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루멘 도미닉’의 각성 퀘스트 시작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기사 ‘루멘 도미닉’이 개인 전투에서 승리할 시, 최종 각성이 완료됩니다.]
[실패 시, 각성 퀘스트 소멸. 기사 ‘루멘 도미닉’ 전투 불능.]
전혀 예상치 못한 각성 퀘스트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카델이 변명도 잊은 채 눈을 깜빡였다.
‘개인 전투’에서의 승리라는 것은 곧 루멘을 탑의 최상층에 보내라는 의미였다. 함정과 전투를 치를 순 없을 테니.
만약 그가 엘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퀘스트를 마무리 짓는다면, 최종 각성이다. 드디어 루멘이 S급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대장이 다음 층으로 갈 생각이군. 혼자 마족을 상대할 생각이야.”
“잠깐, 루멘…….”
갑작스런 각성 퀘스트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 카델의 앞으로, 루멘이 성큼 다가왔다.
“또 그 빌어먹을 희생을 하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가 미덥지 못해서?”
“이상한 착각 하지 마. 난 그냥—”
“매번 위험한 일은 혼자 떠맡으려고 하지. 그게 부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 마. 그럴 때마다 이쪽은 네 신뢰를 잃는 기분이니까.”
수많은 가정과 경우의 수가 카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무수한 생각의 고리가 팽팽 회전하며,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다. 차라리 함정이라도 튀어나와 루멘의 입을 막아 줬으면 했으나, 문 앞에 선 후로는 함정이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대장이 원한다면 여기서 끝까지 버텨 주지. 그게 명령이라면 따르겠어.”
“…….”
“그게 네가 생각한 최선이라면, 뜻대로 움직여 주겠다고. 하지만 빤한 최선을 놔두고 남의 안전을 위해 네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라면.”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카델을 직시했다. 카델의 어깨를 지그시 짓누른 그가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던 위협적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난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짧은 한마디에, 미친 듯이 굴러가던 사고 회로가 뚝 끊겼다. 루멘을 비춘 잿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의 각성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목숨의 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실패한다면, 루멘은 물론 이 탑에 있는 동료 전원이 죽게 된다. 루멘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 이건 억지였다.
뒤늦게야 깨달았다. 자신은 이 탑의 공략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공략대로 부하들을 배치했고, 큰 문제 없이 최상층을 코앞에 둘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와서 그 공략을 무시하려 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빌어먹을 희생을 전제하며.
“대답해, 대장.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명령하라고.”
부하들의 안전을 걱정했지만, 걱정하는 만큼 믿었다. 그들이 끝끝내 살아남을 것이라는 걸 믿었다. 부하들도 자신을 믿을 것이다.
그들의 단장이 목숨을 건 희생으로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최선의 선택으로 모두를 올바르게 이끄리라는 걸.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희생을 즐겼다고.’
빙의자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정보와 동료들을 향한 믿음. 선택에 필요한 것은 그 두 가지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질리도록 깨달아 오지 않았는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눈을 내리깐 채 차분히 숨을 골랐다.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의 넌 엘비를 감당 못 해. 도와줄 사람도 없지. 만약 패배한다면, 탑에 남겨진 모두가 죽는다.”
“…….”
“하지만 일평생 휘둘러 온 그 검이 증명해 주겠지. 연약한 마법사보다는 집념 어린 검사의 일격이 승리와 더 가깝다는 걸. 그러니…….”
가볍게 몸을 돌린 카델이 자신이 있던 자리로 루멘을 밀어 넣었다. 다시 루멘을 바라보는 눈동자에선 희생을 결심한 이의 결연함이 아닌, 상대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령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꺼내, 무조건 승리해라.”
최상층의 공기는 다른 어느 층보다 차게 가라앉았다. 깊은 날숨과 함께 퍼지는 입김 너머로, 루멘은 한쪽 벽면을 뒤덮은 ‘심장’을 응시했다.
투명한 얼음으로 감싸진 심장은 푸르스름하게 발광하며 은은한 빛을 뿜었다. 섬세하고 두툼하게 얽힌 혈관이 벽면과 한 몸처럼 붙었고, 규칙적인 박동을 따라 탑의 내부도 묵직하게 진동했다.
저것이 바로 이번 층의 목표. 그가 부숴야 할 ‘악’이었다.
“끄, 끝까지 올라온 게 너야…? 약해 빠져서… 기, 기대도 안 돼.”
최상층에 있는 것은 심장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심장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엘비가 히죽 웃으며 루멘을 조롱했다.
설원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은 그의 등에는 몸집만큼이나 자그마한 암적색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고위 마족의 징표였다.
말없이 엘비를 주시하던 루멘의 신형이 불시에 사라졌다. 잠시 주춤한 엘비가 휙 고개를 돌려 제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반 뼘 빠져나온 검을 납검하며 그를 내려 보는 루멘이 있었다.
