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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이돈의 가르침에 대한 기대는 1할도 되지 않았다. 저 녀석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지식을 베풀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고, 진지하게 임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라이돈은 카델을 가르치는 데 의욕적이었다. 어서 그의 공부를 끝장내겠다는 욕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상외의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잖아, 카델. 이 술식은 광범위 마법보단 단일 공격 마법에 응용하는 게 나아.”
“하지만 이 술식을 여러 개 띄우면 단일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광범위 마법이 가능…….”
“흐응,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지 않… 나…?”
“불가능해! 쓸데없는 마력 낭비야!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상식도 모를 수 있어, 카델?”
라이돈에게 상식을 지적받는 날이 올 줄이야. 카델은 진심으로 막막하다는 듯 푹푹 한숨을 쉬어 대는 라이돈을 티 나지 않게 흘기며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유아기 때나 배웠던 간단한 이론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라이돈은 카델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쾌하고도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이런 게 경험의 차이라는 걸까.
생각해 보면 라이돈의 마법은 언제나 제대로 된 화력을 발휘하며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번도 마법을 실패한 적 없던 녀석이다. 가벼운 행동에 가려져 잘 실감하지 못했지만, 라이돈 또한 카델과 비슷한 수준의 천재였다. 심지어 기본적인 이론까지 빠삭한 완전체.
‘아무리 그래도 라이돈한테 이런 대접이라니. 묘하게 속상하단 말이야.’
사심을 빼고 수업에만 집중하려 해도, 너무 낯선 라이돈의 엄한 태도에 조금씩 주눅이 들었다.
“이 화염 마법의 운용법도 마찬가지야. 카델은 다속성 마법사잖아? 그럼 이 마법진의 술식을 조금만 변형해도 훨씬 강력한 다속성 마법을 시전할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렇지.”
“그런데 왜 이걸 그냥 화염 마법으로만 암기한 거야? 외우기만 해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설마 지금까지 이 모든 이론을 적힌 대로만 받아들인 건 아니지?”
“그, 그건…….”
“카델은 효율을 사랑하잖아? 그런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었다고?”
“그게…….”
공부는 원래 암기 위주 아닌가. 암기만 제대로 한다면 시험에 불합격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돈은 시험을 넘어 카델이 모든 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변형시키기를 바라는 듯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델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며 우물쭈물거렸다. 슬쩍 살핀 라이돈의 얼굴에선 미소 한 점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깐깐하고 엄격한 교육자처럼 근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에 한층 더 기가 죽은 카델이 고갯짓으로 자신의 비효율적인 공부법을 긍정하자, 나지막한 탄성이 들려왔다.
“아아, 이래서 언제 시험을 치를래? 우린 여기서 벗어날 수 있긴 한 거야?”
“……미안.”
“카델, 나한테 사과해서 뭐 해? 뭘 사과하고 싶은 건데? 정말 미안하긴 한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라이돈의 타박에 카델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한껏 시무룩해진 그가 중얼거림에 가까운 사과를 반복하자, 라이돈이 냉랭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정말 미안하면, 뽀뽀 한 번 해 줘.”
“……뭐?”
“미안함을 몸으로 보여 달란 말이야.”
갑자기 여기서 뽀뽀가 왜 나오는 것인가. 이상함을 감지한 카델이 눈을 들자, 입가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는 라이돈의 얼굴이 보였다. 그를 발견한 카델이 확 미간을 구겼다.
“너……!”
“아하하! 고분고분한 카델 완전 웃기잖아! 내가 못되게 굴어서 섭섭했어? 응?”
“……꺼져.”
카델은 라이돈이 일부러 엄한 선생을 연기하며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한 웃음소리에 지금껏 위축되었던 감정이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라이돈은 완전히 몸을 돌려 버린 카델의 어깨를 잡아당겨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그러고는 짜증 가득한 카델의 뺨 위로 마구 입을 맞췄다.
“카델 귀여워!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꺼져. 짜증 나.”
“으응, 싫어. 영원히 안 떨어질 거야.”
“사람 놀리니까 재밌냐?”
