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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응, 그냥 반이 귀찮게 구니까 잠가 둔 거 아니야?”
“닥쳐라, 요정 놈. 단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아하하! 자기는 절대 거절당하지 않을 줄 아나 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죽고 싶지 않으면 닥쳐.”
현재 반과 라이돈은 굳게 잠긴 카델의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잠시 열을 식힌 뒤 다시 카델의 상태를 살피러 돌아왔던 반은, 갑자기 잠긴 문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고, 안쪽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싸우는 기척도 없고, 피 냄새도 나지 않았으나,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카델을 찾아온 라이돈이 합류한 것이다.
“그럼 그냥 문을 부수면 되잖아?”
“역시 그 수밖에 없나.”
뒷일에 대한 걱정보단 단장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이 만큼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도-실제로는 고작 10분 남짓이 흘렀을 뿐이지만- 반응이 없다면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그렇게 문을 부수기로 작정한 반이 몸을 들이박기 위해 뒤로 물러서고. 라이돈이 흥미진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간.
“문이 안 열리면 보통 열쇠부터 사용하지 않나요?”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한 가르엘이 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두 분 목소리가 하도 커서 제 방까지 들리더군요. 마스터키를 받아 왔습니다. 문을 부수는 건 열쇠로도 열리지 않을 때 해 보죠. 라이돈 경의 말처럼 단순히 방해받기 싫어서 잠가 뒀을 수도 있으니까요.”
작게 웃은 가르엘이 열쇠를 흔들어 보이자, 반도 자세를 풀었다. 여전히 단장이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지만, 만약의 만약을 위해 시도해 본다는 기색이었다.
지체 없이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은 가르엘이 손을 돌리고.
덜걱. 덜걱.
잠금이 풀리는 명쾌한 소리가 아닌, 헐거운 구멍에 열쇠가 헛도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몇 번의 재시도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은 애초에 잠기지 않았다.
“비켜요. 부술 거니까.”
좀 전보다 심각해진 반이 가르엘을 밀치며 나섰다. 하지만 그가 문을 들이박으려던 찰나.
달칵.
내내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멀쩡하기만 한 카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부하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마침 잘됐어. 모인 김에 다들 들어와.”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기에는, 카델의 뒤에 자리한 사내의 존재감이 너무도 컸다.
단장의 방에서 나온 낯선 사내의 존재에 굳어 있는 부하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라이돈이었다.
“허! 자기, 또 첩이야?”
“동료들 얼굴은 확인 안 해도 되겠어?”
“응. 아직은.”
“그래. 아직은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댔으니까, 필요할 때 양해를 구해 보자.”
카델은 부하들로부터 요젠을 지키듯 그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심지어 손까지 꽉 잡고 가녀린 부인 대하듯 애지중지 살피는데, 평소의 카델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조심스러운 태도에 부하들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굳어 가는 중이었다.
“음, 단장님. 아직 정식 소개도 듣지 못한 새 동료에게 벌써 반감이 생기려고 하거든요. 왜 제가 입단했을 땐 이런 복지가 없었는지 속상하기도 하고…….”
가르엘이 먼저 운을 떼자, 바득바득 이를 갈던 반과 점점 차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던 라이돈도 말을 얹었다.
“단장, 이 녀석이 설마 그놈인가요? 저보다 먼저 단장을 만났다는?”
“보기만 해도 칙칙해. 같이 숨만 쉬어도 우울해질 것 같아. 자기, 저런 걸어 다니는 악몽 같은 인간이 뭐가 좋다고 붙어 있어? 기분 나빠. 빨리 이리 와.”
그들의 노골적인 질투에도 카델은 요젠과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부하들의 반응을 이해해 달라며 양해를 구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카델의 태도가 달라진 데에는, 요젠이 ‘정말 앞을 볼 수 없는 몸이었다’는 사실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시력을 잃은 것이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으나,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됐든 단장인 자신이 부하의 편의를 신경 써 주어야 한다는 습관적인 다정함도 한몫했다. 맹인을 전쟁터에 끌어들인 책임을 져야지 않겠는가.
“다들 예상하고 있겠지만, 이 친구가 바로 영면의 사자야. 진짜 이름은 요젠 바르딕타. 인사들 나눠.”
“뭐, 첫인상이 나쁘긴 하지만 예전부터 한번 뵙고 싶던 분이죠. 전 가르엘 몬자시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론 장례까지 치른 시체지만, 보시다시피 이렇게 잘 살아 있어요.”
“……저 남자가 진짜 영면의 사자라고요?”
“영면의… 뭐라고?”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가지각색의 반응과 자기소개에도 요젠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눈앞의 사내들이 앞으로 호흡을 맞춰야 할 새로운 동료란 것을 알고는 있으나, 요젠은 살면서 한 번도 동료랄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과연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 주어야 하는 건지. 아직은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동안 몰아치는 질문의 감당은 오롯이 카델의 몫이었다.
