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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분리해 주겠다는 쿤라의 제안은 카델에게 있어 유일한 숨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스토리의 마지막을 보기 전까지 자신의 온전한 감정을 알 수만 있다면, 두 가지 삶을 선택할 때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고민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때문에 카델은 며칠간의 예민한 태도를 미약하게나마 누그러뜨린 채 부하들의 앞에 설 수 있었다.
둥켈하이 왕국을 코앞에 둔 그들은 갑작스런 단장의 중대 발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산을 빠져나가기 전에 너희에게 말해 둬야 할 게 있어. 여태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난 쿤라와 한 가지 계약을 맺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움을 받기로 했지.”
적룡의 도움. 나름대로 충격적인 발언이었으나, 뜻밖의 소식을 들은 부하들은 놀라움에 앞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적룡과의 대화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카델의 상태를 각자의 방식으로 걱정하는 중이었다. 무언가 일방적인 요구라도 당한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다시 적룡을 찾아가 대항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나름의 고민을 하던 그들이었기에, 카델의 발언에도 그 흔한 감탄사 한마디 튀어나오지 않았다.
유일한 반응의 주인은 카델도, 단원들도 아닌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쿤라였다. 인간형의 모습을 유지한 그는 굉장히 언짢은 표정으로 단원들을 둘러보다, 카델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삐딱하게 섰다.
“요즘 인간들은 이 몸의 위대함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이 몸의 도움을 받게 된 영광의 기쁨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나? 빠져 가지곤.”
쯧쯧, 혀를 차며 불쾌해하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라이돈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날개를 떨며 인상을 구겼다.
“카델한테서 떨어져, 도마뱀. 입도 벙긋하지 말고 저 멀리 날아가 버리라고.”
“흠, 착하게 구는 편이 신상에 좋을 텐데. 이 몸이 네게 산맥에 남으라고 말한다면, 넌 영영 이 인간과 떨어지게 될 텐데 말이야.”
쿤라가 짓궂게 웃어 대자 라이돈은 질색을 하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런 두 거구의 대화를 통해, 나머지 단원들은 저 남자의 정체가 적룡 쿤라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반과 루멘에게 그의 존재는 적룡보다는 납치범에 가까웠으므로, 여전히 경계 어린 태도를 지우지 않았으나. 가르엘은 비교적 우호적으로 나섰다.
“도움을 주시겠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죠?”
“……마족과 인간의 합작인가? 피가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하게 반씩 섞였군. 걸작이야.”
“칭찬 감사하군요.”
“뭐, 너희를 돕겠다 한들 이 몸이 산을 떠나는 건 아니다. 카델을 통해 힘을 조금 나누어 줄 뿐이지.”
쿤라가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기사단의 몸 위로 눈부신 붉은색의 기운이 맴돌았다. 기운은 곧 비늘의 형태를 띠었고, 그들의 전신을 한 겹, 한 겹 얄팍하게 뒤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것은 반투명한 비늘로 다듬어진 섬세한 갑주였다.
단원들은 물론 카델까지 단숨에 몸을 휘감은 기운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갑주의 형태를 했으나 몸에는 그 어떤 무게도 실리지 않았고, 시야도 확실하게 확보됐다. 일반적인 방어막보다 훨씬 뛰어난 효과를 보이리라는 건 굳이 검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쿤라는 놀라움 가득한 인간들의 면면을 보며 그제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런 식이다. 어디 가서 적룡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고 자랑해도 좋아. 그 정도는 봐주도록 하지.”
나이에 맞지 않게 한껏 으스대는 쿤라의 옆모습을 일별한 카델이 다시 제 몸을 감싼 갑주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히든 기사 ‘쿤라’의 의지가 흘러듭니다.]
[패시브 스킬 ‘쿤라의 가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패시브 스킬은 기사단 코스트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현재 기사단 코스트: 18/25]
지금껏 있는지도 몰랐던 패시브 스킬의 등장이었다. 아무래도 시스템은 쿤라의 힘을 빌리는 것만으로는 그를 영입했다고 판단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잘됐네.’
