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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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룡과의 일화를 궁금해하는 부하들에게, 카델은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를 대충 둘러댔다. 그의 이름이 쿤라인 것과 인간형의 모습을 보았다는 별것 아닌 사실은 그대로 전달했고, 두 개의 영혼이 담긴 육체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쿤라가 다속성 마법사이면서 요정 왕 헤소니아와 연이 있는 인간을 흥미롭게 여겼다는 정도의 거짓말을 꾸며 냈다.

그로 인한 죄책감보다는 부하들을 향한 어색함이 더욱 컸다. 지금까지 자신의 것이라고만 믿었던 감정에 타인의 의지가 섞였다는 사실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었다. 여태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이, 한순간에 시시한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하들을 자신의 여정을 도울 일꾼쯤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끔찍했으나, 끔찍하다는 생각 역시 순진한 카델 라이토스가 지극히 계산적인 신여환의 사고에 영향을 끼친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몸을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군.’

카델은 자신이 매분 매초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나 원했던 단원들과의 유대가 조금씩 두려워지고 있었다.

“오늘 보초는 나부터 설게. 다들 나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자 둬.”

초저녁부터 쿤라에게 시달리느라 야영 장소를 찾았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카델은 가볍게 배를 채운 부하들을 둘러보며 보초를 설 준비를 했다. 다들 그럴 필요 없다며 카델을 만류했으나, 그의 고집을 이기지는 못했다.

“무리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몇 시간 덜 자는 걸로 이렇게 걱정받는 것도 자존심 상한다.”

“하지만 자기, 그 체력에 잠까지 못 자면 그냥 쓰러지는 거 아니야?”

“다음 차례는 너야, 라이돈. 어제 네가 안 일어나서 루멘이 밤을 새웠다며.”

“그야, 난 가련한 요정이잖아.”

“네 덩치를 보고 말해.”

카델은 호쾌하게 웃어 대는 라이돈과 짜증스레 눈을 흘기는 루멘을 번갈아 보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카델의 강경한 태도에 부하들도 하나둘씩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딱딱한 바닥에 밤바람도 서늘했으나, 적룡과의 조우는 그들로서도 제법 피로한 사건이었다. 금세 조용해진 사위에 카델은 모닥불을 들쑤시던 나뭇가지를 내려놓으며 뺨을 문질렀다.

가슴이 갑갑해 크게 숨을 들이켰지만, 무언가 얹힌 것 같은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 세계에 남고 싶잖나.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고. 난 네 욕심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명분을 제공해 줬을 뿐이야. 네가 뭘 선택해도 그 영혼은 죽지만, 남지 않으면 그 인간의 육체까지 죽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해.”

‘……명분.’

어쩌면 그랬을지 몰랐다. 만약 카델 라이토스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자신은 그 명분에 기대어 어쩔 수 없는 척, 뻔뻔하게 그의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난 카델이 없으면 안 되는데, 카델은 내가 없어도 되잖아. 날 버릴 수 있는 거잖아, 카델은.”

부하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남겨 둔 채 원래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정말 그게 자신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이 아니라면, 나는…….’

이 모든 애정이 카델 라이토스의 것일 뿐이라서, 죽은 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신은 더 이상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곳에 남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고, 원래 세계를 그리워하고, 결국엔 거짓된 선택의 원인인 그들을 원망하게 된다면.

자신을 위해 보통의 삶을 포기한 이 맹목적인 녀석들을, 원망이라도 해 버린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감정 하나도 확신할 수 없는 스스로의 작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제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면 판단을 내리기도 편했을 텐데. 그렇게 여기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다, 곤히 잠든 부하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안정감을 주었던 그들의 모습이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렵게 느껴졌다.

절로 격해지는 호흡을 꾹꾹 눌러 참던 카델이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종국엔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곁에서 멀어졌다. 다리에는 점점 속력이 붙었고, 그는 진심으로 도망치듯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바뀌지 않는 풍경이 악몽처럼 숨통을 옥죄었다. 영원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계시 같기도 했다.

