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표기되었던 루멘의 체력은, 그가 죽음의 목전에 있음을 알렸다. 그는 기어코 한계를 뛰어넘었고, 그리하여 모두를 살렸다. 이것이 그 결과였다.
하얗게 질린 채 숨을 헐떡이던 카델이 성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로 올라갈 방법은 없는 건가?’
탑이 완전히 무너지면 루멘은 확실하게 죽는다. 그가 탑의 잔해에 깔리기 전에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붕괴된 천장 너머로는 위층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갈 출구도 마찬가지.
‘이러면 올라가기는커녕 내려가지도 못하잖아!’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위에서는 바위 같은 얼음 조각들이 뚝뚝 떨어졌고, 점점 쓰러지는 탑을 따라 바닥도 기울어졌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내려 했으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어떻게 죽어서까지…….”
빌어먹을 엘비를 향해 한바탕 욕을 지껄인 카델이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천장과 바닥, 벽 너머는 그저 무저갱의 어둠뿐. 저곳에 들어간다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자신에겐 방법이 없었고, 시간 또한 부족했다. 그렇다면 남의 도움을 빌리는 수밖에. 결정한 그가 목걸이의 펜던트를 움켜쥔 채 쿤라의 이름을 외쳤다.
“빨리 우리 좀 살려 봐요!”
그가 다룰 수 있는 쿤라의 힘의 종류는 제한적이다. 역량 밖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힘의 주인을 직접 불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카델이 마력을 주입하자, 펜던트가 붉게 빛나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 초 뒤.
“……호오. 이 몸이 눈을 돌린 사이에 제법 흥미로운 일을 겪었나 보군.”
카델의 앞으로, 인간형의 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뒷짐을 진 채 무너지는 탑을 느긋하게 돌아보던 그가 제 어깨를 다급히 낚아챈 카델에게 시선을 두었다.
“서둘러야 해요. 탑이 무너지기 전에 제 동료들을 빼내야 합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어요?”
“내부가 특수한 결계로 막혀 있는 듯한데.”
“알고 있냐고요!”
성마른 재촉에 쿤라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빛냈다. 카델을 향한 얼굴에선 불쾌함이나 짜증이 아닌 황당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내 살다 살다 인간에게 호통을 듣는 날이 오는구나.”
“…….”
“물론 알고 있다. 꽤 공을 들인 결계이긴 하나, 이 몸에겐 어린아이 장난일 뿐이지. 네게 나눠 준 힘만으로도 해제가 가능할 듯싶군.”
“부탁할게요. 서둘러 주세요.”
루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조금씩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후회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게 됐다. 차라리 그때 자신이 올라갔다면. 끝까지 고집을 부려 루멘을 남겨 뒀다면.
‘제발 살아 있어 줘.’
카델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쿤라의 작업이 시작됐다. 송곳니를 세워 자신의 엄지를 물어뜯은 그가 방울지며 차오른 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핏방울이 은은하게 발광한다 싶더니, 빠르게 바닥에 스며들며 문양을 그려 넣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진. 쿤라는 그 위에 손바닥을 펼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 기운을 따라 적색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날리며, 눈동자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백색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아내듯 부드럽게 굴러가다, 어느 지점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반쪽이.”
다음 순간, 광대한 폭음과 함께 탑의 벽면이 터져 나갔다. 좀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한 진동이 바닥을 두드리며 다리에 힘을 준 보람도 없이 몸이 흔들렸다.
결국 가파르게 기울어지는 경사를 감당하지 못한 카델이 바닥을 굴렀다. 붙잡을 곳 없이 끝을 모르고 미끄러지다,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 나가듯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렇게 헤쳐 나온 폭발의 연기 너머.
“어…….”
간신히 확보한 시야 속으로, 무너지는 탑과 광활한 설원의 풍경이 들어찼다. 모든 장면이 느리게 스쳐 갔다. 흩어지는 얼음 파편과 강한 눈발,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새하얀 설원의 바닥.
카델은 추락하고 있었다.
“우와악! 사, 살려―”
갑작스러운 추락에 놀란 카델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젓기 무섭게, 날쌔게 날아든 무언가가 그의 몸을 받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채 숨을 멈추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계를 해제했으니 알아서 빠져나오겠지. 떨어지는 녀석은 받아 주마.”