어차피 처음부터 쿤라가 아닌 다른 기사를 영입할 계획이었으니. 예상치 못한 사건과 상상도 못 한 진실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은 넝마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득은 이득이었다.
카델은 얕은 한숨과 함께 마지막으로 영입해야 할 기사, 요젠 바르딕타의 존재를 떠올렸다.
‘암살자의 나라’라는 흉흉한 타이틀과는 달리, 둥켈하이 왕국은 제법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햇살은 눈부셨으며, 들리는 큰 소리라고는 상인들의 호객 행위 정도였다. 이런 곳에 암살자가 등장한다면 되레 그 음침함이 눈에 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깄습니다! 몇 개 더 얹어 드렸어요. 제가 잘생긴 손님을 보면 손이 커져서 말입니다. 하핫!”
“아… 가,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십쇼!”
카델은 각종 과일이 터질 듯 담긴 종이 가방을 건네받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뒤를 돌자, 함께 있던 가르엘이 자연스럽게 종이 가방을 가져갔다.
“우리 단장님이 잘생기긴 했죠. 예쁘기도 하고.”
속삭이듯 말한 그가 떨떠름해진 카델의 표정을 보곤 작게 웃었다. 가르엘은 화이트 왕국에서 구매했던 검은색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카델 역시 귀걸이를 빼고 눈에 띄는 단복이 아닌 칙칙한 로브를 두른 상태였다.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래 머물 계획은 없지만, 스니벡 공국에서처럼 국경선 근처에서 하룻밤만 묵는 것도 아니었고, 도시 이곳저곳을 왕성하게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 중에 왕실 사람이라도 마주친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테다. 둥켈하이에 적린 기사단이 출현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온갖 이목이 쏠리게 될 테니. 카델은 둥켈하이의 국왕을 만나러 가기도 싫었을뿐더러,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면 요젠 바르딕타를 만날 기회도 적어질 것이었다.
‘내 위치가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무슨 소릴 들을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들의 진짜 목적지인 인테 설원은 스니벡 공국을 통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황제가 기사단의 현 위치를 알게 된다면, 어째서 그들이 적룡의 둥지까지 넘어가며 둥켈하이를 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솔직하게 단원 영입을 위해 갔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영입 성패가 불확실한 데다 일일이 변명하기도 귀찮았다.
“과일은 알아서 먹으라고 나눠 주고, 저희는 따로 오붓하게 데이트나 가 볼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으음, 전 그저 저희의 육체적 친밀도만큼 내적 친밀도도 높아지길 원했을 뿐인데요.”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가르엘의 여우 같은 표정에 카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쟨 진짜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는 거야?’
가르엘은 키스 한 번으로 상대방을 어디까지 가지고 놀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매번 곤혹스러운 농담을 해 댔다. 다른 단원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카델은 가르엘과의 입맞춤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으나, 슬슬 지독하게 후회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르엘은 카델의 붉어진 귓가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듯 입가를 매만졌다. 그의 입장에선 놀릴 때마다 번번이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카델이 귀엽기만 할 따름이었다. 유치하게 굴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유치한 행동을 하게 만드니. 그로서도 제법 억울한 부분이었다.
“뭐, 단장님이 저와의 육체적 친밀감만 원한대도 어쩔 수 없지만요. 전 무력한 일개 부하일 뿐이니, 원하시는 대로 끌려가야죠.”
“……두 번 다시 너랑 육체적 친밀감 같은 거 안 쌓을 거니까 그딴 걱정은 하지도 마.”
쏘듯이 말한 카델이 가르엘을 앞질러 걸음을 빨리했다. 가르엘은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미안해요, 단장님. 이제 안 놀릴 테니까 화 풀어요. 응?”
“가까이 오지 마! 육체적 거리를 유지하라고!”
“제게 마기로도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고 싶은 건가요? 생긴 거완 달리 잔인하시네.”
“개소리를 아주 숨 쉬듯이…….”
두 남자는 웃음소리와 짜증이 뒤섞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미리 잡아 둔 숙소로 향했다. 얘기해둔 대로, 나머지 단원들 모두 카델의 방에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