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이라고?
카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제 몸을 훑었다. 어느샌가 생성된 쿤라의 비늘 갑옷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갑옷의 파편이었다.
‘방금 공격 때문에 떨어져 나간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갑옷이라면 몰라도, 이것은 적룡의 비늘을 본따 만들어진 최고급 방어구였다. 단 일격으로 이 방어구에 흠집을 입힐 수 있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으나, 만약 이곳에 그걸 가능하게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요젠 바르딕타 뿐이었다.
‘날 알아보지 못했나? 아니면 설마, 알아보고도 공격한 건가.’
어느 쪽이라도 당장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카델은 백작의 장막에 조금 더 많은 마력을 불어넣은 뒤, 침대 옆으로 붙어 섰다.
‘뭐가 됐던 녀석이 노리는 게 케인슈타인 백작이란 건 분명해.’
백작과 붙어 있다면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그리 판단한 카델이 만약을 대비한 마력을 끌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큿…!”
뭔가가 목덜미를 강하게 낚아챈다 싶더니, 발목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지며 중심이 흔들렸다. 버텨볼 재간도 없는 능숙한 기술이었다. 카델은 그대로 무너지는 몸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으려 했으나, 날아든 손아귀가 그의 팔을 뒤로 꺾었다.
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델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투구 덕분에 코뼈나 이빨이 부러지는 참사는 면할 수 있었지만, 충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델은 안면을 뒤덮는 시큰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아악! 씨발…!”
꺾인 채 붙들려 있던 팔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비틀렸다. 억지로 쥐어짜인 관절이 비명을 지르며 일순 눈앞이 하얘졌다. 탈골된 것이 분명한 오른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수반됐다.
카델은 반대쪽 손을 움직여 자신의 등을 짓누르고 있는 놈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으나, 명중하진 못했다.
목표에서 빗나가 천장에 처박힌 화염구가 작은 진동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화염구를 쏜 왼팔이 붙들렸다. 팔뚝을 쥔 심상치 않은 악력에 카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 미친 새끼가 사람 팔을 다 뜯어내기라도 할 작정인가?’
이쯤 되면 둥켈하이 숲에서 보았던 ‘그’ 요젠이 맞긴 한가 싶었다. 그때의 요젠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어도 이런 식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들어차는 의심에 카델은 거의 발악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젠!”
그러자 팔뚝을 쥔 손에서 희미하게 힘이 풀렸다. 카델은 바닥에 짓눌린 뺨을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자신의 위에 올라탄 인간의 정체를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목덜미를 압박하는 손 때문에 제대로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쉽게도.”
조용히 귓가를 울리는 음성에, 카델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 드는 짓을 멈췄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요젠의 목소리였다. 숲에서 그에게 길을 안내해 주던,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
“맞는 거지? 요젠. 넌 날 알잖아.”
“그래, 난 네 얼굴을 기억했지. 네 숨소리와 걸음걸이, 말투까지 전부.”
“그때처럼 난 널 공격할 생각이 없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요젠은 카델이 본론을 꺼내도록 놔두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에 앉았던 몸을 숙여 가까이 밀착시켰다. 뜨거운 숨결이 카델의 귓바퀴를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백작을 지키려는 거잖아. 나에게서, 저 돼지 새끼를.”
고저 없이 차분한 음성이었으나, 카델은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갑옷을 뚫고 전신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만나 온 그 어떤 적보다 지독한 살기. 그의 건조한 기운은 식은땀마저 메마르게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여기 오면 널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잠시 용병 행세를 했던 것뿐이야.”
“……그래?”
귓가에 닿아 오는 요젠의 숨결을 느끼던 중, 카델은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음에도, 그에게선 마땅히 들려야 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결이 느껴지는데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 방을 채우고 있는 소리라고는 고통을 눌러 참는 자신의 신음과 여전히 깰 기미가 없는 백작의 얕은 코골이, 그를 감싼 장막에서 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네.’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이 점점 경직됐다. 카델은 요젠의 존재를 ‘끌어들여야 할 예비 동료’로 인식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퍼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요젠을 공격할 것 같았다.
“백작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
곧 등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멀어지며, 팔과 목덜미를 포박하던 손도 떨어졌다. 카델은 저릿거리는 몸뚱이를 웅크린 채 뻑뻑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요젠의 실체를 보았다. 비록 뒷모습일 뿐이었지만.
