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지금보다 완벽한 타이밍은 없었다. 마무리된 메인 퀘스트와 회복을 코앞에 둔 루멘. 앞으로 있을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의 짧은 휴식 시간이다. 지금이 지나면 혼자 있는 시간은 현저히 적어질 테니.
‘그래, 이 자식아. 배려 넘치는 등장에 감사한다.’
쉴 시간 아껴 가며 효율을 챙길 수 있게 도와주다니. 고마움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카델은 온통 새까맣게 물든 방 안에서, 긴장에 굳은 눈을 굴렸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 요젠의 기척은 말할 것도 없고. 암실…… 같은 건가.’
언뜻 ‘무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를 둘러싼 것은 온전한 어둠이라기보단 녹아내린 그림자 같았다. 조금씩 발을 뗄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고, 기분 탓인지 묘하게 숨쉬기가 불편했다. 물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암기에 가려졌지만 가구는 그대로 있어.’
손을 뻗으면 침대나 테이블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지긴 해도, 이곳은 여전히 객실 안이란 소리였다. 굳이 이곳을 암기로 뒤덮은 것은, 아마도 부하들 때문이리라.
‘바깥과 이곳을 차단하는 용도인가. ……곧 반이 돌아올 텐데.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난리 나겠어.’
누구에게도 요젠과의 싸움을 예고해 두지 않았다. 단장의 갑작스러운 격리에 부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카델은 자신을 감싼 바람 장막을 강화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예상보다 일찍 왔네, 요젠. 생각이 꽤 빨리 정리됐나 봐.”
원래도 기척이 없는 남자가 본인의 암기 속에 파묻혔으니, 목소리로라도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그런 의도로 슬쩍 대답을 유도했으나, 요젠은 순순히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
질척한 액체처럼 퍼져 있던 바닥의 암기가, 정확히 카델이 선 위치에 두꺼운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구쳤다. 서둘러 물러서는 카델의 걸음걸음을 따라 송곳이 추적하듯 차례차례 솟아올랐다.
‘이런 미친…!’
계속해서 코앞으로 드리우는 살벌한 암기의 자태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장막에 균열이 번져서, 피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마력을 불어넣어야 했다.
송곳은 카델이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벽까지 몰린 후에야 공격을 멈췄다. 카델은 제 바로 앞에서 꼿꼿하게 몸을 세운 송곳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통으로 맞으면 무사하지 못하겠는데.’
이쯤에서 습격을 막았다고 쳐주면 안 될까. 소박한 바람을 품은 채 송곳과 벽 사이에 낀 몸을 빼냈다.
‘방 전체가 요젠의 덫이나 마찬가지야. 오래 머무를 순 없어.’
목소리로 위치를 유추하는 얕은수는 먹히지 않는다. 요젠이 진심으로 자신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이쪽도 진심으로 응해야 했다.
‘일단은 요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하자.’
도드라지는 힘으로 암기를 헤집는다면 금세 발각될 것이다. 그러니 암기만큼이나 은밀하고 고요한 마력이 필요했다.
‘불은 당연히 탈락이고. 이렇게 정적인 공간이라면 바람도 티가 나.’
그렇다면 남은 건 암흑 마력뿐. 가볍게 손끝을 구부리자 검은 안개가 일렁이며 바닥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카델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암흑 마력을 방 전체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공격은 내가 요젠을 불렀을 때 시작됐어. 혹시 요젠도 내 위치를 정확히 모르나? 여전히 눈을 가린 상태라면 그럴 수 있지. 만약 이쪽에서 먼저 기척을 내야 공격할 수 있는 거라면……. 아니, 아니야. 그 자식은 사람 숨소리로 감정 상태를 파악하던 놈이야. 내 위치를 파악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겠지. 애초에 이 암실을 만든 것도 요젠이니까.’
그러니 암실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공격의 주도권은 계속 요젠에게 있을 것이다. 암흑 마력이 충분히 퍼진 것을 감지한 카델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학습 능력 없는 사람처럼 떠벌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나도 생각을 해 봤거든. 이 ‘습격’이란 게 꼭 필요한 과정일까? 내 권유에 답변하러 온 거라면 그냥 말만 하면 되잖아? 거절한다고 내가 무력을 행사할 것도 아닌데. 너무 정 없지 않아?”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요젠의 주의를 끌었다. 암흑 마력이 아무리 은밀하다 한들, 촉각을 곤두세운 암살자를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가 마력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집중력을 최대한 흩뜨려야 했다.
“대화로 해결 보는 게 어때. 괜히 서로 피 보는 일 없이 깔끔하게! 응? 네가 생각해도 그쪽이 더 나을 것 같……!”
