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계절이 변화했다. 카델이 보는 과거 속에서, 루멘은 조금씩 성장해 갔다. 몸과 얼굴의 선이 굵어지며 강견한 청년의 모습으로 탈피하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온순하던 눈빛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잔잔히 머물러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순진하던 행동거지는 꼭 감정 없는 사람처럼 딱딱하고 냉랭해져만 갔다.
그 달갑지 않은 변화의 이유를, 카델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 잔인하잖아.’
루멘의 곁에 머물렀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도.
어린 루멘과 함께하던 사냥개라고 화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저 짐승 녀석이 조셉을 위협하는군.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는 필요 없다.”
사냥개가 루멘의 형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녀석은 그저 사냥개의 본분에 충실하며 들짐승 한 마리를 잡아 왔을 뿐이었다.
사냥개는 루멘이 녀석을 깨끗하게 씻기고, 맛있는 간식을 먹여 칭찬한 다음 날. 그의 앞에서 죽었다.
“하지 마! 죽이지 말란 말이야! 데비는 형을 위협한 적 없어, 형을 본 적도 없다고! 아아악!”
프로치의 병사들은 울부짖는 루멘을 붙들어 그의 개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만들었다. 프로치의 명령이니 따르긴 했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막고 나서는 자도 없었다.
다음은 루멘의 검술 훈련을 위해 고용된 외국의 검사였다.
루멘의 새로운 스승은 실력이 썩 좋지 못했다. 그것은 루멘은 물론 스승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허허, 이러다가 제가 도련님 제자로 들어가게 생겼는데요? 도련님은 저보다 더 뛰어난 스승에게 배움을 받으셔야 할 실력인데…….”
“에릭 경께서도 충분히 뛰어난 실력자십니다.”
“물론 그건 그렇지만요. 제게 배워 봤자 루멘 도련님의 성장만 더뎌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거, 힘들게 얻은 일자리를 잃기는 싫으니 분발해야겠군요.”
에릭은 루멘의 폭발적인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방해물이나 다름없었다. 루멘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수더분한 성격의 에릭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도련님 같은 인재는 처음 봅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꼭 이 에릭 럽스터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에릭 또한 루멘을 마음에 들어 했고, 훈련이 끝나면 마을 술집에서 도미닉가 둘째 공자의 천재성에 대해 떠들고는 했다.
그 소문은 발 빠르게 번져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국왕은 최연소 검기 발현자가 본인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데에 몹시 감복했다. 그리고 국왕이 루멘을 성으로 직접 초대해 명검을 하사한 다음 날.
“……미안합니다, 에릭 경.”
외국인인 에릭은 변변찮은 묫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채 좁고 너저분한 공동묘지 한구석에 묻혔다.
“불운한 사고로 절명했다는구나. 젊은 자가 그토록 허망하게 죽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그나저나. 그자가 네게 헛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더냐?”
그에게 닥친 불운한 사고란 바로 자신과의 만남이었음을, 루멘은 모르지 않았다.
다음은 조셉 몫의 책을 몰래 빼돌려 루멘에게 전해 주던 하인이었다. 그다음은 진탕 술을 마시고 동료들에게 루멘의 뛰어난 실력과 성품을 칭찬하던 병사. 조셉에겐 좋은 약을, 루멘에겐 귀한 장검을 선물했던 상인.
차례차례 죽거나 실종되었고, 이제는 루멘뿐 아니라 가문의 모든 이들이 그들에게 닥친 불운의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무서워서 어디 루멘 도련님 근처에나 가겠니? 저번엔 루멘 도련님 식사가 조셉 도련님 것보다 좋다면서 요리사를 두들겨 패라고 시켰다는 거야. 아니, 내가 봤거든? 애초에 둘이 같은 음식이었다니까?”
“난 진짜 루멘 도련님이 불쌍해 죽겠어. 그 뛰어난 외모에, 실력에, 다른 집안이었으면 예쁨만 받으면서 사셨을 텐데. 요즘 얼굴에 그늘진 것만 보면 내 속이 다 갑갑해.”
“얘, 동정하지 마. 지금껏 죽어 나간 놈들이 다 동정심 발휘해서 그런 거 아니니. 못 본 척, 못 들은 척, 관심 없는 척해야 산다.”
루멘의 시종을 드는 하녀들은 서서히 고립되어 가는 그를 못 본 체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때문에 루멘은 자신을 동정하는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화를 내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우울한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되레 속이 타는 것은 카델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참담한 사건들을 연이어 지켜본 그는, ‘프로치 도미닉 암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셈하고 있었다.
‘안 죽이면 속 뒤집혀서 마족 토벌이고 뭐고 못 할 것 같다고. 개새끼. 자기 아들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짓밟아서 얻는 게 뭔데? 그렇게 비실비실한 첫째를 가주로 올려 봤자, 그 과정을 다 지켜본 가문 사람들이 퍽이나 새 가주를 떠받들겠어.’
카델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만져지지도 않는 루멘의 등을 밀어 내려 용을 썼다.