“최고로 재밌던데!”
마구 팔을 휘둘러 라이돈을 힘껏 밀쳐 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더욱 바짝 달라붙은 라이돈이 카델의 양 뺨을 한 손으로 눌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미간을 잔뜩 구긴 카델이 진심으로 성을 냈지만, 참새처럼 벌어진 입술로는 제대로 된 발음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카델의 얼굴을 장난스레 바라보던 라이돈이 앙증맞게 벌어진 그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제 입을 맞댔다.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라이돈은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응시한 채, 맞물린 그의 입새로 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불가항력으로 들어차는 공기에 카델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얼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뺀 라이돈이 통통하게 부푼 뺨을 토닥이며 입술을 뗐다. 입안 가득 찬 숨결을 멍하니 뱉어 내는 카델의 앞에서, 라이돈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우리 자기 야한 얼굴은 다른 인간한테 보여 주기 싫으니까.”
다른 인간이라니. 얼떨떨해진 카델의 시선이 움직이는 라이돈의 고개를 따라 이동하고. 그곳에는, 저번부터 기막힌 타이밍만 노려 등장하고 있는 마밀이 있었다.
그는 무기력한 낯으로 실실 웃는 라이돈과 경악한 카델을 살피더니, 마찬가지로 기력 없이 중얼거렸다.
“염병을 떨고 있구만.”
시험은 그로부터 정확히 닷새 뒤 치러졌다. 그동안 카델은 밤잠도 아껴 가며 미친 듯이 서적을 탐독했고, 라이돈과 마밀의 도움을 받아 각종 이론의 응용과 심화를 깨우쳤다.
카델은 스스로 부여한 제한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네.”
“그럼 필기시험부터 시작하마.”
마밀은 긴장한 카델의 앞으로 총 열 장의 시험지를 건네주었다. 전부 마밀이 직접 출제한 문제들이었다. 카델은 시험지를 빼곡히 채운 문제의 양에 당황했으나,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아는 문제라면 몇 개라도 풀어낼 자신이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다. 그 안에 풀어라.”
“예? 겨우 한 시간이요? 시험지는 열 장인데? 스승님, 양심이…….”
“이제 59분이다.”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카델은 속으로나마 분을 삭이며 시험지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마밀은 그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아 카델을 지켜보았다. 라이돈은 시험 내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산책을 빙자한 퇴출을 당한 상태였다.
‘우와, 심지어 전부 주관식이야? 미쳤네.’
빠르게 문제를 훑어내린 카델이 미간을 좁혔다. 요구되는 답변이 전부 주관식일뿐더러, 정답이 단답형인 경우는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난이도에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다.
‘침착하자, 침착해. 이것도 일종의 전투야. 허점을 보여선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공부를 했다. 보지 않은 이론은 없었고, 술식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부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전투적인 기세로 펜을 잡은 카델이 술술 답을 적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적은 답을 되돌아볼 여유는 없었고, 지식을 뱉듯이 적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문제의 답까지 작성을 완료하자.
“끝났다. 시험지 내놓거라.”
“하, 한 번만 점검을…….”
“안 돼.”
질척하게 매달리는 카델을 떨쳐 낸 마밀이 단호하게 시험지를 챙겨 갔다. 곧장 채점이 이어지리란 예상과는 달리, 시험지를 가방에 넣은 마밀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서며 말했다.
“10분 쉬고 있거라. 바로 실기 시험을 칠 거니까.”
시험지 10장을 한 시간 안에 풀게 했으면서 고작 10분을 쉬게 한다니. 카델은 악독하기 짝이 없는 마밀의 행태에 고요히 분노하며, 라이돈이 챙겨 주었던 사탕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칼같이 돌아온 마밀의 손에는 정체불명의 물건이 가득 담겨 축 늘어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카델은 제 앞으로 배달된 가방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은 주먹만 한 돌덩이와 표면이 축축하게 녹은 얼음덩이들이었다.
“이번에는 두 시간을 주마. 최소한의 마력, 최대한의 운용으로 장미꽃과 학을 조각하거라.”
“조각이요……?”
