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521)

“……멀쩡해 보이네요. 기분도 좋아 보이고.”

“이런, 실망했나요? 아시다시피 제겐 마족의 뛰어난 회복력이 있어서 말입니다.”

가르엘은 자연스럽게 카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지 개운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부하들…… 아니, 이제는 동료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분들은 안 보이네요. 다들 모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실종을 꾸며 냈습니까?”

가르엘이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안도감부터 들어야 할 텐데. 카델은 언제나처럼 느긋한 그의 모습에 은근한 분노를 느꼈다.

가르엘은 자신의 손을 쳐 내는 카델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절 가지고 싶다면서요? 남의 것을 빼앗으려면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원래 주인과 싸워 쟁취하거나, 주인 몰래 훔치거나. 경은 절 위해 황혼 기사단과 화이트 왕국을 칠 수 있나요?”

“그건—”

“못 하겠죠. 그렇다고 몰래 훔치는 것도 경의 성미에는 맞지 않을 것 같으니. 제가 직접 빠져나온 거예요. 이럴 때는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가르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위치는 화이트 왕국이 자국의 대사 격으로 제국에 파견까지 보낸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런 인물이 하루아침에 타국의 기사단, 그것도 일개 단원의 신분으로 들어간다고 선언한다면. 국왕의 허락은 물론이거니와 제국까지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은 뻔했다.

그랬기에 카델도 처음 가르엘이 알아서 자리를 정리하고 오겠노라 말했을 때 그 방법을 궁금해한 것이었다. 카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카델이 이렇다 할 대답을 꺼내지 못한 채 입술만 앙다물고 있자, 가르엘은 얕은 한숨을 쉬며 몇 걸음 물러섰다.

“죄책감이 드나 보네요. 그렇죠?”

“……모들렌 경이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밤낮없이, 쉬지도 못한 채로요.”

“그렇겠죠. 이런 단장에게조차 끝까지 충성을 다해 주던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러니 저보다 훨씬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결론인가요?”

“이게 결론이에요.”

짧은 침묵 속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카델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가르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미 그와 황혼 기사단을 완벽하게 분리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황혼 기사단은 그가 오랫동안 단장으로서 이끌어 왔던 소중한 집단이다. 본인의 출생을 안 뒤부터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긴 했으나, 그것 역시 후임으로 찍어 둔 모들렌에게 자연스럽게 권한을 양도하기 위함이었다.

카델은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실종된 자신을 찾고 있을 부하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원망하고, 선택을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체 어쩔 생각인 겁니까? 황혼 기사단은 수색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끝끝내 찾지 못한다고 해도, 적린 기사단에서는 어떻게 활동할 생각인데요? 영원히 정체를 숨기고 살 수도 없을 거 아닙니까.”

“그건 카델 경이 생각해 줘야겠죠?”

“예……?”

“이탈 문제는 제가 직접 처리해 드렸으니, 이후의 문제는 제 새로운 단장님의 몫일 것 같은데.”

“아니 무슨,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서…….”

순간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가르엘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내려간 카델의 턱을 직접 다물려 주었다.

“그대의 밝은 운명이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주리라, 믿고 있어요.”

*

“그러니까— 실종되었다던 가르엘 경이 사실은 실종이 아니었고. 실종된 척 일을 꾸민 이유가 황혼 기사단의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적린 기사단의 단원이 되기 위해서다……라는 이야긴가?”

“맞습니다, 루멘 경. 거기에 제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까지 덧붙인다면 한결 깔끔해지겠죠.”

현재 적린 기사단은 산속에 모여 이 황당무계하고도 어이없는 사태를 마주하고 있었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가르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단의 앞에서 내내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어 내렸다.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도, 시간도 없으니.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제겐 마족의 피가 섞였습니다. 이런 몸으로 신성기사단을 이끄는 단장 노릇을 하는 게 지겨워지려던 참에, 제 정체를 눈치챈 카델 경이 입단을 제안했죠. 전 받아들였고, 이번 실종이 그 결과입니다.”

