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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청이 떨어질 뻔한 한바탕의 소동이 지난 후, 백작은 심신의 안정을 위해 본인의 침실로 이동했다. 당연히 카델 역시 그와 동행해야 했다.
“어떻게 영면의 사자가 접근하는 걸 보지 못했을 수 있지? 내게는 등 뒤였다지만 자네에게는 맞은편이 아니었냔 말이야. 정말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던 게 맞나? 딴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고?”
백작은 침실 의자에 앉아 술을 퍼마시며 카델을 추궁했다. 금방이라도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파랗게 질린 사람에게 깜빡 졸았다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기에, 카델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 주었다.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백작님.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요. 영면의 사자 정도의 암살자이니, 맨눈으로 보기 힘든 은신술을 사용했을 겁니다.”
“코앞에 두고도 쫓을 수 없는 수준이라니…….”
술잔을 든 백작의 손이 발발 떨렸다. 카델은 테이블 위로 흘러넘치는 술을 일별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 불안하시다면 오늘 밤만이라도 육체에 장막을 둘러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 내내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얇은 장막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정신 나갈 사람처럼 패닉에 빠진 사람을 앞에 두고 매정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이 주의를 끈 사이에 백작이 기습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얄팍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백작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보듯 눈을 빛내며 카델의 앞으로 냉큼 달려왔다.
“그럼 지금 당장 장막을 둘러 주게! 그리고 오늘 밤은 아예 여기서 함께 자도록 하지. 멀리 갈 필요 없어.”
“예……?”
“어차피 혼자 쓰기엔 넓은 침대였네. 부담 가지지 말고, 함께 쓰자고.”
카델의 손을 덥석 움켜쥔 백작의 손에선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카델은 백작의 파란 얼굴과 침대를 번갈아 보고는, 스리슬쩍 손을 비틀어 빼냈다.
“굳이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따로 있는 게 걱정이신 거라면, 그냥… 오늘은 밤을 새울게요. 의자 하나만 내주시면 충분합니다.”
사실 카델에게 있어 낯선 남자와 한 침대를 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동성인 데다 서로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부하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쓸데없을 정도로 마음이 불편해져 도저히 같이 자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작은 카델이 옆에만 있어 준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장막을 생성하겠습니다. 바람의 장막이라 앞을 보는 데엔 무리가 없겠지만, 약간의 소음은 있을 거예요.”
“상관없네. 어서 걸어 주게.”
카델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무의미한 헛소리를 영창처럼 중얼거리곤, 느지막이 장막을 둘러 주었다. 그에 백작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 옆에 의자를 둘 테니, 여기 앉게나.”
“……그러죠.”
꼼짝없이 백작의 자는 얼굴을 감상하며 밤을 새우게 생겼다. 부하들 같은 미남이라면 몰라도, 백작의 얼굴은 오래 들여다봤자 화만 났다.
카델은 차오르는 한숨을 억누르며 침대에 밀착된 의자를 멀찍이 떨어뜨려 그 위에 앉았다. 주변을 감싼 바람 소리가 제법 거슬렸을 텐데도 침대에 누운 백작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낮부터 고함을 질러 대며 신경을 갉아먹은 데다 술도 진탕 마셔 댔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이 표적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요젠이 다른 가문에 출몰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신경이 쓰였을 테니 말이다. 요젠이 아예 처음부터 단원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고, 괜한 마찰이 빚어졌을 수도 있다. 차라리 구면인 자신과 대면하는 게 나았다.
‘그건 그렇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카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요젠이 백작에게 낙인을 남기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유일한 피해자인 백작의 말을 믿었을 뿐. 하지만 거의 확실하다고는 생각했다. 백작의 가슴에 남아 있던 검은 반점 때문이었다.
‘그 반점은 분명 [각명刻冥]이었어. 요젠이 다녀간 건 확실해.’
[각명]은 요젠 바르딕타의 스킬 중 하나로, 쉽게 말해 일종의 ‘과녁’이었다. 적의 몸 일부에 얼룩 같은 표식을 만들어 두면, 일정 턴 뒤에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과녁이 생긴 상대방은 말 그대로 요젠에게 목을 내놓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의 공격은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공격이 그랬다. 때문에 적이 미리 방어막을 두르지 않는 이상, 언제나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막지 못하면 저 자식은 최소 중상이겠지.’
다른 곳도 아닌 심장 부근에 각명이 생겼다. 웬만하면 죽음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걸 생각하면 묘한 찜찜함이 피어올랐으나, 지금은 그보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분명 나를 봤을 텐데.’
백작은 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고, 유일하게 같은 방에 있던 자신은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요젠의 입장에선 꽤 여유로운 잠입이었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의 맞은편에 떡하니 자리한 남자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시하고 가 버린 건…… 나를 적으로 인식해서일까?’
충분히 경계할 만했다. 누가 봐도 본인의 표적을 보필하는 자로 보였을 테니. 달갑지 않은 오해에 짜증스레 혀를 찬 카델이 팔짱을 꼈다.
안 그래도 암살자라 보통 경계가 심한 게 아닐 텐데. 그 경계심에 불을 지폈으니 영입이 한층 까다로워질 테다.
‘그때 졸지만 않았어도 말을 붙여 볼 기회가 있었을 거 아니야. 왜 하필 거기서 정신을 놔 버려선.’
그렇게 카델이 과거의 자신을 타박하며 조금씩 몰려오는 잠을 몰아내고 있던 때. 그의 목걸이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번지며, 쿤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봐, 반쪽이. 조심해라.]
지금 누구더러 반쪽이라 하는 것인가. 쿤라의 배려 없는 호칭에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으나, 분출할 새는 없었다.
까가가각!
날붙이가 긁히는 쇳소리와 함께, 등에서부터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컥, 숨을 몰아쉰 카델이 빠르게 몸을 틀자, 희미한 그림자가 눈앞을 스쳤다.
[갑옷에 흠집이 났군. 재생에는 시간이 걸리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반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