목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살기가 뻗쳐 왔다. 총탄처럼 날아든 암기가 사정없이 장막을 두드리며 카델의 몸을 흔들어 댔다. 카델은 그 자비 없는 공격에 경악하면서도 꿋꿋하게 입을 놀렸다.
“내 기사단에 입단하면 말보다 몸이 앞서는 이 야만적인 습성부터 고쳐야 할 거야!”
그리 외친 카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퍼뜨린 마력 줄기에 걸린 요젠의 위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사된 화염구가 암실의 구석을 향하고. 묵직한 폭음과 함께, 장막을 두드리던 암기가 멈췄다.
공격의 결과를 기다릴 틈은 없었다. 카델은 암기의 기세가 주춤한 때를 놓치지 않고 화염구를 날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대로 요젠을 붙들어 공격을 끝내게 할 작정이었다.
화염의 잔재 속으로 뛰어들 듯 몸을 날리자, 곧 단단한 무언가가 손아귀에 잡혀 들었다. 희미한 불꽃 속에 파묻힌 그것은 분명 요젠이었다. 그러나 카델이 요젠의 얼굴을 확인한 바로 그 순간.
케인슈타인 백작가에서처럼, 요젠의 얼굴이 검게 녹아내렸다.
‘또 바꿔치기를…?’
화염구를 맞기 직전에 위치를 바꾼 모양이었다. 미간을 구긴 카델이 다시금 마력을 퍼뜨리려 했으나.
“……?”
요젠의 분신이 녹아내리며, 흘러내린 암기가 잡아먹을 듯이 카델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조금 전 요젠을 붙들기 위해 부분적으로 해제했던 장막의 틈으로 스며든 것이다.
피부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감각에 몸을 털었으나, 그럴수록 암기는 더욱 빠르고 음습하게 파고들었다. 뒤늦게 장막을 보강해 봐도 한 번 뚫린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기분 나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살기가 느껴졌고, 누군가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듯 암기에 닿은 피부가 따끔거렸다. 아무리 용을 써도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암기에 카델이 표정을 굳혔다.
‘요젠이 가진 대부분의 기술은 암기가 바탕이야. 이렇게 온몸에 암기가 들러붙으면 사방에 칼날이 드리워진 거나 다름없다.’
떨쳐 내지 못한다면 필시 패배로 이어진다. 아니, 그전에 요젠이 진심으로 이쪽을 해치려 든다면, 최소 중상이었다. 겨우 루멘을 살려 냈더니 다음엔 단장이 혼수상태라니.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둘 순 없다. 몸에 상처가 남더라도 달라붙은 암기를 떼어 내는 수밖에.
결단을 내린 카델이 화염 마력을 끌어 올리고, 몸을 감싼 암기 위로 불꽃을 들이부으려던 순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를 속박하던 암기가 순식간에 물처럼 흘러내리더니, 다시금 요젠의 형태를 갖췄다. 그는 불꽃을 품은 카델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리며 가깝게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경계 어린 카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른거리는 불꽃 위에서, 그의 눈을 가린 흰 붕대와 정갈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음영이 졌다.
“난 네가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하길 바랐던 것뿐이니까.”
“……아직 네 공격에 당하지 않았어.”
“당하기 직전이었지.”
“그래서. 난 네 답변을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거냐?”
날카롭게 묻자 요젠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대답 없이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태도에 카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데. 이런 식으로 혼자 판결을 내리겠다면, 이 공간을 통째로 폭발시켜서라도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지잖아.”
“그럼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 텐데.”
“안 다치게 요령껏 해 볼게. 뭣하면 그것까지 증명해 줄까?”
“……허세 부리는 거야?”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물음에 카델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한 걸음을 더 좁혔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요젠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델이 검지를 들어 그의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눈을 제대로 가리고 있나 보네. 아니면, 내 말에 너무 집중했거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요젠의 입가가 작게 움찔했다. 손가락을 떼어 낸 카델이 반대쪽 손을 들어 요젠의 눈앞에 흔들었다. 여태 거두지 않은 불꽃이 움직임을 따라 너울거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처음 화염구를 발사한 그 순간부터 소리 소문 없이 암실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완벽하게 겉면을 핥아 낸 불꽃을 따라 암기가 뚝뚝 흘러내리며, 가려져 있던 객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걸음을 물려 거리를 벌린 카델이 멈춰 있는 요젠을 향해 깐족거리듯 말했다.
“네 암기가 다 타기 전에 대답해 줄래? 조금 있으면 부하들이 들이닥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