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화 (243/521)

계단 위로 지독한 침묵이 감돌았다. 동료가 적들의 틈에 남겨졌다. 그런데도 루멘과 가르엘은 이 탑의 최상층이 몇 층인지, 어느 곳에 가야 엘비를 죽일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보이는 출구를 따라 나아갈 뿐.

카델에겐 그들의 불안한 의문을 해소해 줄 능력이 있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단원들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탑에선 동료를 한 층씩 남겨 둔 채 전진하는 수밖엔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그 기다림을 감당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게임에서는 각 층에 유리한 능력치가 높은 기사를 배치하고, 최상층의 보스를 처리하는 동안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었으니.

수백 마리의 마물에 둘러싸인 반이나, 살인적인 기세의 얼음 인형에게 쫓기는 라이돈의 모습 따위, 상상해 봤을 리 없다.

‘……다음 층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현재 남은 인원은 세 명. 그렇다는 건, 탑의 최상층까지는 2층이 남았다는 말이다.

1층과 2층을 맡길 부하를 정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보통 1층은 딜링과 탱킹이 가능한 멀티 포지션을, 2층은 사격이 가능한 마법사나 요정족을 넣었다. 최상층은 자신이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으므로, 문제는 남은 3, 4층.

‘3층도 4층도 저 둘이라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

가르엘이 가진 회복력과 루멘의 높은 이동 속도는 어느 층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 누굴 남기더라도 버티는 게 가능할 테니, 배치에 큰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마계의 탑을 오르며, 카델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각 층에 누굴 남기는 것이 가장 덜 괴로울 수 있는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전부 감당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최상층에서 직접 엘비의 심장을 처리해야 했다. 다른 부하들에게 그 일을 맡길 수는 없다.

각 층에 등장하는 적의 종류를 기억한다면 고민을 덜 수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스테이지를 트라이하며 분석했던 기록. 각 층에 어떤 능력치가 높은 기사를 넣어야 클리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집념 어린 공략뿐이었다.

게임 캐릭터의 피가 깎이는 걸 보며 안타까워할 플레이어는 없으니까. 남겨진 기사가 얼마나 많은 체력을 남기고 클리어할 수 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했어. 최소 피해로 탑을 돌파할 방법만 알아냈더라면…….’

과거의 일을 후회해도 남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끝을 맺지 못한 고민을 떠안은 채, 카델 일행은 3층의 입구에 도착했다.

*

“저 발광체는 대체 뭘까요?”

“건드렸다가 폭발이라도 할까 봐 무섭군.”

3층의 내부는 그야말로 눈부심의 극치였다. 손톱만 한 황금색 발광체가 촘촘하게 허공을 수놓았고, 그것들이 가볍게 활강할 때마다 하프처럼 감미로우면서도 간지러운 소리가 번졌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카델의 눈빛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 발광체가 뭔가의 공격 장치라면, 왜 이동 속도가 요구되는지는 알겠네.’

발광체는 밤하늘의 별을 모아 둔 것처럼 아름다운 동시에,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수가 많았다. 만약 이것들이 [화접몽]처럼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면 루멘 정도의 속도가 아니고서야 회피하기란 어려울 테다.

‘그렇다면 회복력은?’

설마 전부 몸으로 맞고 알아서 회복하라고? 저 많은 게 전부 터진다면 회복하기도 전에 죽게 될 텐데. 차라리 방어력이 높은 탱커나 보호막이 있는 마법사가 더 나을 것이다.

묘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카델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두 남자의 틈으로 빠져나왔다.

“반대쪽 문으로 가려면 발광체와의 접촉은 피할 수 없어. 장막을 둘러 줄 테니까, 최대한 빠르게 돌파해 보자.”

“……빠르게 가는 게 가능하겠어? 업히는 게 나을지도 몰라, 대장.”

진심으로 우려하는 듯한 루멘의 표정에 카델이 인상을 썼다.

“너는 이런 때까지 날 놀리고 싶냐?”

“놀리는 거 아니야.”

“…….”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데.”

도대체 부하들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어떤 모습인 걸까. 아무리 저질 체력이라도 급할 때 달리기 정도는 가능하건만.

카델은 숨죽여 웃는 가르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내리찍으며 바람 장막을 생성했다.

발광체의 정체를 밝혀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들이 멈춰 있을 동안 아래의 동료들은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을 테니.

그러나 장막을 두른 일행이 중앙까지 나아가기도 전.

