있었다.

‘마법을 쓰면 마력을 빼앗기고, 쓰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어느 쪽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시야가 차단된 탓에 흡기충의 정확한 수도 모를뿐더러, 놈들을 한 방에 떨쳐 낼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남은 마력의 양이 부족했다.

‘봉인진에 있는 아군 때문에 광범위한 마법은 아예 사용하지도 못해. 어떡하지?’

적은 마력으로 흡기충이 몰려든 범위만을 섬세하게 노려 한 방에 썰어 버릴 마법. 그런 효율 좋은 마법 따위, 카델은 알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마법의 속성을 바꿔 돌파구를 찾아봐야 하는 걸까.

‘하지만 뭘 택하든 적이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이상 내 쪽에 가해지는 타격도 무시할 수 없어. 자칫 잘못했다간 자폭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실시간으로 얇아지는 장막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장막에 불어넣는 마력을 즉시 빼앗길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생존만이 아닌 퀘스트의 성공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 가뜩이나 적은 선택지의 폭이 좁아졌다.

‘라이돈은 지금 움직여선 안 돼. 어떻게든 봉인이 이어지게 도와야 한다. 반은 흡혈충 장막에 갇혀 있으니 빠져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야.’

부하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숨을 부지하는 동시에 이 돌발 퀘스트를 처리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

‘……방법이 없어.’

절망적인 결론이 나자 온몸에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내내 귓가를 맴돌던 흡기충의 갉작거리는 소리가 도드라지며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본능적으로 장막의 두께를 넓혀 스스로를 보호할수록 몸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퀘스트의 성패를 따지기 전에, 나는 살 수 있는 것인가.

생존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주저앉은 그의 발끝을 타고 뱀처럼 은밀하게 기어올랐다.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코앞에 닥친 위기를 알리는 사이렌 같았다.

‘라이돈에겐 내가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으니 바로 구해 주진 못할 거야. 그 전에 이상을 눈치채고 도와준다고 해도,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달려들던 벌레의 정체를 눈치챘다면 곧장 라이돈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흡혈충이라면 몰라도, 흡기충을 감당하기에 카델은 이미 대량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였으니.

‘이거 진짜 위험하잖아.’

퀘스트는 고사하고 살아남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숨통을 조여 왔으나, 지금처럼 손아귀의 마디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침착해 봤자 내놓을 방안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모든 것이 무용해졌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몸은 설원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벌벌 떨렸고, 맹렬하게 돌아가는 사고 회로는 오직 하나의 결론만을 도출해 냈다.

죽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회피가 불가했다. 당장 그를 도울 수 있는 아군도 없었다. 그 와중에 흡기충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져서, 카델은 자신의 마력이 서서히 동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립된 공간 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벌레 소리와 함께 최악의 죽음을 상상해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카델이래도 버티기 힘들었다. 정신력이 빠르게 마모되고 있었다.

질끈 눈을 감은 채 숨을 골랐다. 설마 돌발 퀘스트에서 이런 위기를 직면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몇 번쯤 퀘스트를 진행하다 죽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이 기사단 승격 직후는 아니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탁하게 흐려진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두려움. 카델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었다. 도저히 해소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땅이 꺼지는 듯한 아득함마저 느껴졌다.

장막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마력으로 보강하려 했으나, 마력을 쏟아붓는 족족 너머의 흡기충에게 빼앗겨 구멍은 봉해지지 못했다. 구멍은 점점 면적을 넓혀 갈 뿐이었다.

카델은 지독하게 실감 나는 죽음의 앞에서, 트럭에 치였을 때도 보지 못한 주마등을 보았다.

반과 루멘, 라이돈을 처음 만난 순간. 그들과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른 순간. 가르엘을 설득해 낸 순간. 마밀의 잔소리와 반의 다정한 염려, 라이돈의 웃음소리, 그리고.

“……약속했는데.”

루멘과의 약속. 긴 기다림의 끝자락에 언제까지고 서 있겠다는 그와의 약속이, 여느 때보다도 뜨겁게 떠올랐다.

동료들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카델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자신이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지껄였던 모든 약속을, 결국은 지키지 못한 채 떠나 버리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살아남아야 했다. 설령 퀘스트를 실패한다 해도, 그는 살아야 했다.

그리 생각한 때였다.

장막의 바깥에서, 푸르스름한 섬광이 떠올랐다. 섬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 일순, 카델을 공황으로 몰아갔던 지저분한 벌레 소리가 멈췄다. 모든 소리가 단숨에 차단된 것이다.

“이건…….”

그리고 그다음 순간, 벌어졌던 장막의 구멍 아래로 흡기충의 시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카델은 갑자기 흡기충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시체의 상태에 주목했다. 흡기충은 그 작은 몸뚱이가 완벽하게 양단된 상태였다. 놀라울 만큼 깔끔한 절단면.

‘설마.’

불안감으로 쿵덕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이내 그는 거의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고, 장막을 두드리며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벌레의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그 모든 것이 끝난 후.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은, 카델의 모든 긴장을 풀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등장할 생각은 없었는데. 반하면 곤란해, 대장.”

장막을 거둬 냈다. 근처에 남은 흡기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불꽃이 거둬진 시야 속으로, 우뚝 선 한 사내의 뒷모습이 비쳤다.

미풍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는 흑발. 흐트러짐 없는 강직한 기품이 느껴지는 곧은 자세. 허리춤에 매달린 긴 장검과 그를 쥐고 있는 희고 단단한 손마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돌리자, 깊고 푸른 두 눈이 드러났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카델은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멘.”

그 조용한 부름에, 루멘은 반 뼘 빠져나왔던 검을 납검하며 설핏 미소 지었다.

“많이 기다렸어?”

“기다리다 죽을 뻔했어.”

“……나도.”

루멘은 주저앉은 카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마주 잡자 전해지는 온기에 그제야 루멘이 진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어떻게 이런 완벽한 타이밍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신기해 루멘을 바라보니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카델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맞잡은 손에 힘을 풀었으나, 루멘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힘을 주어 잡았다.

루멘은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으나, 그의 눈빛에선 종종 흘러넘친 감정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진한 열기를 띠었고, 불완전했으며,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루멘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색소라도 추출당한 거야?”

“무슨 소리야?”

“눈이랑 머리. 어둡게 바뀌었잖아.”

“아……. 이건 사정이 있어. 여기서 설명하긴 얘기가 길어. 지금은 우선—”

“알아.”

루멘은 카델의 말을 가로막으며, 꾹 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방금 전투에 참여했다곤 믿기지 않는 상황 판단력을 발휘했다.

“봉인을 지키는 게 우선이겠지. 놈들의 움직임이 빠르긴 하지만 충분히 제압 가능해. 라이돈이 바깥에 있는 걸 보면 안쪽엔 반이 있는 모양인데. 안쪽과 바깥쪽, 어디부터 정리해 줄까?”

순식간에 전황을 정리한 데다 그전에는 없던 선택지까지 쥐여 주었다. 카델은 중심 없이 비틀대다 드디어 발 디딜 곳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왜 웃냐는 듯 자신을 내려보는 루멘의 잘난 얼굴에, 드디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은 카델은 더 미루지 않고 루멘을 활용했다.

“안쪽부터. 마족에 대한 설명은 반에게 듣고, 되도록 반이 광역기를 사용할 수 있게끔 도와줘. 바깥쪽 봉인은 나랑 라이돈이 해결해 볼게.”

“깔끔해서 좋군.”

그럼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기분 좋게 중얼거린 루멘이 망설임 없이 흡혈충 장막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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