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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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산행은 처음보다도 혹독한 면이 있었다. 험한 지형이나 뜨거운 볕도 한몫을 했지만, 거의 휴식을 취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단원들에게도 힘겨울 정도의 강행군을 카델이 제대로 버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버텼다. 스스로를 혹사하듯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몸이 힘들어야 생각을 덜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본능적으로 이 이상 자신의 내면에 파고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답은 나오지 않고 의욕만 떨어졌다.

어쨌든 그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이대로 멈춰 설 것이 아닌 이상, 방해되는 장해물은 최대한 배제해야 했다.

“단장, 물이라도 마시는 게…….”

“괜찮아.”

카델의 옆에서 물통을 내밀던 반이 단호한 거절에 멈칫했다. 그의 싸늘한 옆모습은 누군가를 상대할 여유가 없어 보였기에, 반은 얌전히 내밀었던 물통을 거둬 갔다.

적룡과의 대화 이후, 카델은 어딘지 날이 선 태도를 보였다. 다른 단원들에게 보이는 딱딱한 반응을 제외해도 그랬다. 둔해 빠진 바보가 아닌 이상, 반은 카델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가지 짐작 가는 이유는 있었다. 적룡에게서 카델을 대피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굴었고, 언성을 높였다. 그로 인해 실망했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행동에 대해 사과하려 할 때마다, 슬쩍 운을 뗄 때마다. 카델은 그를 성가신 남을 대하듯 서먹하게 굴었다.

자신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카델의 냉랭한 태도에, 반은 그야말로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를 평소처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에게 있어 카델의 무관심과 저를 향한 미움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었으니.

‘……미치겠네.’

그런 반의 우울은 카델에게도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카델은 자신이 반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 애처로운 감정이 카델 라이토스의 것이래도 지금은 반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상기했으나, 그럼에도 전부 타들어 간 불씨처럼 마음이 차게 식었다.

반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내면의 카델 라이토스를 부정하고자 하는 자신의 볼품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상처 주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기어코 고집을 부리다니.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영혼의 의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못난 놈. 몇 번이고 스스로의 행태를 비난하던 카델이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휙 돌아선 그가 함께 멈춰 선 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마셔야겠어. 목마르네.”

“……여기요.”

카델은 반이 건넨 물통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렇게 잔뜩 마시면 몸이 무거워 움직임이 둔해질 테지만, 미안한 만큼 생각 없이 들이켰다.

금세 물을 비운 카델이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물통을 돌려주었다. 내민 물통을 멀뚱히 들여다보던 반이 느린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듯 깜빡이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게 잔뜩 기죽어 보여서, 카델은 한층 더 깊어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왜 이런 단순한 행동까지 일일이 계산하고 실행해야 하는지. 갑갑한 분노를 느꼈다.

그랬기에 그는 그대로 돌아서는 대신,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맙다.”

그 짧은 한마디에 반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설핏 입꼬리를 끌어당긴 반이 어색하게 눈을 돌린 카델을 향해 답했다.

“뭘요. 또 목마르면 얘기하세요.”

한동안은 목이 마를 것 같지도, 다시 반에게 부탁할 일도 없을 것 같지만. 카델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산행을 이어 갔다.

베릴 산의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데엔 정확히 사흘이 걸렸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했음에도 그랬다.

그동안 쿤라는 비늘 하나 비치지 않았는데, 카델은 마지막까지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적룡이 인간의 기사가 되어 봤자 얻는 이득이 뭐가 있겠는가. 불명예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움직일 만큼 적룡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그런 기대로 카델은 둥켈하이 왕국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고려해 보겠다’던 그의 변덕이 변덕으로 끝나기를 바라며.

하지만 베릴 산에서의 마지막 밤. 쿤라는 기어이 카델을 찾아왔다.

그때와 똑같은 호숫가였다. 카델은 자신이 쿤라의 힘을 통해 꿈을 꾸고 있음을 인지했다. 어디 떨어지기라도 하면 깰 수 있지 않을까. 호수에 몸을 던질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보다 쿤라의 행동이 빨랐다.

“그리 대놓고 싫어하다니. 기가 차는군.”

카델은 시선을 내리깐 채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쿤라의 맨발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큼직한 발등에는 진짜 사람 같은 섬세한 핏줄이 돋아 있었다.

“……벌써 고려가 끝난 모양이네요.”

“더 길게 고민하기를 바란 모양이지?”

“아무래도 결정은 신중해야 하니까.”

“몰래 도망칠 생각을 한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카델 라이토스의 영혼은 그걸 바라는 것 같지만, 전 아닙니다.”

께름칙함을 숨길 노력도 않는 카델의 솔직한 태도에 쿤라가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호방한 웃음소리를 따라 마뜩잖게 고개를 들자, 쿤라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 몸을 그저 성질 더러운 용 정도로 알고 있지. 제집을 건드는 녀석은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아닙니까?”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하자 쿤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카델도 쿤라가 그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죽이는 용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의심하는 척을 하는 건, 조금이라도 쿤라의 호감을 깎아 그와의 동행을 무효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라는 삐딱한 카델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기다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카델이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전부 안다는 것처럼.