그러다 툭, 돌부리에 걸린 몸이 기울어지고. 앞으로 쏠린 중심에 반사적으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어딜 가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손아귀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 늦은 시간에 보초도 팽개치고……. 적룡이라도 보러 가는 건가? 대장.”

루멘이었다. 그는 자신이 잡아 놓고도 갑작스레 잡힌 카델만큼이나 당혹스러워 보였다. 급히 달려온 것인지, 언제나 단정했던 모습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한동안 두 남자 사이에는 거친 숨소리만 맴돌았다. 카델은 답을 구하는 루멘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난… 왜 도망친 거지…?’

그저 느닷없이 몸집을 불린 파도처럼, 막연한 두려움이 덮쳐 왔다. 무언가를 피해 달아났으나, 정확히 무엇을 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곤히 잠든 단원들의 모습이 자신을 가둔 철장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면, 루멘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카델이 대답하지 않자 루멘은 쥐고 있던 팔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적룡한테 다녀온 뒤로 내내 얼빠진 것처럼 굴고 있잖아. 우리한테 해 준 얘기 말고도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거라면 말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고.”

그렇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루멘은 전부 눈치챈 모양이었다. 카델은 눈길을 피하며 대답을 회피하려 했으나, 루멘이 그의 턱 끝을 들어 기어코 시선을 맞췄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피할 틈도 없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료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 셈이야. 응?”

루멘은 반쯤은 독촉하고, 반쯤은 달래 가며 카델의 입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눈에 비친 카델은 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사람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카델의 불안정한 모습은 몇 차례 본 적이 있으나, 지금만큼 아슬아슬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루멘은 불안했고, 조급했다. 자신의 대장이 어느 순간 환영처럼 증발해 버릴 것 같아서.

카델은 불안해하는 루멘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듯 쓸어 올렸다. 너무나 지쳐서 서 있을 여력조차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맥없는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사랑하고 싶어.”

그리 말하는 카델에게선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의 절절함이나 수줍음이 엿보이진 않았다. 그저 건조한 삶의 마지막 유언처럼 툭 던지듯 말할 뿐이었다.

루멘이 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카델은 조금씩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내려 루멘의 뺨을 매만졌다.

“사랑하고 싶어. 널 위해서라면 세계라도 버릴 수 있을 만큼. 내 삶이 네 존재로 충분할 만큼. 어떤 의심도 없이, 사랑을 확신하고 싶어.”

점점 떨리는 카델의 목소리를 따라 루멘 역시 자신 안의 무언가가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 같기도 했고, 억울함 같기도 했고, 지독한 사랑 같기도 했다.

그는 가만히 카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이미 하고 있잖아. 날 사랑하고 있잖아, 넌.”

그에 카델이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거둬진 온기를 붙잡듯 손을 뻗었으나, 카델의 허탈한 웃음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런 것 같아?”

“내가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매달릴 만큼 궁해 보여?”

카델의 기진맥진한 시선이 루멘의 얼굴을 훑었다. 예나 지금이나, 못난 곳 하나 없이 잘난 얼굴. 한결같이 자신감 넘치는 고고한 눈빛. 거짓말로 무언가를 꾸며 낼 이유가 하등 없어 보이는 그였기에, 무엇을 말하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자, 잠시 멈췄던 루멘의 손이 카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무슨 소리를 듣고 왔든, 적어도…… 대장을 의심하지는 마.”

그는 반항 없이 제 품에 안긴 카델의 머리 위에 입술을 묻은 채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거든.”

거짓도, 의심도 없는 투명한 마음이었다. 카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늘어져 있던 팔을 루멘의 허리에 감고 꽉 끌어안았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그의 어떤 면을 사랑하냐고. 집요하게 묻고 따져서 그가 마음을 준 남자가 카델 라이토스인지 신여환인지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어떤 대답을 듣든 결국엔 부정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카델은 캐묻는 대신 그의 진심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의 감정은 가짜일지 몰라도, 동료들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감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했고, 순수했다. 그것마저 의심할 순 없었다.

그게 카델에게, 신여환에게 남은 전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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