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 설원.
그곳은 혹한의 날씨와 밤낮없이 몰아치는 강풍 속에서 초마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 가는 살벌한 장소였다.
“아하하! 카델, 나 얼굴에 감각이 없어. 눈코입 잘 붙어 있나 봐 줘.”
“자꾸 빠져나오니까 춥지. 들어가.”
카델은 자신의 품속에서 고개를 빼 든 라이돈의 머리통을 지그시 누르며 옷깃을 여몄다.
흑곰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두툼한 털 코트와 방한 마도구로 전신을 무장했음에도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추위였다.
살갗뿐 아니라 뇌와 장기까지 모조리 얼어붙은 기분. 행동이 둔해졌고, 사고 또한 더뎌졌다. 주위에 불덩이를 띄워 봐도 전혀 열기가 전해지지 않아, 카델은 이 이상 따뜻해지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단장, 제 외투라도 걸치실래요? 단장이 필요하다면 벗을 수 있으니까요…….”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턱을 덜덜 떨면서 말해 봤자 안쓰러움만 더해질 뿐이다. 카델이 말이라도 고맙다며 손을 내젓자, 반도 더는 권유하지 않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인원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루멘은 한 시간째 이어지는 터무니없는 추위에 말을 잃은 지 오래였고, 가르엘은 삐뚤어진 안대를 바로잡으며 연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사이에서 작은 몸의 이점을 최대 활용한 라이돈만이 아슬아슬하게 체온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는 카델의 품에 들어가 호사를 누리는 대신, 봉인진 탐색이라는 개별 임무를 맡았다.
“마력이 점점 짙어지고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하겠는데?”
다시 코트 위로 고개를 치켜든 라이돈이 정보를 전하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센 눈보라에 시야 확보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로지 라이돈의 안내에만 의지한 채 눈밭에 푹푹 빠지는 다리를 꾸역꾸역 움직여야 했으니. 모두가 이 고역 같은 시간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러다 얼어 뒈지는 게 더 빠르겠네.’
만반의 준비를 했노라 자신했음에도 인테 설원의 한파에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메인 퀘스트만 신경 쓰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설마 도착하자마자 마족이랑 부딪히진 않겠지.’
온몸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전투는 무슨 빌어먹을 전투란 말인가. 적어도 몸을 녹일 시간은 있어야 했다. 카델은 최악의 상상을 물리치며 딱딱 부딪히는 턱에 힘을 주었다. 눈바람에 얼굴이 갈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20일 같은 20분이 지나고.
“도착!”
라이돈의 발랄한 외침과 함께, 기사단은 봉인진에 도착했다. 눈 때문에 봉인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꿈틀대는 마력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카델은 곧바로 봉인진을 확인하는 대신, 단원들과 모여 앉아 마력 주입용 모닥불을 지폈다.
‘지금 보든 나중에 보든 어차피 마족은 나오게 돼 있어. 일단 우리부터 살고 보자.’
스토리에서 이번 마족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진 몰라도, 대충 봉인이 무너졌으니 안쪽에서 빠져나온 것 아니겠는가. 녀석이 등장하기 전에 체력을 회복해 둬야 했다.
“다, 다들 빠, 빨리 몸 녹여.”
입이 얼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델은 모닥불에 마력을 잔뜩 주입하고는, 퍼져 나오는 온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자 몸을 움츠렸다.
작은 모닥불 하나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성인 남성들의 모습은 제법 애처로웠으나, 어차피 멋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마기가 추위도 없애 주면 좋을 텐데요.”
중얼거린 가르엘이 품속에서 물통을 꺼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카델의 눈동자에 일순 이채가 감돌았다.
“그거 술이야…?”
“네. 일부러 독한 걸로 가져왔죠. 좀 마실래요?”
카델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술이 고픈 것은 전혀 아니었으나, 독한 술을 마신다면 속은 따뜻해질 테다.
‘하지만 언제 전투에 돌입할지 모르는데……. 가르엘은 알아서 해독 작용이 된다지만 난 아니야. 취권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혹한이 건네는 고통에 자꾸만 판단력이 흐려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카델의 고민을 끝내 준 것은 다름 아닌 루멘이었다. 그는 카델의 어깨를 끌어안아 자신의 옆으로 바짝 밀착시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 봐. 안 그래도 정신 차리기 힘든데, 술까지 마시면 더 힘들 거야.”
역시 그렇겠지. 결국 카델은 모닥불의 온기가 몸을 녹여 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혼자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가르엘을 쏘아보는 것은 덤이었다.
