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521)

“네? 어째서요?”

“그건, 그러니까…….”

루멘의 순진한 물음에 코버는 곤란한 듯 대답을 망설였다. 그런 코버를 빤히 응시하던 루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제게 검이 되라 하셨어요. 그래서 전 뛰어난 검이 되기 위해 매일 훈련하고 있는 거고요. ……제게 자질이 있다는 걸 알면 분명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나요, 코버 경?”

아무래도 처음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루멘의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현 도미닉가의 가주. 카델은 그의 건조하고도 냉담했던 음성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에 잠겼다. 그리고 그것은 코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람들은 주인보다 뛰어난 검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검은, 어떻게든 주인을 해치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형님을 해치게 되리란 뜻인가요?”

“아뇨. 아니에요, 도련님. 다만, 누군가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해 둬요.”

코버는 루멘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되는 듯 애써 말을 돌렸다. 루멘은 필사적인 코버를 위해 대충 장단을 맞추었으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렸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뭐야, 이거.’

그리고 카델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가문 내 루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루멘의 아버지는 가문을 이을 첫째를 애지중지해서, 아무도 그 자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능력 좋은 루멘을 첫째를 지킬 검으로써 키우려 한 건가? 루멘의 능력이 부각되는 걸 피하는 걸 보면, 철저한 이인자로 키우려 했던 모양인데.’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형에 대한 복종을 주입시키는 아버지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으나, 카델은 그를 향한 깊은 경멸을 느꼈다.

그동안 루멘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코버 경. 그렇다면 전 검기를 단련하지 않겠어요. 이 힘이 형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처음부터 배우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예……?”

“검기가 없어도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도, 도련님.”

기가 차는 결론에 코버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카델 역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루멘의 태도가 낯설어 기함했다.

‘뭐가 저렇게 착해 빠졌어? 루멘 맞아? 아버지란 작자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고, 네 자리를 기억해라.

그 무미건조한 세뇌는 어린 루멘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터였다. 아이를 망치는 부모의 모습은 언제고 참을 수 없이 불쾌하다.

“……도련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코버는 순해 빠진 루멘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 힘은 도련님의 힘입니다. 도련님이 갈고닦아,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도련님의 힘이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군가 멋대로 휘두르게 놔둬서도 안 되는 힘입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단념하지 마세요. 훌륭한 검사는 단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강해지세요. 몸과 마음을 단련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 외의 모든 걱정은 미뤄 두시고, 성장에만 골몰하세요.”

코버는 루멘을 자신의 남동생처럼 아꼈고, 그랬기에 싹이 피기도 전에 스스로 몸을 굽히려는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자신의 권한을 훨씬 벗어나는 일임을 알면서도 루멘을 구제하려 노력했다.

그런 그의 의지를 알아봐 준 것인지. 잠시 망설이던 루멘은 머뭇거리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옆에 저런 사람이 있어서.’

만약 코버가 없었다면 루멘은 자신의 재능을 포기했을 것이다. 적어도 어린 시절을 통으로 날렸을 것임은 분명했다.

코버 같은 이가 루멘을 도왔기에 루멘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가주 자리를 욕심내게 된 걸까.

카델의 막연한 추측은, 바뀐 장면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코, 코버… 코버 경…….”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 루멘에게 조언을 해 주던 코버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먹구름 낀 어두운 하늘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루멘은 우산 하나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시체보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코버를 바라보았다. 가슴에 검이 꿰뚫린 코버의 시체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식어 가고 있었다.

루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으나, 뒤편에 선 누군가가 그를 막았다.

갑작스런 코버의 죽음에 함께 충격에 빠져 있던 카델은, 루멘을 막고 선 또 다른 남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루멘의 아버진가?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외적으로 닮은 곳이라곤 새까만 머리칼뿐이었으나, 분위기는 성인이 된 루멘과 굉장히 흡사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표정과 무감한 눈빛.

그는 시체를 목격한 아들의 앞에서조차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했다. 뿐만 아니라 겁에 질린 루멘의 등을 밀쳐 시체 앞으로 떠밀기까지 했다.

“잘 보거라. 네 형을 음해하려던 자다.”

“마, 말도 안 돼요, 아버지. 코버 경이 그랬을 리 없어요!”

“나중엔 네가 직접 처리해야겠지. 누군가 네 형을 해치려 든다면, 그보다 먼저 네가 움직여야 한다. 자, 루멘. 이 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바로 보거라.”

“싫어요……. 오해하신 거예요, 아버지. 코버 경은, 코버 경은…….”

루멘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시체를 본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자신과 친밀했던 사람이라니.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카델은 괴로워하는 루멘을 빌어먹을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빼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시체를 외면하는 루멘의 목덜미를 붙들고 억지로 내려보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작태를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루멘과 카델을 동시에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자는 네가 검기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겼지. 내 눈을 피해 은밀하게 네 힘을 키우려 들었다. 그게 네 형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 아버지, 그건—”

“네게 네 형의 자리를 빼앗게 만들어, 가주가 된 네게서 득을 보려던 속셈이었던 거지. 뻔뻔한 놈. 배신자는 죽어 마땅해.”

