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521)

요젠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떠올랐으나, 그를 감싼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떠올랐던 흥미는 이미 불쾌한 적의로 뒤바뀐 지 오래였다.

카델은 자신이 요젠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위험한 상황이 펼쳐진대도 자신에게는 목숨을 부지할 힘이 있었고, 쿤라의 가호도 함께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한, 몸 사릴 이유는 없다.

“암살에는 네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 그것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어. 네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인간에게서 굳이 가치를 찾아 들이밀 생각은 없다고. 다만, 내 기사단은 사람을 지키지.”

“…….”

“사람을 위협하는 마물을 소탕하고, 마족을 도륙해. 네가 인간 틈에 섞여 사는 돼지 새끼를 암살하고 싶어 하는 건 막지 않겠지만, 그게 일 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야.”

암살자를 데려온다면, 보통은 그를 본인의 그림자로써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할 더러운 일을 시킬 테다. 경쟁 상대를 해치우거나, 목적을 위한 고문 및 협박에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카델에게는 죽이고픈 경쟁 상대도, 협박해서라도 얻어 내고픈 정보도 없었다. 그는 그저 다가올 마계 전쟁에서 활약할 뛰어난 전사를 원할 뿐이었다.

요젠은 카델의 말을 곱씹듯 가만가만 제 입술을 문지르더니, 이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왜?”

요젠의 조심성 없는 손길이 뻗쳐 왔다. 단단한 손끝이 카델의 뺨을 더듬듯 쓸어내리고, 목선과 쇄골을 지나 가슴께까지 내려갔다.

이 녀석은 왜 아까부터 계속 사람 몸을 더듬거리는 걸까. 슬쩍 짜증이 치솟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굴기 위해 애썼다.

카델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린 요젠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강하다는 건 알아. 이전에도 영입 제안은 여러 번 받아 봤어. 너처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다 거절했나 보네. 아직까지 소속된 곳이 없는 걸 보면.”

“전부 내 목적과는 맞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별 볼 일 없었거든.”

손톱을 세워 카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린 그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네가 날 원하는 이유는 알았으니까, 이젠 내가 널 원해야 할 이유를 말해 봐.”

그런 종류의 이유라면 몇 가지 생각해 둔 것이 있기는 했다. 물론, 요젠의 실체를 절감하기 전까지의 얘기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는 폐기물들을 죽음으로써 갱생시키는 것.

안타깝지만, 자신은 그 살육에 동참해 줄 수 없었다. 글러 먹은 인간을 직접 찾아가 죽이기에는 살인이 익숙지 않을뿐더러, 익숙해질 마음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요젠과 자신이 가진 가치관이 정반대인 것은 아니었다. 바라보는 방향은 다르지만, 등은 맞대고 있다. 시작점이 같은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자 요젠의 앞에서 위축되었던 정신이 조금씩 기를 폈다. 그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직시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다면, 넌 지금의 방식보다 훨씬 더 많은 인간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

“네가 구하고자 하는 인간이 같은 인간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뿐이라면 내 제안은 네 흥미를 끌지 못하겠지. 누군가에겐 복수가 필요할 테니, 그들의 증오를 무시하면서까지 세상에서 영면의 사자란 존재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

닿았던 손이 떨어지며, 요젠의 미소도 사라졌다. 카델은 붕대로 가려진 요젠의 눈을 바라보았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조금도 도드라지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새롭게 선택할 기회야. 이미 한번 지나왔던 갈림길의 왼쪽이 아닌 오른쪽. 영원히 밟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땅을 밟게 해 줄게. 잘 알겠지만, 양지에서 음지로 가긴 쉬워도 그 반대는 꽤 어려워. 그리고 내겐 그 어려운 걸 이뤄 줄 힘이 있지.”

마주 본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도, 생각을 유추할 수도 없었다. 반응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얄팍한 감정의 가닥을 잡아 엮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요젠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걸 알아내는 데에서 그쳤지만.

“생각해 볼게.”

“의외로 반응이 빠르네. 대답은 더 빨리해 주는 게 좋아. 내가 제법 바쁜 몸이라.”

카델의 너스레에 요젠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마지막 기사 영입이라는 중요한 작업을 목적지로 향하는 김에 겸사겸사 처리하려 들겠는가.

“좋아.”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인 요젠이 카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한 뼘도 남지 않게 좁혀지고. 부담을 느낀 카델이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곧 찾아갈게. 그때 네가 내 습격을 막아 낸다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뭐?”

