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의 범위 밖으로 도망쳤으나, 산 전체를 울리는 적룡의 포효와 극심한 땅울림은 잦아들 줄을 몰랐다.
카델은 헉헉거리며 두 부하를 따라가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텨 섰다. 그에 카델의 손목을 잡고 있던 반이 주춤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업어 줄게요, 단장. 업혀요.”
“힘들어서 멈춘 거 아니야. 그보다는…….”
꽤 먼 거리를 도망쳐 오는 동안에도 적룡이 뒤따라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라이돈과 루멘이 아직도 적룡을 상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당히 상대하다 도망치는 것이 최선일 텐데도, 이쪽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반은 그런 카델의 걱정을 알면서도 단호한 얼굴로 다시 손목을 잡아당겼다.
“놈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단장은 절대 안 보내요. 이번만큼은 양보 못 한다고요.”
“상대는 용이야. 적룡이라고, 반. 날 원한다고는 했지만 내 목숨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인간의 말을 할 줄도 알았고,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단장을 원한다는 건 단장의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얘기랑 똑같으니까.”
일단 부하들을 따라오긴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델은 불안해져 갔다. 괜한 짓을 하느라 부하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델은 버텼고, 반은 잡아당겼다. 반의 힘이라면 지금 당장 카델을 둘러업고 달려가도 무리가 없을 테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이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실랑이에, 둘을 지켜보던 가르엘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돌아가 보죠.”
“뭐?”
“제 마기라면 설령 적룡과 전투를 하더라도 허망하게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걸 위해 절 기사단에 끌어들인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래 봬도 이곳에 오기 전까진 유능한 기사단을 이끌던 단장이었습니다. 한 명의 동료도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죠. 반지를 주세요, 단장님. 안전하다는 판단이 선다면 찾아가겠습니다.”
가르엘의 치유 능력이라면 확실히 걱정은 덜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진해서 적룡을 찾아가는 것이 베스트였으나, 이곳에서 부하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결국 카델은 가르엘에게 ‘운명의 반지’를 넘겨주었다.
“절대 무리하지 마. 이쪽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하고.”
“물론이죠, 단장님.”
여유롭게 미소 지은 가르엘이 반지를 끼우며 등을 돌리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카델의 망설임을 참지 못한 반이 그의 오금과 허리를 감싸 번쩍 들어 올렸다. 경악한 카델이 내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
숨만 붙어 있으면 살릴 수 있다, 고 직접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이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꾸역꾸역 싸우라는 뜻은 아니었다.
폭포 근처로 돌아간 가르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루멘 경! 라이돈 경!”
결코 거스를 수 없을 것 같던 대자연이 흩뿌려지는 브레스와 눈보라를 따라 얼어붙고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우렁차던 폭포수도, 강의 물살도 마찬가지였다.
가르엘은 시야 확보가 어려울 만큼 심한 눈보라에 눈살을 찌푸리며 두 동료를 찾아 나섰다. 희뿌연 시야 사이사이로 푸른 섬광과 불꽃, 얼음 파편이 스쳐 지났다. 난자하는 공격을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르엘의 몸에선 상처를 자연 치유하는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대답 좀 해 보십쇼! 보여야 도울 것 아닙니까!”
답답함에 목청을 높이자, 가까운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뭐야. 너 왜 여깄어? 카델은?”
라이돈이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참상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살아 있는 거 맞죠?”
“흐응, 그럼 시체가 말을 하겠어? 멍청해라.”
그 짧은 시간 동안 라이돈은 마력 고갈 상태에 진입한 듯했다. 시뻘게진 눈자위로 가르엘을 바라보던 라이돈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코피가 거슬린다는 듯 벅벅 문질러 닦았다.
“단장님은 반 경과 도망가고 있습니다. 전 여러분을 도우러 왔고요.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요.”
“그 마기로 내 몸을 더듬으면 죽여 버릴 거야.”
“뭐, 어차피 라이돈 경에게는 제 마기가 잘 듣지도 않으니까요. 빛 마법을 꺼내 드릴까요?”
가르엘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영창하는 라이돈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마기를 최대한 배제한 채 그의 내상을 치유하는 동안, 적룡의 음성이 또 한 번 머리를 울렸다.
[돌아오거라, 인간이여. 네가 이 산에 머무르는 한, 나는 언제라도 너를 찾아낼 수 있다.]
카델에게 전하는 말인 듯했다. 대체 왜 적룡은 카델을 원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집착에 궁금증이 일었으나, 질문의 기회는 없었다.
긴 영창을 읊조리며 가르엘의 치유를 받던 라이돈이 짜증스레 몸을 뒤틀었다.
“이제 됐어.”
“그 상태로 계속 싸울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죠. 죽습니다.”
단호히 말하자 라이돈의 무심한 눈길이 닿았다. 그는 가르엘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너무도 담백한 어투로 대답했다.
“알아.”
그러고는 막아 볼 새도 없이 눈보라 사이로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죽을 걸 알면서도 싸운다는 걸까, 죽을 생각 없으니 신경 끄라는 걸까. 뭐가 됐든 지금껏 자신이 만나 왔던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독보적인 성격이었기에, 가르엘은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은 루멘 경인가.’
비행이 자유로운 라이돈마저 저 지경이 됐으니, 브레스 속에서 근접 공격을 해야 하는 루멘의 상태는 더욱 나쁠 것이었다.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간간이 시야를 가로지르는 푸른 섬광만이 그의 생존을 알리는 전부였다.
이대로 루멘을 놓칠까 우려했으나, 다행인지 아닌지 그는 가르엘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짙은 피 냄새를 풍겼다. 냄새를 따라 걷자 얼마 가지 않아 루멘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대장은요.”
“라이돈 경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그런 상태라면 제 등장부터 반겨야 하는 게 아닐까요?”
“굳이 부정하진 않죠.”
루멘은 검을 바닥에 처박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작게 인상을 쓰며 입 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 냈다. 브레스에 그을린 망토는 절반 이상이 타들어 갔고, 흰 제복 곳곳에 상처에서 흐른 피가 묻어 나왔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던 가르엘이 허리를 굵직하게 파고든 깊은 상처를 발견하곤 미간을 모았다.
“살아 있음에 경의를 표하죠.”
“용의 발톱에 살짝 스친 정도라면 믿겠습니까.”
가르엘은 곧장 상처 위로 마기를 흘려보내며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오지 않았다면 죽었을 겁니다.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라이돈 경을 챙겨 후퇴하죠. 이 만큼 시간을 끌었으면 충분합니다.”
“대장이 완벽하게 몸을 숨기기 전까진 못 갑니다.”
“이 산에 있는 한 완벽하게 몸을 숨기는 건 불가능해요. 방금 적룡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저희도 같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룡이 잠잠해졌을 때쯤 합류해서 하산하는 게 나아요. 이쯤이면 단장님도 슬슬 적룡의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루멘의 시선이 상공의 어딘가를 향했다. 짧은 침묵을 지키던 그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요정을 빼낼 방법이 마땅치 않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