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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다.”
각 시험에 대한 마밀의 평가는, ‘머리는 젠가를 닮아 쓸 만하군’이었다. 필기에선 만점을 받고, 실기에선 20점 정도가 깎였다. 하지만 그것도 라이돈의 도움으로 인한 감점이었다. 마밀이 카델에게 합격을 알리자, 카델은 먹던 식사도 멈춘 채 라이돈과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그럼 주시는 거죠! 약초!”
“약속대로 약초는 먼저 주겠다만, 아직 치러야 할 대가는 남았어.”
“주세요, 약초!”
“……이놈이, 사람 말은 듣지도 않는구나.”
제자의 방실방실 웃는 낯이 귀엽긴 했는지, 마밀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약초를 내어 주었다. 약초를 받아 든 카델은 그것을 천으로 조심히 감싸 배낭 안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드디어 루멘을 깨울 수 있어.’
그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던 불안감이 싹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껏 고양된 카델의 뒤에서, 마밀은 따로 챙겨 온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만 기뻐하고, 이거나 보거라.”
“그게 뭔데요?”
“황제의 서신이다.”
“예…?”
갑자기 서신이라니. 게다가 마밀을 통해 보냈다고? 카델이 머뭇거리며 서신을 받아 들자, 마밀이 바로 말을 이었다.
“황제는 네 기사단에게 계속해서 외부 봉인 점검을 시킬 생각인 듯하더구나.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네게 해만 되는 일도 아니지. 해서 내가 직접 네 다음 파견지를 정해 왔다.”
“직접 정하셨다고요? 폐하가 허락해 주셨어요?”
“허락해 줬으니 서신을 썼지.”
마밀이 황제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가. 스토리를 모르는 카델로서는 의외의 인맥이 아닐 수 없었다. 내심 놀라워하며 서신을 펼치자, 그곳엔 마밀의 말대로 기사단의 다음 파견지가 적혀 있었다.
‘잉마르 늪지대인가……. 여길 먼저 가게 되는군.’
잉마르 늪지대. 그곳은 인테 설원과 함께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세 곳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차피 가야 할 곳이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당장 가라는 것도 아니고, 루멘의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가라는 내용이네. 뭐, 나쁠 거 없지.’
신중하게 서신을 읽어 내리는 카델을 바라보며, 마밀이 본론을 꺼냈다.
“널 그 늪지대에 보낸 이유는, 그곳에 네가 먹었으면 할 영약이 있기 때문이지.”
“영약이요?”
“정확히 말하면 ‘심장’이다.”
“시, 심장을 꺼내 먹으라는 거예요? 누구의? 설마 사람은 아니죠?”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야. 늪지대의 중심부에는 심장을 가진 ‘비타’라는 식물이 자라난다. 10년을 주기로 자라나는 식물이지. 늪지대 전체를 통틀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고, 마침 내가 10년 전에 그걸 뽑아 먹었다.”
담백하게 말한 마밀이 카델이 가지고 있던 서신을 다시 뺏어 들고는, 그 뒷면에 식물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지금쯤이면 다시 자라났을 거다. 네가 먹도록 해라.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식물의 심장…….”
“내가 독식하던 걸 넘겨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거라. 그 주변의 마물들은 뭐…… 알아서 처리하고.”
아주 간단하게 식물을 그려 낸 마밀이 카델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그를 본 카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가고. 함께 그림을 구경하던 라이돈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마밀의 그림을 평가했다.
“아하하! 징그러워라! 이건 식물이 아니라 괴물 아니야?”
아무리 흉흉하길 넘어 끔찍하기까지 한 외형을 가졌대도, ‘비타의 심장’은 환혹의 숲에서 먹었던 ‘증폭의 풀’과 똑같은 효능을 가지고 있을 테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바닥의 흙도 퍼먹을 준비가 돼 있는데, 괴식물의 심장이라고 못 먹겠는가.
“다시 만나는 날엔 쓸 만한 마법들을 알려 주마. 그때까지 괜한 일로 몸 축내지 말고.”
“네, 스승님!”