“그래, 그 ‘영면의 사자’가 얘야. 앞으로 적린 기사단원으로서 함께 활동하겠지만,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최대한 줄일 거야. 자칫 요젠의 정체가 밝혀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기사단에 암살자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만 알릴 예정이니, 너희들도 말할 때 조심해 줘”
“저는 흑마법사로 신분 세탁까지 시켰으면서요?”
“넌 요젠처럼 기척을 숨기면서 전투할 수 없잖아. 그리고 마기 정도는 암흑 마력으로 흉내 내 볼 수 있어도, 요젠의 암기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힘이야. 얼버무리기 힘들어.”
“관심 없어, 자기.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 손은 놓고 말해.”
“아, 그리고 요젠은 앞이 안 보여. 다들 배려 부탁한다.”
“과보호 아닐까요, 단장? 여태까지 그 눈으로 잘만 암살하고 다녔던 걸로 아는데. 그쪽도 필요 없는 배려는 본인 선에서 잘라 내지 그래.”
거리낌 없이 적의를 드러낸 반이 일갈하자, 요젠의 고개가 돌아갔다. 풀었던 붕대를 다시 동여맸기에 그의 시선은 모호하기만 했으나, 반은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얄미운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짜증스레 노려보고 있자니, 곧 요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지금은 필요한 것 같은데.”
“……뭐?”
“필요한 배려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손을 잡아 주는 것은 전혀 필요 없는 배려였다. 앞은 보이지 않으나, 요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앞이 보였던 시절의 기억과 사물의 윤곽, 개개인의 기운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자세한 외형이나 색깔까진 알 수 없어도, 형태는 그려 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위치와 형태는 요젠의 기억 속에 남아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가 원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만이 들어찬 그림자 세계. 그 세계를 통제하고 채워 넣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요젠, 그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눈을 가리고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고, 원하는 사람을 찾아낼 수도, 남에게 들키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세계가 온통 제 손바닥 안인데, 고작 방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남의 손을 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배려다.
하지만 요젠은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카델이 황당해하는 반을 타박하는 것도 말리지 않았다.
“너희한테 요젠을 챙기라고 하진 않을 거야.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안 그래도 갓 입단해서 어색할 사람 면박 주지 마.”
“다, 단장…….”
반은 카델이 제 편이 아닌 요젠의 편을 들었다는 것에, 가르엘은 그 악명 높은 ‘영면의 사자’가 생각보다 얌전히 카델에게 묶여 있다는 것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라이돈은 예전의 악몽이 떠올랐는지, 반이 구박받는 것을 보자마자 눈치껏 말을 줄였다. 그렇다고 요젠을 향한 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충격과 분노, 질투 따위의 칙칙한 감정이 뒤섞인 새 동료 소개가 끝나고. 객실을 얻어 요젠에게 키를 건네준 카델이 비척비척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가 향한 곳은 루멘의 방이었다. 차도가 확실한 루멘의 회복세에 가르엘도 더 이상 그의 옆을 지키지 않았다. 카델은 고요한 방 안에 들어가 그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차피 잠도 다 깨 버렸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볼까.’
피로 때문에 전신이 묵직하고 뻐근했으나, 갑작스러운 전투 때문인지 정신은 이미 각성 상태였다. 이대로 누워 봤자 한참을 뒤척거릴 테고, 늦잠을 자서 정작 루멘이 깨어날 때 옆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부하가 눈을 떴는데 퍼져 자느라 얼굴을 비추지 못한 단장이라니. 상상만으로도 한심했다.
‘루멘이 깨어나면 회복 기간을 갖고, 며칠 뒤에 잉마르로 떠나야겠어. 메인 퀘스트에 비타의 심장까지 회수하려면 바쁘겠는걸.’
루멘이 회복하자마자 다음 마족을 상대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기는 했으나, 이렇게 계속 퀘스트 진행을 미뤘다간 스토리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떤 변수가 나타나더라도 스토리는 진행되어야 한다. 그 끝에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카델 라이토스뿐 아니라 신여환의 운명이기도 했으니.
‘마지막까지 가서야 내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징징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어떤 것이 온전한 제 마음이고 뜻인지. 그것을 구분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토리의 끝까지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제 애정을 의심할지언정 승리에 대한 열망을 져 버려선 안 된다. 동료와 함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지금은 그것이 그가 가져야 할 유일한 의지였다.
‘마지막 동료도 영입했어. 이젠 정말 나만 잘하면 돼.’
그들을 잘 이끌고 단합시켜 최고의 전투를 끌어내야 한다. 지금까진 적은 인원수 때문에 단장인 자신까지 전투에 올인해야 했다. 단장이 기사단의 핵심 전사로서 전장의 중심에서 싸운다면, 겉보기엔 훌륭할지 몰라도 지휘관의 역할은 제대로 해낼 수 없다. 큰 그림을 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 발짝 뒤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며 그들의 최대치를 뽑아내 볼 생각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치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창이자 방패가 될 수 있게.
‘내가 잘하던 것도 그런 거였으니까.’
연신 의지를 다잡은 카델이 앞으로 펼쳐질 전투를 셈했다.
그리고 그 무렵. 사그라질 듯 희미하게 일렁이던 루멘의 영혼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