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521)

*

“카델한테 가야겠어.”

비장한 표정을 한 라이돈이 문으로 걸어가자, 앞을 막고 있던 반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단장 눈 밖에 난 놈이 찾아가서 뭘 어쩔 건데? 제 발로 기사단을 나갈 생각이라면 난 찬성이다. 응원해 주지.”

그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했던 반도 그렇게까지 화가 난 카델은 처음 보았다.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란 데에서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꼈던지. 하여간 라이돈 녀석, 언젠가는 크게 사고 칠 줄 알았다.

라이돈은 반의 빈정거림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하하호호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장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얘기가 덜 끝난 것 같은데. 진짜 내쫓기기 전에 가만히 있는 걸 추천하마.”

“……루멘, 어떤 식으로 사과해야 카델이 용서해 줄까? 인간은 뭘 해 주면 기뻐해?”

이곳에 감정 표현에 가장 서툰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루멘일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화가 풀릴 때까지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봐. 먼저 말 걸어 주기 전까진 묵묵하게 맡은 일을 하는 거지.”

“말도 안 돼! 그러다 답답해서 죽어 버리면 어떡해?”

“대장은 기뻐할지도.”

루멘의 심드렁한 태도에 라이돈이 짜증스레 그를 흘겼다. 반도 루멘도 자신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이돈은, 처음의 계획을 재개하기로 했다.

“비켜, 반. 나갈 거야.”

“미안하지만 난 단장한테 혼나기 싫어서. 나갈 거면 창문으로 은밀하게 나가. 어쩔 수 없이 놓쳤다고 변명이라도……. 아오, 이 미친 새끼!”

말을 잇던 반이 문에 기댄 등에서부터 끼쳐 오는 한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마법을 시전한 건지, 뒤돌아보니 문짝이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빠르게 몸을 떼어 내자, 라이돈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부수며 바깥으로 넘어갔다.

그는 우렁찬 반의 욕설을 무시한 채 카델을 찾아 나섰다. 아직 운명의 반지는 제 손안에 있으니, 실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카델.”

답지 않게 잔뜩 기죽은 음성이었다. 카델은 골목 입구에 선 라이돈을 발견하곤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카델은 곤란해 보이는 가르엘의 손목을 잡아끌어 라이돈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라이돈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책임지고 가르엘 경을 원래 있던 장소로 데려다 놔. 환혹술도 다시 제대로 걸고.”

“카델, 나는—”

“듣고 싶지 않아, 라이돈. 아직 화가 덜 풀렸거든.”

카델은 스스럼없이 라이돈의 말을 끊어 냈다. 당혹감과 서러움 섞인 눈빛이 드러났으나,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는 라이돈의 행동에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당장 그의 잘잘못을 짚어 다그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에선 괜한 것까지 트집을 잡게 될 테다. 그런 식의 화풀이를 하고 싶진 않았다. 대화를 한다면, 그건 냉정함을 되찾은 이후였다.

반면 라이돈은 대화조차 거부하는 카델의 모습이 퍽 충격적인 듯했다. 그는 카델이 자신을 가르엘과 남겨 두고 떠나 버릴 때까지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애교를 부리지도, 뻔뻔하게 들러붙지도 못했다.

뜬금없이 라이돈에게 맡겨지게 된 가르엘만이 그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음, 서로 간 죗값은 톡톡히 받은 것 같은데요. 더 안 좋은 일 당하기 전에 돌아갑시다, 라이돈 경.”

라이돈은 한참을 서서 아무것도 없는 바닥만 내려다보다, 이내 어두운 낯으로 걸음을 돌렸다. 가르엘이 틈틈이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그의 귀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진즉 떠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들렌은 아직도 가르엘과 카델이 떠난 객실 안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떠날 힘이 남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부하들에게로 돌아가려던 카델은 그런 모들렌의 모습을 발견하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모들렌은 카델을 보고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화라도 냈다면 기꺼이 받아 줬을 텐데. 끝까지 원망의 말을 꺼내지 않는 그였기에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미안합니다. 모두를 속이게 돼서.”

카델이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네자, 모들렌은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우울과 허무에 젖은 상처받은 시선이 고개 숙인 카델의 머리를 향했다.

“그 사람의 뜻이었겠죠. 도망가고 싶다고 매달렸을 테니, 카델 경이야말로 곤란했을 겁니다. 사과는 필요 없어요.”

“저도 순수하게 도움만을 주기 위해 행동한 건 아니에요. 앞으로 가르엘 경은 적린 기사단의 단원으로서 행동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어이가 없을 법도 하건만. 모들렌은 헛웃음이나 조롱 대신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초연하게 굴었다.

“그 사람의 정체를 숨기느라 애 좀 먹겠네요.”

“…….”

“상관없습니다, 이젠. 제겐 죽은 사람이니까요. 어디에서 뭘 하든, 못 본 척해야죠.”

힘없이 눈가를 문지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가 보겠습니다. 장례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예요. 그 사람에 대한 비밀을 누설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델은 방을 벗어나는 모들렌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자신이 없었대도 가르엘은 언젠가 황혼 기사단을 떠났겠지만, 자신이 그 시기를 한참 앞당겨 큰 시련을 안겨 준 것 같아서. 그가 안타까웠고, 또한 씁쓸했다.

“모들렌 경.”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모들렌이 걸음을 멈췄다. 카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지금껏 경이 봐 왔던 가르엘 몬자시의 모습은, 연기가 아닌 진짜였을 겁니다. 그것만큼은…… 믿어 주세요.”

자신에게는 진실을 알릴 권리도,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상처받은 모들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고 싶었기에, 무리해서라도 가르엘의 진심을 전했다.

대답 없이 멈춰 있던 모들렌은 이내 완전히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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