말투에선 성가심이 뚝뚝 묻어 나오나, 카델은 마밀이 자신을 제법 아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싹싹하게 작별 인사를 마친 그가 라이돈이 만든 이동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잘할 수 있지? 내가 알려 준 팁 잊지 마.”
“흐응, 자기. 내가 이런 간단한 마법을 실패할 리가 없잖아.”
이런 간단한 마법을 실패한 전적이 있는 카델이 슬쩍 입을 다물자, 라이돈은 곧장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라이돈의 이동 마법은 그들을 정확히 잉첸 마을의 입구에 데려다주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꼬마의 놀란 얼굴에 대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카델이 서둘러 여관을 찾아갔다.
“반! 가르엘!”
루멘이 있는 객실의 문을 열자,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가르엘과 막 목욕을 마치고 온 듯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반이 보였다. 두 남자는 돌아온 카델과 라이돈을 반기며 외출의 결과를 물었고, 카델은 고이 보관하고 있던 약초를 꺼내 들었다.
“가져왔어. 이제 먹이기만 하면 돼.”
루멘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며칠 묵은 피로마저 가시는 듯했다. 카델은 가르엘에게 약초를 넘긴 뒤, 그가 약초를 먹기 편하게 으깨고 뭉치는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단장, 물 좀 드릴까요?”
“…응? 아니, 괜찮아.”
반은 카델이 거절한 물을 대신 들이켜며 그의 옆에 섰다. 약초를 얻기 위해 뭘 했던 건지, 못 본 새 살이 또 빠진 것 같았다. 반면 함께 갔던 라이돈은 얼굴에 반질반질 윤이 났으니.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속상해진 반이 괜히 카델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가르엘은 잘 으깬 약초를 약간의 물과 섞어 루멘의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액체가 기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털어 넣자, 묘한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
카델이 땀에 젖은 손을 주먹 쥐자 반의 손이 그 위를 덮듯이 감쌌다.
‘제발 일어나…….’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루멘은 눈을 뜨지 않았다.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용히 그의 상태를 살펴보던 동료들은 들어차는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약초가 잘못됐나? 마밀 님이 깜빡하고 다른 걸 줬을 수도 있어. 내가 다시 가 볼게.”
결국 참다못한 카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약초를 먹자마자 금세 깨어날 거라 기대했건만. 여전히 미동도 없는 루멘의 모습을 보니 폭력 같은 두려움이 덮쳐 왔다. 잘못된 것이 약초가 아닌 루멘일까 봐. 뭐라도 대신할 거리를 찾고 싶었다.
가르엘은 금방이라도 떠날 기세인 카델을 일별하곤, 루멘의 가슴을 짚어 마기를 흘려보냈다. 신중하게 루멘의 상태를 살피던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단장님.”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약초, 효과가 있습니다.”
“효과가 있다고? 그런데 왜…….”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 묻는 카델의 다급한 눈빛에, 마기를 거둔 가르엘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약초를 먹기 직전까지 루멘 경 안에 남아 있는 기운은 작은 파편에 불과했어요. 그것마저 사라졌다면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됐겠죠.”
“……지금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늦어도 내일 중엔 눈을 뜰 수 있을 거예요.”
눈을 뜰 수 있다. 그리도 듣고 싶었던 확신 담긴 대답에, 카델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단장!”
옆에 있던 반이 서둘러 카델을 부축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었으나, 그럼에도 카델의 입가엔 안도의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다행이다…….”
루멘을 잃지 않아도 된다. 그가 다시 동료들의 품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기뻤다. 카델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반의 목을 느슨하게 끌어안으며,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이제 좀 쉴래.”
약초가 효과가 있고, 루멘이 무사히 회복 중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누적되었던 피로가 몰려오며 힘이 빠졌다. 카델은 무의식적으로 반에게 매달렸다. 반은 그런 카델을 번쩍 들어 안아 카델의 객실로 이동했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단장? 자고 일어나면 출출할 텐데. 미리 사 올게요.”
카델을 침대에 눕힌 반이 기진맥진해 보이는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에 카델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날 거야. 그때 다 같이 먹자.”