“바위로 조각하든 얼음으로 조각하든 마음대로 해. 네 변덕스러운 마력 속성이 그새 또 바뀌었다지만 화염과 바람은 그대로니. 그 안에 든 재료들은 전부 사용해도 좋다.”
살면서 해 본 적도 없는 조각을 하라니.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자신의 없느니만 못한 절망적인 손재주를 떠올린 카델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으나, 마밀에겐 먹히지 않았다.
“아름답게 만들 필요는 없어. 내가 네 조각에서 보는 건 마력을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는가니까. 물론 부가적인 요소들도 점수에 포함되지만, 어떤 요소들이 포함될지는 네가 직접 생각하거라.”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마밀이 다시 의자에 앉아 카델을 지켜보고. 카델은 제 앞에 놓인 무수한 재료들을 만지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장미랑 학이라고…? 이 둥글둥글한 덩어리들로 어떻게 그걸 만드는데.’
막막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렇다고 포기를 선언할 수는 없었다. 결국 카델은 주섬주섬 재료를 꺼내 조각이란 것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하하! 못생겼어, 카델! 이건 뭐야? 살쪄서 고개를 가눌 수 없게 된 기린?”
카델이 조각에 열중하던 도중 난입한 라이돈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실패작’들을 구경하며 폭소를 금치 못했다. 카델은 애써 라이돈의 놀림을 무시한 채 이젠 얼마 남지도 않은 새로운 돌덩이를 꺼내 들었다.
‘대량의 마력을 조절하는 것보다 소량의 마력에 부분적으로 힘을 주는 게 더 까다로워. 해 보지 않은 종류의 운용이라 그런가.’
재료를 깎는 것은 나름대로 쉬워도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게 상당히 어려웠다. 고작 이런 돌과 얼음을 조각하는 데 공격 마법보다 복잡한 술식이 요구될 줄이야. 그래서 라이돈도 엘비의 ‘마계의 탑’에서 얼음으로 조각된 인형을 보며 감탄했던 걸까.
평생 쌈박질만 하다 갑자기 보석 세공 같은 섬세한 작업에 투입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소동물을 앞에 둔 거인이 된 기분이던가.
기어코 조각하던 돌덩이를 반으로 깨부순 카델이 희번득 눈을 치떴다.
“이런 개 같은……!”
“이젠 하다 하다 내 앞에서 욕까지 하는 게냐?”
“개같이 귀여운…! 돌멩이 같으니라고!”
“용을 쓰는구나.”
조각은커녕 형태 보존만으로도 벅찼다. 그 와중에 시간은 계속 흘러 고작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금세 울상이 된 카델이 서둘러 가방을 뒤져 새로운 얼음덩이를 꺼냈다. 그나마 라이돈이 마밀의 제지를 무시하고 냉기를 일으켜 주어 얼음이 녹아 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라이돈은 얼음 위에 길을 내기 시작하는 희미한 불꽃을 응시하다, 설렁설렁 카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리 가, 라이돈. 집중 안 되잖아.”
“흐응, 자기. 나랑 보냈던 뜨거운 밤들은 전부 잊어버린 거야?”
“뭔 헛소리야.”
“나쁜 학생이네. 이런 조각은 재능보단 기초가 중요한걸. 전부 배웠잖아?”
라이돈은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이미 절반은 녹아 버린 얼음덩이에 손을 올려 새롭게 얼려 주었다. 마밀의 호통을 가볍게 무시한 그가 다시 실패작들의 무덤을 구경하러 떠나고. 새것이 된 얼음덩이를 앞에 둔 카델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기초……. 그래. 이건 시험이야. 공부한 것 이외의 문제가 나올 리 없지. 잘 생각하자.’
모든 마법은 한 가닥의 마력과 한 줄의 술식, 한 줌의 소망에서부터 시작된다.
‘급하게 굴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꺼내는 거야.’
다시금 피어난 불꽃이 마치 붉은 칼날처럼 날카롭고도 조심스럽게 얼음의 표면을 갉아 냈다.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진행되는 조각에, 그를 지켜보던 라이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