우우웅—

잔잔하게 너울거리던 발광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하며,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음, 불길한데요.”

빛의 세기가 강해지며 시야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카델은 장막 위로 더 많은 마력을 불어넣으며 멈추지 않고 발을 놀렸다.

비늘 갑옷과 장막까지 이중 보호막을 두른 상태였다. 어떠한 공격이 오더라도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그때, 한계까지 빛을 뿜어낸 발광체의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섬광의 실이 이어졌다. 수많은 발광체를 엮어 낸 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처럼 빈틈없이 홀을 메웠다. 일행이라고 실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신과 부하들의 전신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빛 가닥을 발견한 카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한 압박감이 숨통을 옥죄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슈슈슉!

발광체들이 이어진 빛의 실을 따라 맹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카델은 발광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폭발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수를 셈할 수 없는 대량의 발광체는 마치 레일처럼 빛의 실을 내달리며 궤적 내의 모든 것을 베어 내고 있었다.

작고 날카로운 칼날이 공간 전체를 난도질하며 활보했다. 카델은 궤적의 중심부에 위치한 일행을 지키기 위해 장막을 강화했으나, 소용없었다. 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발광체는 아쉬브카의 흡기충처럼 장막의 마력을 좀먹었다. 빠르게 붕괴하던 장막이 결국 발광체의 위력을 이기지 못한 채 허물어졌다.

“뭐 이런 게……!”

장막은 쓸모없다. 여기서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비늘 갑옷을 믿고 출구까지 질주하는 것이 나으리라.

결심한 카델이 이어질 충격을 가늠하며 턱에 힘을 주었으나.

“아무래도 여긴 제 차롄 것 같죠?”

발광체는 그들을 베어 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카델과 루멘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가르엘, 너……!”

카델은 순식간에 자신과 루멘을 감싼 마기를 올려 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불길하게 휘어진 마기의 깃털이 악마의 날개처럼 거무죽죽한 기운을 풍겼으나, 반쪽짜리 날개는 확실하게 동료를 보호하는 중이었다.

카델의 시선이 날개 너머의 가르엘을 향했다. 그는 마기를 펼쳐 카델과 루멘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본인의 방어에는 실패한 듯했다.

눈 깜짝할 새에 가르엘의 갑옷 군데군데에 균열이 번졌다. 발광체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가르엘의 오른뺨에 깊은 상흔이 남았으나, 보랏빛 마기가 상처 위로 꾸물꾸물 차오르며 금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가르엘은 순식간에 모든 순회를 돌고 제자리를 찾은 발광체들을 올려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경악에 찬 카델의 눈빛을 마주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맡기는 겁니다. 그렇죠, 단장님?”

왼쪽 반신에서부터 뻗쳐 나온 날개가 느리게 거둬졌다. 카델은 말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런 식으로 회복력을 사용하는 거였나.’

발광체의 움직임은 루멘 정도의 스피드가 아니면 회피가 불가능했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공격을 직접 감당해 본바, 마력 장막은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발광체가 작아 몇 개 맞는다고 죽진 않겠지만, 치유술을 사용할 수 없다면 과다 출혈로 쓰러지게 될 터. 높은 치유력을 자랑하는 가르엘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기라면 그의 상처를 즉시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엘이 겪는 고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 몇 번이고 끔찍한 아픔을 인내해야 하리라.

“……금방 끝낼게.”

괴로웠으나, 가르엘에게 해 줄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전혀 유쾌하지 못한 현실에 절로 얼굴이 굳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을 위해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한 그가 문을 가리켰다.

“되도록 다 함께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문에 적힌 숫자가 너무 잘 보여서.”

새로운 출구의 위에는 보란 듯이 숫자 ‘2’가 새겨져 있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가르엘의 시선이 루멘을 향했다.

“단장님을 부탁하겠습니다, 루멘 경.”

“……제대로 살아남으십쇼.”

“하하! 동료의 응원인가요? 좋네요. 저도 어서 새로운 기사단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싶으니……. 기대에 부응해 보죠.”

잠시 공격을 멈췄던 발광체의 빛이 다시금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가르엘이 카델의 등을 떠밀었다.

“가세요.”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꾹 입술을 깨문 카델이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돌려 출구를 향했다.

카델과 루멘. 두 남자를 앞에 둔 문이 천천히 올라가고. 그들은 번져 오는 섬광을 뒤로한 채 다음 층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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