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3화 (25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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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군, 마밀. 나의 벗이여.”

제국 황제의 알현실.

데릭 오스마는 맞은편에 앉은 마밀 키파를 응시하며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표정에선 오랜 친우를 만난 반가움과 그와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반면 데릭을 마주한 마밀의 얼굴에선 성가시고 귀찮은 상대를 향한 무성의한 짜증스러움이 비칠 뿐이었다.

“벗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요, 폐하. 즐겁지도 않은 과거 얘길 지껄일 생각이라면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국의 황제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격식이 없었고, 직설적이며 무례한 언행이었다. 하지만 알현실 안에 그를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데릭은 그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9성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던데. 한계 없이 성장하는 모양이야. 축하하네.”

“왜, 남의 나라로 떠나더니 승승장구하는 꼴이 마뜩잖은가 봅니다?”

“그럴 리가. 순수한 축하라네. 벗이 성장하는 모습은 언제나 기쁘거든. 마이뉴 왕국의 국왕이 자네에게 차고 넘치는 대우를 해 주길 바라.”

“가증스럽긴.”

사납게 혀를 찬 마밀이 아예 팔짱까지 낀 채 다리를 꼬았다.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 데릭의 눈에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이었다.

“자네가 자진해서 제국 파견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 놀랐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

“폐하의 악몽 같은 상판을 보러 온 건 아닙니다. 전 아직도 폐하를 용서하지 못했으니, 그딴 역겨운 기대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요.”

“……용서를 원한 적은 없네.”

마밀은 금방이라도 황제를 공격할 듯 흉흉하게 눈을 부라렸으나, 끝끝내 분노를 눌러 참았다. 깊게 호흡한 그가 데릭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 제자 놈이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길래 보러 온 것뿐입니다.”

“……제자? 자네에게 제자가 있었나?”

“카델 라이토스.”

마밀의 단호한 목소리에 데릭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관계에 표정 관리조차 못 하는 데릭을 바라보며, 마밀은 냉랭하게 눈을 빛냈다.

“함부로 건들 생각 마십시오, 폐하. 당신의 질척거리는 정치 문제에 내 제자를 장기말로 쓸 생각도 말고. 그 아이가 그걸 원한대도 받아들이지 마십쇼. 내 제자까지 젠가 같은 최후를 맞게 한다면, 그땐 정말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한 자, 한 자 눌러 씹듯 읊조리는 마밀의 앞에서, 데릭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넋을 잃은 듯 탁해졌던 눈빛에 천천히 이채가 감돌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릭이 낮은 헛웃음을 뱉으며 설설 고개를 저었다.

“우리 셋은 정말이지 지독한 인연으로 얽혀 있군그래.”

“괜히 엮지 마시죠. 폐하와 저의 인연은 당신이 젠가의 죽음을 택한 그날 끊어졌습니다. 카델 라이토스는 젠가가 아니니, 지금도 여전히 끊어진 채죠.”

“……젠가를 많이 닮은 아이던데. 그래서 거둔 건가?”

“생긴 거나 닮았지, 속은 능구렁이 같아서 그다지 닮은 구석도 없는 놈입니다. 그러는 폐하는 젠가를 닮아서 녀석을 끌어들인 겁니까? 염치도 없이 다시 그 핏줄을 쥐어짜 연명하려고?”

신랄한 비난에 데릭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는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어내며 느리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일련의 행동에 데릭의 얼굴에선 가면이 벗겨지듯 지독한 괴로움이 아른거렸다. 마밀은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날 선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기회를 얻고 싶었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카델 라이토스라는 존재가, 하늘이 내게 건넨 마지막 기회 같았거든.”

“…….”

“그 아이를 제국을 위해 희생시킬 생각은 없네.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막아야겠지.”

제국의 황제에게서 보일 리 없는 유약함이 데릭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제국을 이끄는 황제가 아닌, 고해성사 하는 죄인처럼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마밀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데릭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갑게 일갈했다.

“끝까지 빌어먹을 욕심을 부리는군.”

“……알고 있네.”

“폐하의 뜻이 어떻든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신경 쓰는 건 카델, 그 아이의 신변뿐이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마밀이 데릭이 앉은 테이블을 짚고 위협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 데릭. 친우의 목을 베어 가면서까지 지킨 이 더러운 땅덩어리, 한순간에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허튼 짓거린 꿈도 꾸지 말게. 우리에게 다음은 없어.”

명백한 협박이었으나, 데릭은 이번에도 마밀의 무례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마밀은 그런 데릭을 뒤로한 채 망설임 없이 알현실을 벗어났다.

‘재수 옴 붙은 놈하고 대거리하려니 나까지 재수 없어진 기분이구만.’

얼굴 한가득 ‘아니꼬움’을 써 붙이고 다니는 마밀에게 말을 붙여 오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전무했다. 무심하고 권태로운 인상에 성질 더러워 보이는 표정, 마이뉴 왕국의 대마법사라는 위엄까지 합해지니 그에게는 범접 불가한 오라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서 고요해진 성내를 가로지르던 중. 이대로 이 구역질 나는 성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머릿속으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만 걷고 이쪽 좀 봐.]

갑작스러운 환청에 멈칫한 마밀이 걸음을 멈추고. 굳은 낯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 끝에, 기둥 뒤에 반쯤 숨어 반갑게 손을 흔들어 대는 카델과 라이돈의 모습이 걸렸다.

“마밀 님이 제국에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인연의 종이에 적힌 걸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현재 카델과 라이돈은 마밀이 묵는 여관의 객실에 있었다. 환혹술 없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밀이 성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 역시 성내에 묵고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다행히도 마밀은 따로 방을 구해 지내는 중이었다.