‘넌 왜 여기서 저런 수다를 다 듣고 있는 거야! 빨리 방으로 돌아가라고!’
카델의 간절한 외침이 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루멘은 얕은 한숨과 함께 발을 뗐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누군가 그의 앞을 막고 섰다.
“도련님, 오늘도 훈련하러 가시나요?”
“……아, 메리. 응. 훈련은 매일 해야지.”
“그럼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간식을 만들어 드릴게요. 호박파이 어떤가요? 애플파이도 괜찮지만, 이번에 좋은 호박이 들어왔거든요.”
“그럼 부탁…… 아니, 아니야. 난 괜찮으니 형님에게 가져다줘. 공부하느라 출출할 거야.”
메리는 도미닉가의 하녀장으로, 지금으로선 거의 유일하게 루멘과 살갑게 대화하며 그를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카델은 그런 그녀가 고맙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트집이 잡혀 죽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것은 루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간식조차 거부하는 둘째 도련님의 모습에, 메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씀드렸죠?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 후작님이 도련님 나이만 하셨을 때부터 도미닉가를 모셨던 사람이에요. 쉽게 내쳐지지 않는답니다. 유능한 하인이니까요.”
“…….”
“호박파이, 괜찮죠?”
“……응.”
작은 긍정에도 메리는 활짝 웃으며 그를 응원했다. 그제야 루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메리는 외로운 루멘의 삶의 유일한 친구였다.
“파티는 고역이야. 웃는 것도 힘들고, 대화를 이어 가는 것도 힘들어. 원하지도 않는 선물 공세에 일일이 감사를 표하기도 괴롭다고. 아무래도 난 귀족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메리.”
“그런가요? 귀족도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왕 귀족으로 태어나셨으니, 그 자리를 누려 보는 건 어때요? 높은 자리니까요. 아무도 도련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거죠.”
“……아버지조차?”
“좋은 생각이네요!”
그녀는 루멘을 위로해 주었고.
“검술은 정말 재밌는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실력을 겨뤄 보고 싶어. 세상엔 뛰어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행을 떠나면 되겠네요. 성인이 되는 해에, 대륙을 넘나드는 모험을 하는 거죠.”
“안 돼.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이런, 도련님. 성인이 돼서도 일일이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다닐 생각이세요? 기사의 모험은 하늘도 막을 수 없답니다.”
어두운 밤에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었다.
“곧은 자세에 곧은 기운이 깃들어요. 꼭 훈련할 때만이 아니라, 저택 안에서도 꼿꼿하게! 어깨를 쫙 펴고 걸으셔야죠. 도련님의 집이잖아요.”
“……내가 당당하면 눈에 거슬릴 거야.”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추려고 하지 말아요. 도련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게 뭔지를 생각해야죠. 자아, 똑바로 서세요!”
그녀는 루멘의 부모였고,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꽉 막힌 지옥의 숨구멍이자, 허덕이는 그를 위한 한 줄기 바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죽음은, 루멘이 지금껏 간신히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리… 안 돼, 메리……. 죽지 마. 날 혼자 두지 마…….”
메리는 작은 침상에 누워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고, 뺨은 깊게 패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루멘은 서서히 죽어 가는 메리의 손을 꽉 움켜잡은 채 흐느꼈다.
“도련님 때문이 아니에요……. 아시죠…?”
“내가 메리를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투정만 부리지 않았어도……. 누구야, 메리? 누가 네게 독을 먹였어? 내가 복수해 줄게. 내가…… 전부 죽여 줄게. 응?”
“전 그저, 나이를 먹어 죽는 거랍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
울부짖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루멘은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메리를 노려보았다.
“내 아버지잖아. 내 아버지가 시킨 짓이잖아. 그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인간이, 내가 어느 곳에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소중한 모든 걸 없애 버리려고!”
“루멘 도련님.”
메리는 힘겹게 손을 뻗어 눈물로 흥건해진 루멘의 뺨을 쓸었다. 앙상한 손끝에선 여전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이곳을 떠나세요. 바깥에는 훨씬 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저보다 다정하고, 아름답고, 귀한 것을 찾아…… 소중하게 여겨 주세요.”
“싫어…….”
“이곳에선 도련님의 삶을 찾을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도련님은, 이미 전부 아시잖아요.”
메리의 진심 어린 조언에도 루멘은 연신 싫다며 고개만 저었다. 점점 수그러지는 고개 아래로 눈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카델은 그 모습을 차마 똑바로 지켜보지 못하고 멀찍이서 바닥만 내려보았다. 그의 불행이 괴로웠다.
“멀리 떠나세요.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그가 가주가 되고자 했던 것은, 권력을 원해서도, 좋은 사람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루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짓밟고 망가뜨린 프로치 도미닉을, 그의 소중한 것들을 똑같이 깨부수기 위해. 오로지 복수를 위해 성장하려 했던 것이다.
어둡게 일그러지며 뒤바뀌는 장면 속에서, 카델은 그의 진득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