무감한 눈동자 위로 엘비의 어깨와 허리를 사선으로 잇는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엘비의 몸뚱이가 섬광의 잔상을 따라 미끄러지듯 무너지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육체가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녹아들어 바닥으로 흡수됐다.
“너, 넌 날 못 죽여. 포기하면 조금쯤은… 편하게 죽게 해 줄지도…….”
당연하게도, 멀쩡한 심장을 두고 엘비가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몸뚱이가 녹아든 자리에서 다시금 울퉁불퉁한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그리고 곧 정열적인 조각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순식간에 엘비의 모습을 갖췄다.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던 루멘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상대할 필요는 없겠군.’
고위 마족의 생명력을 품었기 때문일까. 심장은 아름다운 외관과는 달리 숨 막힐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약한 소년의 외형에서는 느끼지 못한 고위 마족의 힘을, 드디어 직시한 기분이었다.
루멘은 검을 쥔 채 발도술의 자세를 갖췄다. 허리를 낮추고, 구부린 하체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심장을 응시하는 서늘한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사악―
심장을 관통하는 한 줄기의 섬광이 새겨졌다. 모든 힘을 응축시키진 않았다. 이 일 검으로 심장의 강도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섬광의 잔상이 사라진 순간.
쿠르르르릉!
잠잠하던 심장이 요동치며, 루멘이 있는 전방을 향해 충격파를 발사했다.
“큿……!”
“머, 멍청이! 고, 고작 그런 공격으로? 나를?”
비늘 갑옷을 입었음에도 전신에 얼얼한 통증이 번졌다. 이를 악문 루멘이 엘비의 폭소를 무시하며 심장의 상태를 살폈다.
‘……흠집도 남지 않았잖아.’
아무리 힘을 아꼈대도 흠집조차 남기지 못할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좀 전의 충격파는 뭐란 말인가. 공격에 대한 반격? 아니면, 일정 시간마다 반복되는 현상? 뭐가 됐든 이쪽에겐 불리하다.
그런 루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엘비가 소극적인 몸짓으로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내 심장은 머, 멍청하고 약해 빠진 네 공격을 전부 튕겨 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치는 건 너뿐이야……!”
음침한 시선이 루멘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절망을 끌어내고 싶은 눈치였으나, 루멘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공격을 반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심장을 한 번에 깨부술 만한 기술을 구사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소리. 힘을 조절한 공격의 충격파만으로 이 정도의 고통이다. 오래 버틸 순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을 꺼내야 한다.’
한 번에 끝내지 못한다면 승산은 없다. 자신도, 동료들도. 몸을 추스른 루멘이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현재의 자신이 꺼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 그것은 환혹의 숲 이후로 사용한 적 없는 미완성 기술이었다. 하지만 깔끔하지 못한 절단면이 문제였을 뿐, 파괴력 자체는 완성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완벽하게 두 동강 낼 필요는 없어. 부수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마음을 냉정하게 가라앉힌 루멘이 기술을 준비했다.
필요할 때에 딱 맞춰 극의에 도달하는 행운 따윈 바라지 않는다. 전투의 순간, 그가 결코 잃지 않는 것은 한 줌의 냉정. 그 서늘한 감각은 언제나 보다 완벽한 일 섬을 그려 넣을 수 있도록 도왔다.
‘두 번은 안 돼.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움켜쥔 검에서부터 나지막한 공명음이 울렸다. 철저하게 응축된 검기가 폭발 직전의 힘을 얇은 막 안에 담아냈다. 이 모든 힘을 일격에 쏟아붓는다.
월광쾌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섬광이 심장을 통째로 가로질렀다.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양의 기운이, 어둠보다도 고요하게 잔상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드득.
심장을 덮은 얼음에 얇은 균열이 일며.
“머, 멍청해.”
탑을 흔들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내부를 통째로 휩쓸었다.
“커헉……!”
거대한 해머에 전신을 타격당하듯, 충격파에 떠밀린 루멘의 몸이 반대편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총알처럼 쏘아진 몸뚱이가 차가운 얼음벽에 처박히고. 반동에 튕겨 나온 고개 아래, 한 움큼 핏물이 쏟아졌다.
“그러게 그냥… 포기하랬잖아.”
뒷짐을 진 엘비가 저 멀리 날아간 루멘을 살피며 얄미운 웃음소리를 냈다.
벽 안쪽에 깊숙이 처박힌 루멘은 죽은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찢어진 머리에선 피가 흘렀고, 몸에서는 산산이 부서진 갑옷의 파편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루멘을 삼킨 벽면이 천천히 재생하며 그의 몸을 얼음으로 뒤덮어 갔다. 마구잡이로 짓뭉개진 육체에 살기등등한 냉기가 파고들었다. 그제야 피로 축축해진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느리게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초점 흐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실패. 그것만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카델의 경고가 귓가를 왕왕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