“난 원래 이곳저곳 잘 돌아다닌다. 제국이라고 못 올 건 없지. 그러는 너야말로 제국의 기사까지 됐으면서 왜 좀도둑처럼 숨어든 게냐? 머리랑 눈 색은 왜 그 모양이고.”

마밀은 카델과 라이돈의 앞에 차를 한 잔씩 놓아 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카델을 향한 시선엔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에 건네받은 차를 홀짝이던 카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머리랑 눈은 마도구를 착용해서 그래요. 사정이 좀 있거든요. 여기도 스승님 보고 싶어서 몰래 온 거라, 들키면 안 돼요.”

머쓱함을 숨기는 애교 섞인 대답에 라이돈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라이돈의 불만스러운 눈길이 마밀을 향했으나, 그는 여전히 권태로운 눈빛으로 카델을 빤히 응시하다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여전히 뻔뻔스러운 놈이로군. 원하는 게 있어 온 거겠지.”

“스승님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시다니……. 이러시면 이 철없는 제자 놈은 반발심으로 원래 목적에도 없던 요구 사항을 내놓을 수밖에 없잖아요. 속상합니다.”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린 카델이 품 안에서 꺼낸 종이 한 장을 쓱 내밀었다. 라이돈이 그려 주었던 기회의 풀 그림이었다.

속셈을 숨길 노력도 없어 보이는 행태에 마밀이 코웃음을 치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꼭 필요한 약초예요. 말씀드리는 게 늦었지만, 지금 제 부하 한 명이 의식 불명이거든요. 치유술로도 고칠 수 없는 위독한 상태라……. 그 약초가 있다면 눈을 뜰 수 있을지도 몰라요.”

“…….”

“마밀 님이라면 어디서 자라는지 정도는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찾아왔습니다. 꼭, 정말 꼭 필요해요.”

본론을 꺼내는 카델의 눈동자에 금세 간절함이 맺혔다. 마밀은 그런 카델을 일별하곤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두었다.

짧은 침묵 뒤에, 그는 종이를 던지듯 내려 두며 팔짱을 꼈다.

“이건 자라는 약초가 아니다. 만드는 약초지.”

“만드는 약초요……?”

“기본 베이스가 되는 재료는 이 그림에 그려진 약초가 맞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아. 귀한 약재의 효력을 극대화할 복잡한 연금술이 필요하지. 그게 가능한 인물은 세계 전체를 뒤져도 몇 없을뿐더러, 가능하대도 만드는 데만 1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마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카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기회의 풀이 그렇게나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니. 게임 속에선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더욱 참담한 심경이었다. 이 세계가 게임과는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런 식의 불리한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매번 속이 뒤집혔다.

눈을 내리깐 카델이 입을 앙다물며 차오르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럼 마밀 님에겐 이 약초가 없다는―”

“있다.”

“……예?”

“예전에 경험 삼아 만들어 놓고 묵혀 뒀던 게 하나 있지.”

마밀의 무심한 목소리에 카델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밀은 금방이라도 약초를 달라며 매달릴 것처럼 다급한 카델의 앞에서 평온하게 말했다.

“말했듯이 귀하디귀한 약초다. 그냥 얻어 갈 생각은 마.”

“무, 물론이죠! 이거 다 가지세요.”

카델은 가방 안에서 허겁지겁 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지금껏 그가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모아 두었던 마족의 뼛가루였다. 마밀은 자연스럽게 그 뼛가루를 회수하고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카델의 눈을 응시했다.

“고작 이걸로 퉁 칠 생각이냐? 한참 부족하지.”

“앞으로도 모이는 대로 드릴게요!”

“흐응, 욕심 많은 인간이네. 그렇게 살면 지옥 가. 그냥 내놓지 그래?”

마밀은 라이돈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회의 풀을 내놓기에는 대가가 턱없이 적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뭘 더 줘야 하는 것일까. 뼛가루 이외에 마밀이 원하는 게 뭐였더라. 그런 게 있긴 했나.

그렇게 울상이 된 카델이 팽팽 머리를 돌리고 있을 무렵. 뼛가루의 상태를 확인하던 마밀이 불쑥 말했다.

“지금 네 경지가 7성 수준이었던가?”

“……아, 네.”

“저번에 봤을 때도 7성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전투를 치러 놓고 아직까지 성장을 못한 게야?”

이게 진짜 게임도 아니고, 좀 싸운다고 그렇게 쉽게 경지가 오르겠는가. 갑작스러운 시비에도 대꾸를 못 하며 억울함만 품고 있으려니, 그가 말을 이었다.

“네 성장을 대가로 하마.”

“……예?”

“고작 7성의 경지로는 마족을 상대하는 데 무리가 있지. 제국의 기사가 됐으니 앞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게 될 텐데, 그때마다 목숨을 건 마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순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목표는 8성이다. 내 지난 경지만큼 올라오거라.”

뼛가루를 품에 챙겨 넣으며 말하는 마밀의 태도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간단하게 경지를 올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7성으로 올라간 것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증폭의 풀을 손에 넣은 덕이었는데.

“그, 혹시 8성이 될 때까지 약초는 안 주시는 건가요……? 제 부하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요.”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실전이 아닌 이론이야. 어느 정도 이론을 깨우치면 금세 성장할 수 있을 게다. 읽어야 할 서적을 구해다 줄 테니, 그걸로 공부해라.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면 약초는 미리 주도록 하마.”

“시험 날짜는요?”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판단되면 바로 치르지.”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시험에 합격해 기회의 풀을 얻고 돌아가야 했다. 카델은 순식간에 의욕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다.

“당장 공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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