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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의 숨결 한 방에 두껍던 얼음 장막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라이돈은 날아드는 발톱을 피해 몸을 물리며 높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적룡의 눈앞까지 날아든 라이돈이 곧장 마력을 끌어 올리자, 적룡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용이랑 싸우는 것도 꽤 재밌네!”
피를 철철 흘리며 하기에 적당한 말은 아니었으나, 라이돈은 진심으로 이 전투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실력이 동등하다거나, 막상막하의 싸움이라서가 아니다.
적룡은 그의 무력을 한참 상회했다. 웃돈다기보단 압도하고 있다고 봐야 옳았다. 자신이 적룡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있어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재밌는 것이다.
점점 고양되는 기분은 마력 고갈로 인한 통증마저 지워 냈다. 그는 희번득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방을 뒤덮고 있던 눈보라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게 대기를 베어 내던 눈송이는, 둥실 떠올라 라이돈의 뒤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심한 냉기를 동반했고, 모일수록 새하얗게 빛이 났다. 퍼져 있던 눈발은 곧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되어 라이돈의 뒤에 자리 잡았다.
마법진이 완성되었음을 감지한 라이돈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가의 피를 훔쳐 내며 미소 지었다.
“어떤 용이 더 강한가 시험해 보자.”
[빙룡술].
라이돈의 마법진에서부터 날카로운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짐승의 비명 같은 소름 끼치는 울림과 함께, 얼음으로 조각된 거대한 앞발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발톱과 촘촘한 비늘은 적룡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순, 적룡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언뜻 용의 앞에서 용을 소환해 내는, 도발에 가까운 라이돈의 마법에 반응하는 듯 보였으나. 이어지는 음성은 전혀 다른 내용을 품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힘이라고 생각했더니. 헤소니아의 후계자였나.]
“…누가 누구 후계자라는 거야. 짜증 나는 소릴 하네.”
[헤소니아의 권능을 얻었으나, 그 대가는 모르는 모양이군.]
적룡은 마치 비웃는 것처럼 낮은 울림소리를 내며, 느긋하게 날개를 펄럭였다.
[추락하거라, 요정이여. 더 이상 네게 볼일은 없다.]
적룡이 어떻게 헤소니아를 아는 것인지, 헤소니아의 권능에 따른 대가란 무엇인지. 정확한 설명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라이돈은 어렴풋이 그것들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룡의 발언과 동시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적룡의 음성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산속에 있는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때문에 카델은 헤소니아의 권능을 얻은 라이돈에게 어떠한 대가가 따르는지, 추락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내려 줘, 반! 라이돈이 위험하다고!”
라이돈에게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은 확실했다. 가르엘을 보냈다고는 해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아무리 가르엘이래도 즉사한 자를 부활시킬 수는 없으니까.
카델은 자신을 안고 달리는 반의 어깨를 밀쳐 내며 어떻게든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반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집스럽게 카델의 요구를 무시했다.
“돌아가면 안 돼요.”
“반!”
“안 된다고요!”
처음으로 목청을 높인 반이 몸을 세웠다. 그러고는 놀란 카델의 얼굴에 대고 경고하듯 말했다.
“못 보내요. 단장이 위험에 빠지는 거,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요. 자꾸만 내가 지켜 줄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도 화가 나는데……. 지킬 수 있는데도 손 놓고 있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
남자 하나를 안고서 내리 달려온 탓에 반의 호흡은 거칠었다. 카델은 얼빠진 표정으로 반의 일그러진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반이 처음으로 제 명령에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했다는 것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그가 단장의 위기를 지긋지긋한 고통이라 여긴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심지어 그것을 내내 본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는 점이, 카델에겐 심히 충격적이었다.
반은 말문을 잃은 카델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화낸 거 아니에요, 단장.”
“너—”
되짚고 싶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카델은 상황의 급박함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반에게 해명을 시도하려던 찰나.
[여기 있었군.]
적룡의 음성이 다시금 머릿속을 울리며, 대지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늘을 올려다본 반이 낭패라는 얼굴로 뜀박질을 재개했으나, 소용없었다. 적룡의 날갯짓이 숲 전체를 아우르는 삭풍을 생성한 것이다. 그야말로 살이 에이는 듯한 삭풍을 앞에 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근처의 나무를 붙든 채 버티는 것뿐이었다.
“젠장…!”
반은 한쪽 팔로는 카델을, 나머지 한쪽 팔로는 나무를 감싸 안았다. 그러는 동안 적룡은 우아하고도 여유롭게 하강하여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델은 매서운 바람에 저항하면서도 몰아치는 끔찍한 상상에 진저리를 쳤다.
‘적룡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설마…….’
순식간에 루멘과 라이돈, 가르엘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적룡이 그들을 따돌렸거나, 가르엘의 판단하에 후퇴했다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카델은 자신의 허리를 감싼 반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적룡이 완전히 착지하자 숲을 통째로 베어 낼 듯 매섭던 삭풍 또한 금세 잠잠해졌다.
적룡의 시선은 오로지 카델만을 향했다. 그는 카델을 억지로 빼앗아 가거나 협박하지는 않았으나, 그저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심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도망가세요, 단장. 여긴 제가 맡을게요.”
반은 카델을 뒤로 밀어 내며 앞으로 나섰다. 대검을 빼 든 그의 눈빛에는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라도 베어 내고 말겠다는 강한 집념이 깃들어 있었다. 카델은 반에게 밀려나면서도 적룡에게 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망가세요. 어서요.”
카델이 움직이지 않자 반이 조급한 목소리를 냈다. 견고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단장.”
간절한 부름에도 카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반의 뒤편이 아닌 옆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반의 등 뒤에서 벗어난 카델이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뜻하는 바가 명료한 행동에 기어코 반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안 돼요. 뒤로 가요.”
“난 괜찮을 거야, 반.”
“단장!”
“나머지 단원들을 찾아. 꼭 돌아갈게.”
아무리 목청 높여 저지해도 소용없었다. 반의 눈을 응시한 채 조금씩 물러서던 카델은, 그가 아닌 적룡에게로 몸을 던졌다. 적룡은 카델이 자신의 발등에 올라타자마자 곧장 날개를 펼쳐 몸을 띄웠다.
다급히 달려 나가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없다. 눈을 뜨기도 힘들 만큼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오르는 적룡을 앞에 두고, 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할, 카델! 돌아오란 말이야!”
그는 광풍처럼 몰아치는 허망함과 분노를 버티지 못한 채 대검을 내던졌다. 카델의 이름을 불러 젖히는 날 선 목소리가 숲을 헤집었으나,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