그동안 라이돈은 카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근처를 돌아다녔다. 그 역시 살인적인 추위에 혀를 내둘렀으나, 그보다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다. 얼음 대정령인 핀하이의 힘을 얻은 후예이기에 추위에 비교적 강한 덕도 있었다.
“흐음…….”
강렬한 눈발 속에서 고집스레 날개를 펄럭이던 라이돈이 작게 미간을 구겼다.
“냄새가 잘 구별이 안 되네.”
낮은 기온과 강풍 때문에 후각이 마비됐다. 카델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이후 은은하게 풍기는 불쾌한 냄새를 감지했으나, 그것이 가르엘의 냄새인지 마물의 냄새인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기분 나빠라.”
아직은 별달리 눈에 띄는 게 없다. 짜증스레 코를 문지른 그가 카델에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음?”
그의 시야 속으로, 설원을 가로지르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들어찼다.
*
라이돈이 돌아온 것은 일행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며 슬슬 봉인진 활성화를 진행하려던 무렵이었다.
“카델!”
착지와 동시에 인간형이 된 라이돈이 카델을 불러 세웠다. 카델을 향한 얼굴에선 쉬이 볼 수 없는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전혀 라이돈답지 않은 표정에 불안해하며 묻자,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매한 게 다가오고 있어.”
“애매한 거라니?”
“묘하게 기분 더러운데, 확실하게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면 건들기 애매한 놈이야.”
“뭐?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이돈은 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카델을 두고 흩어져 있던 단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날아왔던 방면을 가리켰다.
“조금 있으면 나올 테니까 잘 봐.”
그리 말하는 라이돈의 눈빛엔 신중한 기색이 가득했다. 대체 무엇을 발견했길래 라이돈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카델은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라이돈이 가리켰던 방향을 주시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작은 인영 하나가 서릿발을 헤치며 등장했다.
“저건…….”
“아이, 같은데요. 단장님.”
몸집만 본다면 분명 아이였다. 비틀대며 다가오는 작은 실루엣을 본 가르엘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반과 루멘 역시 그의 뒤를 따랐으나, 카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라이돈을 돌아보았다.
“네가 말한 ‘애매한 놈’이 쟤야?”
“응. 짜증 나는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긴 한데, 이곳에 온 뒤로 후각이 무뎌졌거든. 난 꼬맹이 건드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카델한테 확인받으러 왔지.”
카델은 칭찬해 달라는 듯 어깨를 세운 라이돈의 등을 두드려 주고는, 단원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잘했어.”
다가갈수록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반과 루멘, 가르엘에게 둘러싸인 열 살 남짓의 소년.
색이 흐린 푸른색 머리칼과 설원의 눈처럼 새하얀 피부. 짙은 금안과 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소년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단원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근처에 일행이 있니? 길을 잃은 거야?”
“설원 외곽에 마을이 있다고 하던데.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온 건가?”
가르엘과 루멘은 아이의 신변을 살피며 주변에 다른 일행은 없는지를 물었다. 반 역시 소년의 몸에 남은 상처를 찾다가, 카델이 다가오자 곧장 주의를 돌렸다.
“단장, 아무래도 근처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에요. 겉옷도 얇고 신발도 없어요. 그런데도 아직 동상에 걸리지 않은 걸 보면 주변에 보호자가 있는 것 같고요.”
반의 말대로 소년이 입고 있는 것은 얇은 튜닉과 방한과는 동떨어진 암청색의 로브뿐이었다. 보통이라면 순식간에 몸이 얼어 살이 썩어 들어갈 테지만, 소년의 피부는 여전히 하얗기만 했다.
반은 그것이 아이가 무리에서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카델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를 걱정하는 단원들을 밀어 내며 소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소년의 커다란 눈동자가 카델의 움직임을 좇았다. 소심한 시선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카델은 무감한 얼굴로 소년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기만 한 손등을 힘주어 쓸어내린 그가, 소년의 둥그런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기서 돌아가면 살려 줄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언. 심지어 카델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단원들은 놀란 얼굴로 카델을 바라보았고, 소년 역시 충격받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이는 라이돈뿐이었다. 그는 어딘지 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평범한 꼬맹이가 이런 델 돌아다닐 리가 없지. 아하하! 속을 뻔했네!”
라이돈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동시에 방황하던 단원들의 시선이 다시금 소년을 향했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그 속에서, 소년은 여전히 겁을 먹은 얼굴로 조심스레 손을 비틀어 빼냈다.
“도, 돌아가면 살려 준다니…….”
진심으로 두렵다는 듯 소년의 두 눈에선 촉촉한 물기가 맺혔다. 공포로 점철된 표정이었으나, 시선은 여전히 카델을 향한 채였다.
소년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가 누굴… 살려 준다는 거야…. 건방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