은은하게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남색 머리칼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눈을 가린 흰 붕대의 매듭이 보였다.
몸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얄팍한 옷은 온통 무채색. 광택 하나 없는 새까만 의상은 당장 그림자에 녹아들더라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보이는 맨살이라곤 머리칼 아래 살짝 드러난 목덜미와 손뿐이다. 얇은 옷감 너머로 비치는 체형은 둔한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온몸이 날렵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대한 몸집도 아니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보는 것만으로 괜스레 위축되었다. 마치 포식자를 앞에 둔 사냥감처럼,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카델은 그 두려움을 멀리 밀어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라니. 뭘 하려는 건데?”
“지금부터 난 백작을 죽일 거거든. 그러니 네가 백작의 사람이 아니고, 그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라면.”
“…….”
“방해하지 않는 게 좋아.”
카델을 향해 비스듬히 돌아간 고개 너머, 날카롭게 올라간 입꼬리가 비쳤다.
‘백작을 죽인…다고….’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요젠을 만나기 위해 백작의 저택을 찾아온 거니까. 요젠을 만났다면,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은 백작을 위해 몸을 던질 의리도, 그를 위해 요젠과 대립할 생각도 없었다.
‘요젠이 암살하는 인간은 전부 악명 자자한 귀족이라고 했어.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케인슈타인 백작은 이곳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유도 모른 채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게 놔두는 것은 옳지 못한 게 아닌가. 그러한 의문이 들었으나, 그런 건 카델 라이토스나 할 법한 생각이 아니던가.
‘이젠 더 이상 조종당하지 않아. 내가 생각할 거야. 내가, 오로지 내 판단으로…….’
그가 자신의 내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온건한 생각을 모조리 밀어 냈다. 비척비척 일어난 카델의 시선이 소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숙면 중인 케인슈타인 백작과 요젠을 향했다.
요젠은 손안에 들린 단검을 가볍게 던지고 받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사뿐히 회전한 단검은 요젠의 손에 자석이라도 달린 듯 완벽하게 감겨들었다.
카델은 요젠이 백작을 감싼 장막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영웅 심리 따윈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목숨 부지가 아니라, 요젠 바르딕타야. 어울리지 않는 짓 하지 마. 동정심은 카델 라이토스나 실컷 느끼라고 해.’
묘하게 가빠지는 호흡을 무시한 채, 카델은 장막을 거뒀다. 쉭쉭 거리는 바람 장막이 사라지자 요젠은 더 이상 단검을 던지지 않았다.
역수로 치켜 든 단검의 끝이 조준점을 가늠하듯 느리게 이동했다. 카델은 탈골된 오른팔을 감싼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단검은 정확히 백작의 심장 위. [각명]이 새겨졌던 위치에서 멈췄다. 곧 과녁을 발견한 단검의 날에부터 검은색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건…….’
마기와는 달랐다. 마기는 어두운 보랏빛에 가까웠고, 그 일렁임이 기묘하고도 변칙적이었다. 암흑 마력과도 달랐다. 암흑 마력이 기체 같은 성질을 띤다면, 요젠의 기운은 액체에 가까웠다.
질척하게 뭉쳐 있고, 물방울처럼 미끄러진다. 날을 타고 흘러내린 기운은 얼마 안 가 단검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암기’인가. 저 정도 농도의 암기를 다루는 인간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그래.]
암기.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확인한 요젠의 힘은, 식은땀이 흐르도록 불길한 면이 있었다. 카델은 아픈 줄도 모르고 제 오른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생각을 흩뜨렸다. 단검에 암기를 두른 요젠은 잠시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멈춰있더니, 이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불필요한 힘도, 튀는 자세도 없는 완벽하게 정제된 동작. 추락하듯 내리꽂히는 단검은 그 자체로 백작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침대 위를 휩쓰는 묵직한 바람과 함께, 무언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으…….”
요젠의 검은 백작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그의 검은 아무것도 없는 침대의 흰 시트 위에 아슬아슬하게 머물러 있었다. 행동을 멈춘 그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요젠의 표적이었던 케인슈타인 백작. 침대에서 떨어진 백작은 난데없는 충격에 꼬리뼈를 문지르며 눈을 깜빡였다. 잠시 현실과 꿈을 혼동하듯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뒤늦게 자신의 침실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은 시선이 요젠의 손에 들린 단검을 발견하고, 뒤편의 카델을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다급한 외침은 그의 정신을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도망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