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240/521)

소심한 말투와는 상반되는 대담한 내용. 충격적일 법했으나, 카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 소년이야말로 인테 설원에서 기사단이 처리해야 할 고위 마족이었으니. 뜻밖인 것은 소년이 등장한 방향이었다.

마족은 당연히 봉인을 뚫고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소년은 봉인과 정반대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게다가 봉인진에서는 아직도 균열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마계가 아닌 인간계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족이었나? 그것이 카델이 가진 유일한 의문이었다.

“대장. 설마 이 녀석…….”

카델은 검집에 손을 올린 루멘을 일별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마족이야. 이름은…… 엘비. 맞지?”

“하, 함부로 내 이름… 입에 올리지 마. 역, 겨워…!”

엘비는 카델이 본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데다,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역겹다는 듯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여전히 소심하게 일그러져 있으니, 독특한 녀석이었다.

카델은 소년의 정체를 공표했다. 그럼에도 엘비를 둘러싼 단원들은 그를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어린 외형도 께름칙했지만, 그들의 망설임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바로 카델의 태도였다.

카델은 누구보다 먼저 엘비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지도, 장막을 두르지도 않은 채 동네 꼬마 대하듯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카델의 행동에는 언제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카델보다 먼저 나서지 않았다.

물론, 행동만 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기, 왜 안 싸우는 거야? 설마 저 외형에 속아서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거야? 홀리면 안 돼. 내 얼굴을 봐! 훨씬 귀엽고 예쁘잖아?”

엘비가 인간이 아니란 걸 확인한 라이돈은 지금 당장 녀석과 싸우고 싶다며 안달을 냈다. 카델도 굳이 막을 마음은 없었으나, 허락의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어라 싸워 봤자 얘 몸엔 흠집도 안 날 텐데.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리 말한 카델이 순식간에 생성한 화염구를 엘비의 얼굴로 쏘아 날렸다. 작은 화염구였지만 위력은 엄청났다. 우렁찬 폭음과 함께 엘비의 몸뚱이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힘없이 낙하했다.

얼굴에서 피어오르던 뿌연 연기가 강한 눈발에 밀려 빠르게 쓸려 나간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저건…….”

불꽃에 타들어 간 피부 아래 자리한 투명한 얼음. 카델의 마법에도 녹아내리지 않은 얼음은 흠집 하나 없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돼 먹은 몸일까요?”

기사단의 시선 속에서 서둘러 상체를 일으킨 엘비가 제 얼굴을 미친 듯이 더듬거리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거, 건방져, 건방져, 건방져…!”

발작처럼 중얼거린 그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카델을 바라보았다. 소극적인 시선이었으나, 카델은 그 안에 담긴 짙은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타격은 없었다.

‘내가 너 공략하는 데 애먹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 이 자식아.’

모든 게임의 국룰 아니겠는가? 어려 보이는 외관에 비해 전투력은 노장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나이를 알 수 없으니 녀석이 어린 천재인지 소년의 모습을 고집하는 변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녀석이 직접 스테이지를 만들어 내기 전까진 공격해도 데미지를 줄 수 없어. 빨리 전투를 진행하게 만드는 수밖에.’

엘비를 공략하는 데엔 대부분의 보스가 가진 ‘프리 딜 타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얌전히 맞아 주지 않고, 맞아 준다 해도 딜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단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겁니까? 상대해 본 적이라도 있어요?”

가르엘은 아예 팔짱까지 낀 채 엘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녀석은 맨몸으로 눈밭을 구르는데도 전혀 추워하지 않았다. 몸이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델은 슬쩍 눈을 깔며 얼버무리듯 답했다.

“쿠, 쿤라가 알려 줬어. 지금도 머릿속에서 설명 중이야.”

“으음, 좋네요. 공략집 같은걸요.”

졸지에 쿤라의 역할이 마족 공략집으로 전락했지만, 괜찮은 선택이었다. 어딘가의 책에서 읽었다는 어설픈 변명보다는 훨씬 나았으니. 어디선가 쿤라의 헛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쿤라와 대화할 수 있는 건 내가 먼저 부르거나 녀석이 내 쪽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을 때뿐이야. 뭐, 부하들이 그걸 알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카델이 새로운 빙의자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을 무렵.

“단장. 물러나세요.”

경계 어린 반의 목소리와 함께, 엘비가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눈밭 위로 얇은 손가락을 푹푹 찔러 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구멍에 불과했던 것이, 기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를 따라 선과 선으로 이어졌다.

고개는 하늘을 향해 바짝 꺾였고, 눈알은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마치 누군가의 계시라도 받은 듯한 섬뜩한 모양새였다.

“에, 에밀리아 누나가 전부 처, 청소하랬으니까. 다 죽일… 죽여 버릴 거야….”

