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입술을 문지르자 은근한 열기와 쓰라린 감각이 느껴졌다. 카델은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느릿느릿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키스는…… 키스네.”
상대가 남자인 데다 아끼는 부하라 할지라도, 키스는 키스였다. 남자 부하와 키스했다고 천지가 개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속이 뒤집히는 불쾌함도 없었다.
어쩌면 루멘이 남긴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걱정 마. 입맞춤 한 번으로 대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어수룩한 놈은 아니니까. 뭐, 대장은 날 가졌다고 생각해도 돼. 실제로도 가졌고.”
아직도 특유의 장난기 섞인 여유로운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무거운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듯 깔끔한 태도를 보였다.
그에 카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딱히 덧붙일 말이 없기도 했고,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시스템 창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축하드립니다! A급 기사 ‘루멘 도미닉’ 영입 완료!]
[현재 기사단 코스트: 13/25]
기다리고 기다렸던 루멘의 입단은 그의 입맞춤으로 종결되었다. 영입의 기준을 도통 알 수가 없었으나, 일일이 파고들기도 힘들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델은 루멘을 앞에 둔 채로 입맞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그의 능력치를 열람했다.
<루멘 도미닉>
현재 등급 : A급
최대 각성 등급 : S급
포지션 : 딜러
착용 장비 : 수려한 장검(A), 고급 갑옷(A)
호감도 및 충성도 : 89/100
그리고 충격적인 호감도 수치를 발견했다.
‘89면 반보다 고작 1 낮은 거잖아. 이 정도로 높으니까 막, 입술도 들이밀고 그러는 건가……?’
말문을 잃은 채 허공을 노려보는 카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루멘은 어색한 공기를 풀어 보고자 이런저런 화제를 꺼냈다.
카델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기습 키스에 이어 호감도 89라는 2연타를 맞은 직후는 아무리 카델이래도 평정심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카델은 적린 기사단에게 하달된 임무를 반과 라이돈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끝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뭐라도 더 얘기할 수 있었고, 실제로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호감도가 5였던 녀석인데. 언제 그만큼이나 오른 거지.’
충격적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루멘만큼이나 자신 또한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온전히 실감 났던 것이다.
루멘과 반, 라이돈이란 부하들이, 그의 안에서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처음엔 스토리의 끝을 보기 위한 카드로, 그다음에는 도구가 아닌 부하로, 이제는 목숨조차 아깝지 않을 소중한 동료로. 조금씩 격상해 가는 그들의 존재감이, 카델은 불쑥 두려워졌다.
“……아니야.”
벌떡 몸을 일으켠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손 틈새로 혼란스러운 눈빛이 비쳤다. 무엇이 아닌지도 모르는 채, 연신 아니라고 중얼거리던 카델은 아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듯 떨리는 시선 끝으로 협탁 위에 올라간 작은 약병 하나가 걸렸다. 기력 회복 물약이었다. 연속된 출정을 떠나야 하는 기사단을 배려한 황제의 작은 선물로, 한 병이면 며칠 묵은 피로도 싹 가시는 물약이라고 했다.
저 약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루멘의 과거를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루멘을 기다리는 내내 그가 대체 무엇을 버리려 하는지, 그가 포기한 것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의 과거를 보기가 꺼려졌다. 반의 과거를 훔쳐봤을 때마다 카델은 더 많은 것을 짊어지게 됐다. 그를 더 아끼게 됐고, 소중히 대하게 됐다.
그가 소중해진다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역시 소중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델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떠날 사람이었다. 떠날 사람이 떠날 곳에 뿌리를 내리려 드는 것보다 바보 같은 짓은 없었다.
“미치겠네.”
카델은 짜증스레 뒷머리를 헝클였다. 따지고 보면 굳이 과거를 볼 필요는 없었다. 평범한 관계라면 타인의 과거 따위, 먼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게 당연했다. 루멘의 과거를 보고 싶은 것은 자신의 욕심일 뿐으로, 알고 난 뒤에 감당해야 할 짐 역시 자신의 몫이었다.
감정이 무거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과거를 보지 않으면 된다. 간단한 문제였다. 그저 루멘의 결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채, 그의 진심을 좋을 대로 가늠하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자신이 멋대로 끌어들였다. 그의 힘이 탐난다는 이유로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걷게 만들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욕심내도 될 것을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그의 호의와 충성을 받아들인다니. 그가 이 이상 소중해질까 두려워 그의 마음을 부정한다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카델의 눈매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럴 때면 외면이란 걸 모르는 제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정면 돌파가 전부 옳은 일은 아님에도, 한 번 부딪혀 된통 깨지기 전까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됐다, 됐어. 그냥 봐. 보나 안 보나 껄끄러운 건 똑같잖아. 이왕 불편할 거 그냥 한꺼번에 불편하자고.”
고민은 길지언정 결단은 빨랐다. 카델은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다행히 피로가 가득 쌓인 육체는 금세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시청 가능한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라이돈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루멘 도미닉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할 수만 있다면 라이돈의 과거까지 한 번에 해치웠을 텐데. 카델은 전투적으로 변하는 마음가짐을 느끼며, 새까맣게 점멸하는 시야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