추락하던 카델을 받아 낸 이는 쿤라였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쿤라는 적룡의 본래 모습 그대로, 거대한 양 날개를 펄럭이며 탑의 주변을 비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쿤라의 등 위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델이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죽는 줄 알았네…….”
“이 몸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 팔아먹은 거냐?”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쿤라가 갑작스레 고도를 낮춰 하강하기 시작했다. 훅 기울어지는 각도에 쿤라의 비늘을 움켜쥔 카델이 바짝 몸을 숙였다. 그렇게 등에 딱 달라붙어 급강하를 감당하고 있으려니, 서서히 늦춰지는 속력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가르엘?”
막 떨어지던 것을 쿤라가 받아 낸 듯, 적룡의 등에 안착한 가르엘이 당황한 얼굴로 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 괜찮아?”
“물론이죠.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도 않았는데요.”
다행히 가르엘은 걱정했던 것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단복이 조금 찢어지기는 했으나, 상처의 흔적이 많지는 않았다. 가르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카델의 상태를 살피던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탑이 무너지는 걸 보면 무사히 마족을 해치운 것 같은데. 큰일을 해낸 것치곤 눈에 띄는 부상은 없네요. 다행입니다.”
가르엘의 미소에도 카델은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카델이 엘비의 심장을 부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부순 게 아니야.”
“네?”
“내가 아니라 루멘이―”
카델이 사실을 정정해 주려던 찰나, 멀리서부터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카델!”
라이돈이었다. 그는 멀리서도 보이는 활기찬 미소와 함께 빠른 속도로 쿤라에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험악한 표정의 반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쿤라를 따라잡은 라이돈이 자연스럽게 그의 등에 안착했다.
“내가 반까지 끌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자기? 어찌나 반항이 심하던지!”
“네놈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손을 대니까 기분이 나빴단 거다. 단장, 어디 다친 덴 없어요?”
반도 라이돈도, 겉보기에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전투의 피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에 안도하면서도, 카델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하나둘씩 모이는 단원들 사이에서, 아직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 다들 상처가 있다면 제게 보여 주세요. 아주 다정하게 치료해 드릴 테니까요.”
“필요 없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위를 올려다보아도. 탑을 빠져나오는 루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델은 떠들썩한 부하들을 뒤로한 채 쿤라의 목덜미 쪽으로 이동했다.
“쿤라, 마지막 한 명이 안 보여요. 이미 떨어졌는데 놓친 거 아니에요?”
“어이가 없군. 이 몸이 인간 하나를 못 받아서 떨어뜨릴 것 같나? 아직 나오지 않은 거야.”
아직 나오지 않았다니. 탑의 결계가 깨지고 빠져나올 구멍이 생겼다. 그런데도 탈출하지 못했다는 건, 그가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의식을 잃은 건가? 아니면 설마…….’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색이 된 카델이 다급하게 라이돈을 불렀다.
“루멘이 아직 안에 있어, 라이돈. 최상층으로 가서 루멘을 데려와 줘.”
“음? 최상층?”
“엘비의 심장을 부순 게 루멘이야. 심하게 다쳤을 거야. 빨리 빼 오지 않으면 위험해.”
카델의 심상찮은 태도에 다른 부하들 역시 조금씩 표정을 굳혔다. 모두가 심장을 부순 것은 카델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기에, 최상층에 남겨진 이가 루멘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절박한 카델의 눈빛에 라이돈도 더 캐묻지 않고 곧장 최상층을 향했다. 쿤라의 몸집으로는 탑 안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나머지는 최상층의 아래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루멘!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 거 몰라? 대체 어디서 뒹굴고 있는 거야?”
최상층은 가장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만큼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라이돈은 미끄러지는 얼음덩이들을 피하며 루멘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의 시야 끄트머리로 익숙한 실루엣이 걸렸다. 루멘은 홀 외곽까지 밀려나 있었다. 조금만 있었다면 아예 바깥으로 튕겨 나갔을 터였다.
“아하하! 진짜 심하게 다쳤나 보네? 무슨 일을 당했길래 이렇게―”
단숨에 루멘의 앞으로 날아간 라이돈이 평소처럼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으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루멘을 내려보는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루멘?”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던 라이돈이 이내 완전히 굳은 낯으로 쓰러진 루멘을 안아 들었다. 곧장 탑을 빠져나간 그가 다급히 쿤라의 위치를 찾아내고는, 최고 속력으로 비행했다. 가르엘에게 고정된 그의 눈빛이 혼란과 충격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