“그래요.”
“너도 쉬어, 반. 일어나면 찾아갈게.”
“……네.”
그리 답해 놓고도 반은 방을 떠나지 않았다. 침대 옆에 앉아 얌전히 눈을 감은 카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작 며칠 보지 못했을 뿐임에도 안달이 날 정도로 그리웠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함께 떠났어야 했나, 절절한 후회가 들 정도였다.
쉴 틈 없이 수련해도, 밥을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을 기어코 비집어 드는 그리움이 황당하기까지 할 따름이었다. 카델을 만지고 싶다는 욕구를 참아 내느라 허벅지에 올려 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피로를 버티지 못해 쓰러진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 감정은 결코 카델보다 우선시 될 수 없었으니.
그런 기특한 마음가짐으로 카델을 바라만 보는 반이었으나, 그다지 쓸모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얼굴 뚫어질 것 같아, 반.”
“아…… 죄송해요, 단장. 신경 쓰였어요?”
당연히 자는 줄 알았던 카델이 슬쩍 눈을 뜨자 반이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순진한 반응에 카델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자나 감시하는 거야? 딴짓 안 해.”
“그런 게 아니라…….”
“응?”
“……보고 싶었어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금세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카델은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반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래도요. 이렇게 며칠씩 떨어져 있던 적은 없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반과 자신이 기억하는 ‘첫 만남’은 달랐지만, 언제부터든 그들은 쭉 함께였다. 이제는 카델 라이토스보다 자신과 함께 한 시간이 더 길지도.
습관적으로 손을 뻗자 반이 허리를 굽혀 다가왔다. 카델은 반의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본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인데.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반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뻣뻣해진 몸을 움찔거리던 그가 카델이 손길을 거두자마자 튕겨 나가듯 뒤로 물러났다.
“저, 저 머리를 덜 말려서… 축축해서 기분 나쁘죠, 단장? 말리고 올게요.”
“딱히 기분 나쁘진 않은데.”
“…….”
“그래도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말리고 와.”
“네!”
쫓아내는 것도 아니건만. 쫓겨나듯 후다닥 객실을 빠져나가는 반의 모습에, 카델이 못 살겠다는 듯 팔로 눈을 가리며 웃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진짜 부끄럼 많다니까.”
남들에게 하는 걸 보면 화낼 때 빼곤 얼굴 붉힐 일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쑥스러움을 타는 것이 재미있었다. 놀리면 안 된단 걸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진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지.’
그때는 어떻게든 자극하지 않으려 안달을 냈으니까. 지금은 부하들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진 탓인지, 그들과 얽히는 데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설마 이것도 카델 라이토스의 영향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만으로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으므로, 카델은 최대한 불쾌한 의심을 배제하기로 했다.
‘빨리 쿤라가 돌아와야 영혼 분리 작업을 시작할 텐데. 그리고…….’
요젠의 습격을 방어하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밀에게 다녀오는 동안에도 별일이 없었기에, 조금씩 불안해지던 참이었다.
반이 떠나자마자 피로 대신 온갖 걱정거리가 몰려온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자, 근심 섞인 잿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태까지 쉼 없이 달려왔음에도 끝없이 쌓여 가는 고난들이 버거웠다. 언제쯤 이 무거운 짐을 던져 버릴 수 있을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막막함에 짜증스레 뒤척이던 카델은,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
아직 바깥은 환한 낮이었다. 창문에 커튼을 치기는 했으나, 완벽히 빛을 차단하진 못해 방 안은 제법 밝은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왜 점점 어두워지지.”
비라도 오려는 걸까? 딱히 그럴 기미는 없었는데. 의아해하며 반쯤 몸을 일으킨 카델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저게 뭐야.”
바깥이 어두워지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있는 방 안이 어둠에 물드는 중인 것이었다. 천장부터 방 안을 적시듯 흘러내리는 진득한 그림자에, 벌떡 일어난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왔구나.’
저 불길한 기운은 의심할 바 없는 ‘암기’였다. 요젠 바르딕타.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하필 지금 등장하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