“이 나라를 떠나도 상관없어. 난 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어디에 있든 찾아갈 수 있거든.”

습격이라니? 대답해 주는 데 왜 그런 쓸데없는 절차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황한 카델이 그의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정정하려 했으나.

“……요젠?”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요젠의 모습이 사라졌다.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두운 숲속에선 그의 머리털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못 막으면 죽는 거 아니지…?”

소심한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렇게 카델은 한참을 황망히 서 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는 쿤라의 경고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 했다.

*

케인슈타인 백작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백작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그의 과거 행실은 평민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대부분은 ‘죽어도 싼 놈이었다’ 따위의 감상을 내놓으며 백작의 죽음을 기뻐했다.

영면의 사자의 타깃이 죽었으므로, 나머지 귀족들의 방비는 자연스레 느슨해졌다. 그들에게 고용되었던 적린 기사단원들 역시 백작의 죽음을 접하자마자 곧장 처음의 숙소로 복귀했다.

“지루해서 전부 죽여 버릴 뻔했네. 참느라 힘들었어, 자기!”

라이돈은 카델을 보자마자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두 배는 차이 나는 덩치 덕에 안겼음에도 안은 꼴이 되었지만, 라이돈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으며 며칠 만에 만나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카델도 이곳에 오기 전 다른 치유사에게 따로 치료를 받았기에 겉으로는 멀쩡했다.

“다들 수고했어. 별일은 없었지?”

“이쪽이야 일이 터졌으면 싶을 만큼 심심했죠. 단장님은 아니었겠지만.”

“하필 대장 쪽에 등장하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영입은…… 어떻게 된 거야? 새로운 얼굴은 안 보이는데.”

가르엘과 루멘이 무료했던 임무를 보고하는 동안, 반은 카델에게 들러붙은 라이돈을 억지로 떼어냈다. 카델은 멀어지는 온기를 느끼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순조롭진 않았어. 확답도 못 받았고.”

“이미 얘기가 끝난 놈 아니었나요? 단장과 함께할 기회를 놓친다면 어지간히 통찰력 없는 놈일 테니 버려도 괜찮겠지만요.”

부하들을 둥켈하이로 이끌기 위해 요젠의 입단을 기정사실로 꾸며 냈다. 당연히 새 단원이 들어오리라 예상했던 그들로선 당황스러운 결과일 테다.

카델은 부하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다는 생각에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더라. 너희도 알다시피 그 녀석 정체가 ‘영면의 사자’잖아? 과거에 나눈 얘기였기도 했고……. 어쨌든, 그렇게 됐어. 결과를 못 내와서 미안하다.”

“그런 대사는 부하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렁한 단장님이시네.”

“단장은 물렁하든 딱딱하든 유능하니까 상관없습니다. 뭐라고 하지 마시죠.”

“……전 반 경의 그런 맥락 없는 주접이 참 재밌어요.”

다행히 단원 영입을 애매하게 끝마친 데에 불만을 토로하는 부하는 없었다. 카델은 그것이 부하들의 넓은 아량 덕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상 가르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새 단원의 존재를 반기지 않기 때문일 뿐이었다.

심지어 가르엘마저 영면의 사자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였으니. 카델을 빼면 다들 이번 결과를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럼 우린 여기서 영면의 사자의 답변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기한은 정했어?”

“답변은 내가 따로 받을 거야. 여기서 기다리진 않을 거고, 바로 인테 설원으로 이동해야지. 예상보다 시간을 꽤 많이 잡아먹었으니까.”

요젠의 습격을 막아야지만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부하들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사실을 알았다간 요젠에 대한 부하들의 적의가 상승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만약 단원이 된다면 다들 사이좋게 지내야 할 테니.

‘혼자 막다가 죽지는 않겠지.’

괜히 도움받지 않고 버텼다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는 불길한 상상을 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쿤라의 힘만 있다면 어떻게든 즉사는 면할 수 있다. 조금 떨어진 곳이라면 몰라도, 근방에서 느껴지는 기척 정도는 감지해 주니. 그의 도움으로 습격을 대비할 생각이었다.

남몰래 비장한 계획을 세운 카델이 긴장감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필요한 물건은 되도록 오늘 안에 구하고, 내일 바로 이동하자. 설원의 환경이 어떨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요젠의 문제와는 별개로,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르엘의 존재가 기사단에 큰 안정감을 가져왔으나, 방심은 금물이다.

퀘스트를 처리할 때만큼은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도, 시스템의 농간도. 전부 덮어 둔 채 성공만을 바라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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