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린 기사단은 대규모 전투와 오랜 수색에 지친 황혼 기사단의 하산을 보조했다. 미테란 산지를 벗어나는 동안 일어난 총 세 차례의 습격을 막아 냈고, 탈진한 기사들의 회복을 도왔다.
그러나 두 기사단 사이에서 우정이 싹튼다거나, 지독했던 전투를 회상하는 즐거운 무용담이 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분위기에 질식하겠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알아. 그래서 더 불편한 거지.”
황혼 기사단은 단장을 잃었다. 왕국을 대표하는 유능한 세력이었던 만큼 그들의 유대도 깊었을 테니. 기사단은 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 속에서 숙연하고도 묵묵하게 나아갈 뿐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루멘과 반은 종종 탐탁지 않은 태도를 보이곤 했으나, 그때마다 카델은 따로 주의를 두었다. 지금 황혼 기사단의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이쪽에 있었으니. 불평불만 따윈 품어서도 안 됐다.
카델은 천에 둘둘 싸인 채 말 안장에 묶여 있는 가르엘을 일별했다. 경직된 시체는 꼭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말의 움직임을 따라 들썩이는 몸뚱이는 사람이라기보단 무거운 짐에 가까워 보였다.
가르엘의 연기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적린 기사단 역시 라이돈의 환혹술에 걸린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모두와 보는 것이 똑같아야 돌발 상황 속에서도 튀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도 이렇게 찜찜한데. ……정말 못 할 짓이네.’
가르엘은 처음부터 황혼 기사단을 빠져나올 계획이었고, 빠져나온 뒤 죽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미래에 벌어질 일들의 나열일 뿐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델은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무수한 거짓말로 많은 이들을 속여 왔다. 스쳐 가는 사람부터 아주 소중한 사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꼭 업보가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해도, 업보의 여파로 곧장 다시 죽을지도 몰랐다.
어떠한 변명과 자기합리화도 카델을 편하게 할 수 없었다. 편하게 있고 싶지도 않다고, 그는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은 약 하루 반나절 만에 미테란 산지를 벗어났다. 인접한 마을에 도착한 황혼 기사단은 곧장 화이트 왕국에 전서조를 보냈고, 카델 역시 황제에게 가르엘의 죽음을 알릴 서신을 보냈다.
먼저 답이 도착한 쪽은 화이트 왕국 측이었다. 그들은 황혼 기사단을 즉시 복귀시키기 위해 다수의 마법사를 보냈다.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카델 경.”
“아뇨, 신세 졌다곤 생각하지 마세요. ……부디 잘 추스르시길 바라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경은 제국의 기사이니, 봉인 복구를 우선시하셔야죠. 이번에 수색을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단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고요.”
며칠 새에 모들렌은 척 보기에도 꽤나 수척해졌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탁해진 눈빛을 보면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를 앞에 두고 가증스럽게 연기하기가 괴로워 입을 꾹 다물자, 모들렌이 힘겹게 미소 지었다.
“단장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래도 저희 황혼 기사단과 적린 기사단의 인연은 여전히 이어져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가장 먼저 달려가 도울게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모들렌은 황혼 기사단을 이끌고 이동 마법을 대기 중인 마법사들에게로 이동했다. 카델은 그의 슬픈 뒷모습을 응시하다, 어깨에 두른 망토를 가볍게 들춰 냈다.
“너도 가야지, 라이돈.”
망토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라이돈이 푹푹 한숨을 쉬어 댔다. 미테란 산지를 빠져나가는 내내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려 댔지만 전부 무시당한 처지였다. 이제는 더 조를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라이돈은 축 늘어진 몸을 끌고 카델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그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 없다고 잊으면 안 돼, 카델?”
“누굴 금붕어로 아는 거야? 당연히 안 잊지.”
“매일 내 꿈만 꿔. 내 생각만 해. 하루에 스물네 번 날 그리워해야 해.”
기어코 억지에 가까운 약속을 받아 낸 라이돈이 어렵사리 몸을 돌렸다. 카델은 그가 황혼 기사단의 틈으로 섞여 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법진 위에 올라간 그들이 전부 사라졌을 때.
“대장. 제국에서 답신이 왔어.”
전서조가 가져온 쪽지를 챙긴 루멘이 다가왔다. 곧장 쪽지를 전해 주려던 그는, 드러난 카델의 어두운 낯에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달래 줄까?”
“뭐라는 거야. 쪽지나 줘.”
“읽을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
“기분 따라서 가려 읽어도 될 게 아니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카델은 이번 문제를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 무거운 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부하들은 단장의 독단적인 선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획에 동참했을 뿐.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그랬기에 카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쪽지나 내놓으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루멘은 그의 연기에 순순히 넘어가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위로의 키스라도 해 주면 기분이 나아지려나.”
“……미쳤냐?”
그는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카델이 내민 손을 움켜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에 카델은 루멘이 나름의 위로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막말로 내가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이미 일은 다 벌여 놨는데.”
“이왕 일을 벌였으니, 조금은 뻔뻔해져도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잖아. 결정에 괴로워하기보단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책임질지 고민하는 게 나아. 멋지게 증명하는 거. 대장은 그걸 제일 잘하니까.”
그는 위로가 어색한 남자였으나, 항상 카델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일깨워 주는 남자이기도 했다. 루멘은 쥐고 있던 카델의 손을 펼쳐 쪽지를 올려 주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는 카델의 눈빛을 오롯이 담아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증명해 봐. 가르엘 몬자시의 본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그 남자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것도, 카델 라이토스뿐이었다는 걸. 그럼 뻔뻔하게 굴기 쉬워지지 않겠어?”
부하들이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위로도, 응원도 받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랬음에도 카델은 루멘의 말에 큰 안정을 느꼈다. 죄책감을 덜어낼 수는 없더라도, 마냥 그 감정에 짓눌려 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루멘의 말처럼, 증명해야 했다. 이것이 그저 최악의 선택만은 아니었음을. 그러기 위해서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했다.
새롭게 의지를 다잡은 카델이 손안에 들린 쪽지를 펼쳐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