코버는 누군가를 음해할 만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직감은 옳은 듯했다. 루멘의 아버지는 루멘이 본인 몰래 특별한 힘을 가꾸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말도 안 되는 피해망상에 휩싸여 애먼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것은 단편적인 상황만을 알고 있는 카델도, 아직 한참 어린 루멘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잖아……?’

루멘은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빗물에 차게 식은 뺨과 턱이 달달 떨리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위태로운 아들의 모습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를 시체 앞으로 꿇어 앉혔다.

“그 얕은 속셈도 꿰뚫지 못하고 놀아난 스스로를 반성하거라. 전부 반성할 때까지 돌아올 생각일랑 말고.”

명백한 학대였다. 카델은 경련하듯 떨고 있는 루멘의 모습에 속이 문드러지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저 미치광이를 때려눕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함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루멘은 꼼짝하지 못했다. 흐느낌도 없이 빗물 섞인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창백해진 손을 뻗어 코버의 눈을 감겨 주었다.

‘루멘…….’

이 거친 빗속에서, 소중한 이의 시체를 앞에 둔 어린 소년의 마음이 어떠할지. 카델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루멘의 옆에 앉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그를 대신해 조용히 분노할 뿐.

장면은 천천히 전환됐다.

루멘은 굳게 닫힌 방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림자 진 벽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카델은 곧 그 원인을 알아차렸다.

방문 너머에서는 그의 부모님이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루멘도 당신 아들이에요, 프로치! 조셉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아이가 아니라고요!”

“누가 희생시킨다고 하던가? 차남이 장차 가주가 될 장남을 보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부인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잘 모르겠소.”

“진심이에요…? 당신, 그 애 주변의 모든 걸 통제하고 억제하려 들잖아요. 조셉보다 뛰어난 부분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가 짓밟고, 그 애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을 해치고……. 제발 그만둬요!”

“조셉은 몸이 약하고 천성이 여린 아이요. 그런 아이가 건강하고 영특하게 자라나는 동생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소? 루멘을 짓밟는 게 아니오. 조셉을 보호하려는 거지.”

두 남녀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 하인이라도 달려와 이 모든 다툼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루멘을 데려갈 법도 하건만.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카델은 루멘의 귀를 막아 주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며 초조하게 이야기를 엿들었다.

“왜 그렇게 조셉에게 집착하는 거예요? 조셉은 당신 아들이기도 하지만 제 아이이기도 해요. 그 아이는 가주가 되기에는 너무 약해요. 그렇게 부담감을 줬다가는 언제 병세가 악화할지 모른다고요.”

“……그래서. 지금,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조셉보단 루멘이 가주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하는 거요? 부인도 루멘을 가주 자리에 올리고 싶은 모양이지? 멀쩡히 살아 있는 장남을 없는 셈 치고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과 여자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루멘은 흠칫 놀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빛이 방문을 응시했다.

“꺄악! 프로치!”

“집착이 아니라 마땅한 규칙을 따르는 게요! 루멘을 이용하는 건 바로 그대들이지. 내가 아니라!”

끔찍한 다툼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건지, 결국 루멘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드러난 내부에선, 루멘과 쏙 빼닮은 여성이 엉망이 된 몰골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칼 아래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정돈하며 굳은 루멘의 앞으로 달려갔다.

“루멘,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어서 돌아가렴.”

“어머니…….”

“어서.”

그녀는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 루멘을 방 밖으로 밀어 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자기 아들을 안심시키려 애써 미소 지었다.

“난 괜찮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의 아버지는 루멘과 부인을 외면한 채 아예 등을 돌리고 있었다. 루멘은 그들의 대비되는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또다시 장면이 전환됐다. 바뀐 배경 속에서, 루멘의 어머니는 핼쑥해진 얼굴로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짐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커다란 짐마차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분주한 일꾼들 틈에서, 그녀는 자신을 올려 보는 루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정말 이곳에 남을 거니? 이 어미와 함께 가자. 네 아비보다는 못하더라도, 내 가문도 힘이 있다. 널 지켜 줄 수 있어.”

그녀는 남편과 갈라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루멘이 거절했던 모양인지, 그를 향한 시선엔 우려와 걱정이 가득했다.

루멘은 얌전히 어머니의 손길을 받아들이면서도 작게 고개를 저어 거절을 표했다. 그 어린 눈동자에 맺힌 체념의 기운에, 카델은 그가 무슨 이유로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걱정한 거구나. 어머니가 코버처럼 해코지를 당할까 봐.’

혹시라도 자신을 데려간 어머니가 다칠까 봐. 그는 스스로 가문에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아직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과거의 루멘은.

어머니와 작별한 뒤, 멀어진 마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루멘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위해 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