녀석이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마법진이었다. 순식간에 마법진 하나를 완성해 낸 그가 술식을 가동하고.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진동이 설원을 뒤덮었다. 카델은 자신을 감싼 반에게 몸을 맡긴 채 진동의 근원지를 찾았다. 엘비의 마법진은 아니었다.

봉인진.

아직 건들지도 않은 봉인진 아래서부터, 거대한 얼음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둥은 눈밭 위로 빠져나올수록 두께와 면적을 넓혀 갔고, 한참을 끝없이 치솟았다.

막을 수 있는 속도와 크기가 아니었다. 공간을 통째로 울리는 진동이 잦아들었을 때, 기사단은 그것이 평범한 기둥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탑임을 깨달았다.

“아, 안으로 들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봉인은 깨져. 그, 그럼 나야 좋지만…….”

음습한 웃음소리를 내는 엘비의 앞으로 얼음 창이 날아들었다. 얼음 창은 정확히 엘비의 복부를 관통했으나, 녀석이 일격에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흐응, 뭐야. 환혹술 흉내라도 내는 거야?”

공격에 맞은 엘비는 그 즉시 환영처럼 사라졌다. 라이돈은 눈밭에 덩그러니 꽂힌 얼음 창을 응시하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환혹술 같은 게 아니야.”

카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친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탑이 녀석의 본체거든. 탑 내부 어딘가에 녀석의 심장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서 박살 내야 죽일 수 있……다고 쿤라가 말하고 있어.”

“역시 적룡이군요. 이왕이면 쿤라 님이 직접 저 탑을 녹여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나한테 나눠 준 힘만으로는 무리래.”

카델은 들리지도 않는 쿤라의 말을 전하며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서두르자. 들어가지 않으면 봉인이 깨진다는 거, 진짜인 것 같으니까.”

*

[메인 퀘스트 ‘마계의 탑’ 수락 완료!]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스토리를 진행하십시오. 보상이 주어집니다.]

[실패 시, 기사단 전원 사망.]

상상을 초월하는 페널티를 맞닥뜨렸음에도 카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시스템 창을 무심하게 일별한 그는 시선을 돌려 눈앞의 문을 바라보았다.

탑의 입구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두리에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정중앙을 차지한 숫자 ‘5’의 존재였다.

“이 숫자가 의미 없는 표기 같지는 않은데요. 층수를 표기한 거라기엔 아무리 봐도 여긴 1층의 입구고…….”

문의 양각을 어루만진 가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옆에서 반은 대검의 손잡이로 얼음 문을 강하게 내리찍는 중이었다. 살벌한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으나, 문이 부서지거나 구멍이 뚫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가라는 걸까요, 단장? 손잡이도 없고, 부서지지도 않는데요.”

“여기서 고민하는 동안 봉인이 깨지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대장, 화염 마법으로도 녹일 수 없는 거야?”

문에 직접적인 손상을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 이 탑은 엘비의 육체나 다름없었고, 심장이 깨지지 않는 한 녀석의 몸엔 흠집 하나 남기지 못한다. 에르고의 상위 호환이라 보면 됐다.

‘탑의 입구에서부터 애를 먹은 기억은 없는데. 문에 있는 숫자도 지금은 상관없는 힌트고. 스테이지 도입부 컷씬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스토리가 나왔다면…… 내가 알 리는 없겠군.’

뇌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파 속에서의 고민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카델은 무력을 제외한 여러 방도를 고민하다, 결국 가장 상식적인 행동을 택했다.

“노크라도 해 보자.”

부하들 틈을 헤집고 나온 카델이 빨갛게 언 손마디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 너머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방문은 정중하게……. 그, 그게 상식이잖아. 미개해.]

소심한 말투로 할 말은 다 하는 꼴이 상당히 얄미웠으나, 일단 카델의 노크로 탑의 입장은 허락되었다. 거대한 얼음 문이 위로 올라가며,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내부는 벽과 바닥, 천장이 모조리 하얗게 얼어붙은 텅 빈 홀이었다. 샹들리에 모양으로 조각된 얼음 조명에서부터 밝은 빛이 흘러나와 안쪽은 대낮처럼 환했다.

탑의 주인인 엘비도, 적도 없이 냉기만이 흐르는 적막한 공간. 카델은 문 앞에 멈춰 선 단원들을 이끌고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들 긴장해 둬. 한 명의 낙오자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엘비의 공략은 카델이 클리어해 왔던 모든 스테이지를 통틀어 개개인의 실력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한 명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퀘스트 실패의 페널티는 기사단 전원의 목숨. 그것은 언제나처럼, 실패했을 시 당연히 벌어지게 될 참극의 예고일 뿐이었다.

“죽어도 죽지는 말자고.”

그렇게 기사단 전원이 탑 안에 발을 들이고. 탑의 유일한 출입문은, 이음새가 완전히 사라진 벽이 되어 그들을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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