담백한 설명과는 달리 드러난 가르엘의 역안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그의 정체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던 루멘과 반에게는 그랬다. 두 남자는 나무 그늘에서 더욱 음산하게 번뜩이는 가르엘의 역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반면 이미 냄새로 그의 정체를 알고 있던 라이돈은 알게 뭐냐는 듯 지루한 낯으로 하품만 해 댈 뿐이었다. 사실 그에겐 가르엘이 어디의 단장이든, 마족 혼혈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다만 임명식 당일, 카델에게 붙어 있던 꼴사나운 놈을 간단히 죽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음, 시작부터 정체를 밝히고 들어가니 속이 시원한데요?”

카델은 쾌활하게 웃어 젖히는 가르엘을 말없이 응시했다. 정확히는 이 골 때리는 상황에 반쯤 넋을 잃은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루멘 때랑 똑같아. 적린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사고까지 거하게 쳐 놨는데, 정작 입단 시스템 창은 뜨지 않는다.’

루멘의 경우, 그의 불안한 감정 상태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에게 부족했던 확신을 카델이 채워 줬을 때. 그제야 시스템 창은 정식으로 루멘을 입단시켰다.

그러나 가르엘은 루멘과는 달리 굉장히 당당해 보였고, 되려 어서 제대로 기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라며 독촉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황혼 기사단과의 연이 완전히 끊어져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황을 꼬아 둘 수가 있는 거냐, 저 화상은.’

미운 짓 하나 없이 예쁘게 꼬리만 살랑거리길래 끝까지 그럴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줄 모르고 막연하게 가르엘을 믿었던 것이 원흉이었다.

‘그래. 애초에 화이트 왕국 대표로 파견된 상황에서 평화롭게 단장직을 내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라고 특별히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건 아니야. 영입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서 성급하게 얘기를 나눈 탓도 있고.’

결국엔 자신의 업보라는 걸까. 무거운 한숨을 내쉰 카델이 흙바닥에 대충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에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반과 루멘, 긴 하품에 눈물까지 맺힌 라이돈, 홀로 기분 좋아 보이는 가르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설명이 많이 생략되긴 했지만, 저게 사실이야. 난 가르엘 경의 능력을 높이 샀고, 우리 기사단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어떻게든 기사단에 끌어들일 생각이야. 그러니 너희들도 무슨 수를 써야 충돌 없이 새로운 치유사를 얻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줬으면 해.”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단원 입단 문제는 오로지 카델만의 권한이었다. 새로운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대도 불평할지언정 거부는 할 수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반과 루멘은 기사단에 반쪽짜리 마족 혼혈이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반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입가를 문질렀고, 루멘은 지그시 이마를 짚었다. 그에 비해 라이돈은 무엇 하나 고민하는 기색 없이 태평하게 말했다.

“나한테 사용했던 ‘환상의 날개’를 쓰면 되잖아? 겉모습만 바꾸면 어차피 못 알아볼 텐데.”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하지만 그건 네 상황에서도 그랬듯이 임시방편에 불과해. 가르엘 경은 마기뿐만 아니라 빛 마법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 유명한 사람인 만큼 검술이나 전투 방식도 잘 알려졌을 테고. 세상에 겉모습을 바꾸는 아티팩트나 마도구가 그것뿐인 것도 아닌데, 언제가 됐든 분명 의심을 살 거야.”

카델 본인만 해도 현재 머리와 눈색을 숨긴 채 생활하고 있었다. 겉모습을 속이는 것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르엘 경을 정식 단원으로 끌어들일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아.”

한참 침묵하던 루멘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는 가르엘의 역안에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옮겨 카델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황혼 기사단에게 정체를 밝혀 단장직 해임 문제를 화이트 왕국에 맡기거나, 화이트 왕국의 가르엘 몬자시를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만들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마음에 드는데요, 루멘 경.”

루멘은 자신을 향한 가르엘의 미소를 무시하며 카델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델은 어두운 얼굴로 차례차례 부하들을 둘러보다, 갑갑하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황혼 기사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화이트 왕국에 간섭하지 않은 채 가르엘을 빼낼 방법. 그런 방법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다른 돌파구가 생길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카델에겐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당장 가르엘 몬자시를 원했고, 그가 필요했다. 앞으로의 퀘스트에는 그와 같은 치유사의 존재가 절실했으니.

아무리 카델이래도 완전한 타인보다는 제 사람의 안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결국 결단을 내린 카델이 해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죽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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