“아니다. 오히려 이 몸은 평화를 원하지. 그것이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기에, 죄 없는 것들을 위한 작은 요새를 마련했을 뿐이야.”

“……요새?”

“이 거대한 산맥은 짐승과 정령, 꽃과 나비를 위한 요새다. 인간도 마족도 이곳을 점령할 순 없지. 두 번째 전쟁이 발발해 인간계가 쑥대밭이 된다 한들, 이곳만큼은 건재할 거다.”

쿤라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주저앉아 카델에게 손짓했다. 함께 앉자는 의미였다. 카델이 한숨과 함께 몸을 숙이자, 쿤라가 말을 이었다.

“최후의 보루인 셈이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세계가 쑥대밭이 되는 꼴을 두고 보고 싶지는 않다. 수를 쓸 생각이야. 첫 마계 전쟁 당시, 능력 있는 자들에게 이 몸의 힘을 나누어 줬던 것처럼.”

“……세븐 나이츠를 말하는 겁니까?”

“밖에서는 그렇게 불리나? 웃기는 이름이군.”

진심으로 그들의 호칭이 우습다는 듯 실소를 뱉는 쿤라를 바라보며, 카델은 자신에게도 질문할 거리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헤소니아에게도 당신의 힘을 나눠 준 건가요? 평화를 위해서라기엔 대가도 치렀던 것 같은데.”

“그놈은 내 힘을 빌려 가는 데서 그치지 않았어. 요정족 전체를 구속할 힘을 원했지. 자칫 한 종족을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는 권능이니, 허튼 생각 했다간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에서 가벼운 계약을 했을 뿐이다.”

“……헤소니아가 죽어도 그 계약은 유지되는 거고요?”

“모든 요정족의 봉인이 풀리기 전까진 그렇지. 그 귀여운 금발 요정이 네게 이르더냐?”

헤소니아는 여신 스텔라의 힘으로 대정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대신, 적룡 쿤라의 힘으로 요정의 자유를 박탈하는 계약을 맺은 듯했다. 제법 어둡고 복잡한 전말이었다.

한편 쿤라는 라이돈과의 만남이 제법 인상 깊었던 듯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델은 다른 이가 라이돈에게 ‘귀엽다’는 감상을 남기는 것이 어색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대충 당신이 과거에 어떤 식으로 마계 전쟁과 연관되었는지는 알겠네요.”

“넌 이 세계의 미래를 안다고 했지. 두 번째 마계 전쟁이 일어날 거고, 그곳에서 가장 크게 활약하는 것은 네 기사단이 될 거라고.”

쿤라에게 시스템과 이 세계의 정체를 설명해 주며,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시스템의 존재를 꿰뚫어 본 유일한 존재에게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카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쿤라도 그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 전쟁의 대비를 위해 요새를 강화하던 중이기도 했고. 하지만 네가 정말 다가올 전쟁에서의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면. 이 몸이 너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제 존재 때문에 마계 전쟁이 발발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제 활약을 위해 만들어진 전쟁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돕겠다고요?”

“이곳에서 널 죽인다고 멈출 전쟁도 아니야. 시스템이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확실하게 제한돼 있다.”

쿤라의 눈빛에선 만물을 관철하는 아득한 권능이 느껴졌다. 소름 끼치도록 또렷하고 깊은 눈빛. 그는 카델의 우울한 낯을 담아내며 단호히 말했다.

“네가 아무리 특별한 일을 겪었다 한들, 내게 있어 넌 거대한 운명에 휩쓸린 작은 인간일 뿐이다.”

“…….”

“스스로를 채찍질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넌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 같구나.”

“한 몸에 두 개의 영혼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평범할 수 있죠?”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이상했다. 터무니없이 무신경한 그의 반응에 눈을 흘겼으나, 쿤라는 시간을 확인하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볼 뿐이었다.

“네가 이 몸의 합류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제안을 하나 하지.”

다시 시선을 내린 쿤라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카델을 가리켰다.

“지금 네 영혼은 ‘카델 라이토스’란 인간의 영혼과 완벽하게 봉합된 상태다. 억지로 떼어 놓는다면 두 영혼 모두 죽어 버리겠지. 하지만 최소한의 접합부만 남겨 둔다면, 각 영혼을 독립된 상태와 흡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

“독립된 상태요…? 그 말은…….”

“네 내면에 섞인 ‘카델 라이토스’의 의지를 분리하겠다는 거다. 잠깐이라면 그 영혼을 잠재워 네 온전한 자아를 되찾을 수도 있어.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가능은 하다.”

“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겁니까?”

카델이 다급하게 물으며 몸을 기울였다. 쿤라는 훌쩍 다가온 카델의 이마를 가볍게 튕겨 내며 미간을 좁혔다.

“당장은 무리다. 하루 만에 처리했다간 네 영혼이 박살 날 수도 있고.”

“그럼…….”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은 네 몸에 내 기운을 섞어야 한다. 천천히 적응할 수 있도록 말이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 건데요…?”

마치 석방일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간절하기 짝이 없는 카델의 눈빛을 마주하며, 쿤라는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글쎄. 네가 말한 그 ‘스토리’가 끝나기 전까진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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