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2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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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과 루멘에게 일이 해결됐음을 알린 뒤, 카델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항구와 인접한 바닷가였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멍하니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사건을 겪어서인지, 한바탕 고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은 매번 카델의 마음 한 쪽에 짙은 자국을 담겼다.

스토리의 끝을 향하며 동료들과 만나는 동안, 카델이 선택한 그들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귀족을 혐오하던 반은 귀족들의 틈에서 일하게 되었고, 가문의 복수를 꿈꾸던 루멘은 가문에서의 모든 입지를 포기했다. 요정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할 라이돈은 요정을 핍박하던 인간의 편에서 싸우게 되었고, 죽음으로써 소중한 이를 지키려던 가르엘은 살아남아 그들이 받을 상처를 지켜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카델은 그 모든 변화를 도저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있으니 그들은 행복하리라는 결론을, 실수로라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들에게 있어 지독한 불행이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이미 많이 아끼고 있었다. 부하들을 향한 카델의 감정에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분명 애정도 존재했다. 그들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카델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내 원래 세계로.’

처음의 목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자꾸만 이 세계에 남을 동료들의 생각이 났다.

자신이 떠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평화를 되찾을까? 원래의 카델 라이토스가 돌아온다면, 그는 남은 부하들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해야 할 텐데. 전부 잊은 채 반과의 첫 만남만을 기억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다.

자신이 이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부하들을 스토리에 끌어들인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책임을 이곳에 남겨 두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을 멋대로 바꿔두고서, 홀로 원래의 자리로.

‘……새삼스럽게 최악이네.’

마음 편해지고 싶었다. 차라리 그들을 게임 속 캐릭터로만 여겼더라면. 마음을 주지 않고, 마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의무적으로 전투하며 철저히 원래의 삶을 바랐더라면.

어차피 이기적일 거면 끝도 없이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이런 애매한 쓰레기가 되기는 싫었다.

“하…….”

너무 정이 들어 버린 게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망설이게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거리를 둬 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그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한탄하며 모래사장 위에 드러누운 카델이 짜증스레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아직 빼 두지 않은 운명의 반지를 발견했다. 이어진 붉은 실은 잔잔하기만 했다.

‘꽤 충격받은 것 같던데.’

골목에서 마주쳤던 라이돈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였다면 얼굴을 무기 삼아 상황을 무마하려 들었을 텐데. 그런 녀석이 이번에는 답지 않게 남의 눈치를 살피며 용서를 구하려 했다. 자신은 그 용기를 무시한 채 거부했고.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화를 냈나 몰라.’

머리가 조금 식은 덕인지, 과거의 대처가 너무 야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한 왕자님 데려다 개고생을 시켜 놓고 있는데. 심지어 앞으로도 고생시킬 예정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길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허탈하게 웃은 카델이 반지를 살살 돌렸다. 이 실의 끝자락에서 의기소침해져 있을 라이돈을 떠올리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레 뻗쳐 온 누군가의 손이 카델의 손목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카델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라이돈…?”

“반지 빼지 마.”

예고 없는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건만. 카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서럽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 너 울어?”

“빼지 마, 카델. 나 버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애초에 반지를 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빙글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델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라이돈의 상태를 살피며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매번 해맑게 휘어져 있던 눈꼬리에 투명한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눈물을 닦아 주려 해도 라이돈은 붙잡은 손목을 놓아 주지 않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카델 말 잘 들을게. 응?”

“아니…….”

언제부터 자신을 따라온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반지 좀 만진 걸로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인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기어코 눈물을 줄줄 흘려보내는 라이돈의 모습이 버림받은 아이 같아 보여 딱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190이 넘는 거구의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누가 누굴 버린다는 거야? 내가 언제 너 버린댔어? 화났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쟀지. 대체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야?”

“나가라며. 내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며.”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이렇게나 서럽게 우는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 사랑스러운 외모가 아니었다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라이돈은 울음 때문에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꾸역꾸역 억울함을 토로했다.

“영영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었잖아.”

“그건 그냥 화가 났으니까—”

“난 카델이 없으면 안 되는데, 카델은 내가 없어도 되잖아. 날 버릴 수 있는 거잖아, 카델은.”

“……뭐?”

“버리지 마. 나 두고 가면 안 돼. 미안해…….”

라이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였다. 그런 그의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카델은 그대로 말문을 잃었다.

라이돈이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을 리는 없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 없던 문제니까. 요정이 독심술 능력을 갖췄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었다. 그러니 그는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뿐일 테다. 그런데도 카델은 그 서러운 진심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되었다.

급격히 숨이 가빠져 왔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이름 모를 감정이 훅 치솟았다. 충동에 가까운 묵직한 것이 마구잡이로 가슴을 두들겼다. 몸을 조종하던 실이 뚝 끊어져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카델은 잡혀 있던 손목을 우악스럽게 비틀어 빼내고는, 웅크린 라이돈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아니야. 누가 그래. 누가 널 버린대.”

“난 카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했잖아…….”

“안 버려. 너 두고 안 가. 내가 어떻게…….”

떠날 수가 없었다. 거리를 둘 수도 없었고, 정을 뗄 수도 없었다. 이미 그른 것이다.

카델은 괴롭게 미어지는 고통을 참듯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라이돈. 안 떠날게. 안 버릴게.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제 품에 안긴 커다란 남자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이젠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 또한 라이돈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없으면 안 됐다. 더 이상 그들이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내 부정해 왔지만, 결국엔.

끝이 없는 세계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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