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젠 바르딕타>
현재 등급: S급
최대 각성 등급: S급
포지션: 암살자
착용 장비: 암형 단검(S)
호감도 및 충성도: 39/100
‘어째 쉽게 입단해 준다 싶더니, 호감도가 꽤 낮았단 말이지…….’
이미 한 번 호감도로 배신당한 전적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높여 두지 않고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요젠이 뭘 원하는지, 뭘 해 줘야 호감도가 올라가는지.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결국 카델은 휴식을 미뤄 둔 채 요젠을 살피기로 결정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요젠, 안에 있어?”
가볍게 노크한 뒤 너머의 소리에 집중하자, 들어오라는 요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카델은 최대한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요젠만 있을 줄 알았던 내부에는, 이곳에 온 목적마저 잊게 만들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이게…….”
반사적으로 멈춰 선 카델이 떨리는 시선을 옮겼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어느 인간의 형태를 한 암기였다. 방대한 양의 암기가 새까만 찰흙처럼 인간의 모습을 빚어낸 것이다.
그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히 기괴하건만. 그것은 실제 자아가 있는 것처럼 웃기도 하고, 누군가와 대화하듯 입을 벙긋거렸으며, 어딘가를 향해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충격에 빠진 카델에게 요젠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그림자 인간’ 앞에 앉아 정좌를 틀고 있었다. 카델을 향해 말하고는 있으나, 고개는 그림자 인간에게 고정된 채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델이 질척거리는 암기 덩어리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돌아 요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냥 얘기나 하려고 온 건데……. 저건 대체 뭐야? 혹시 상상 친구 같은 거니?”
“그림자 분신이야.”
“그림자 분신…?”
“한 번이라도 내 암기에 노출된 인간은 어디서 뭘 하든 감시가 가능하거든. 이런 식으로 암기를 사용해 윤곽을 갖춰 놓으면, 앞이 안 보여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어떤 원리인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델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요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분신은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건 누구의 분신인데?”
“다음 표적.”
“……암살 대상이라는 거야?”
“응.”
간단명료한 대답에 카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 표정이 보일 리 없을 텐데도, 요젠은 자연스럽게 그의 염려를 차단했다.
“우리의 약속은 잊지 않았어. 내 일 순위 표적은 마족이야. 이 녀석은 그다음이고.”
“……그래.”
기사단 입단에 요젠의 암살을 금지하는 조건은 없었다. 본분만 제대로 지켜 준다면 그 외의 일은 전부 요젠의 자유다. 자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남자였으니. 보고 있기 거북하다는 이유로 당장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역시 암살자라는 타이틀만 알고 있을 때랑 진짜 암살을 목격한 이후는 감상이 다르네.’
요젠의 입장에서는 마족이나 본인의 암살 대상이나 수준은 똑같을 테다. 카델도 그들의 본질은 별다른 것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루멘의 아버지인 프로치 도미닉이나 반을 괴롭혔던 로빈 솔레스. 그들은 마족 혈통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쓰레기였다. 인간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이해받는 자들이기도 했다.
‘정작 마족의 피가 섞인 가르엘은 올곧게 살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는데 말이지.’
전에도 생각했듯, 요젠과 자신은 노리는 대상이 다를 뿐 근본은 같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서로 간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분신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지켜보는데, 요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기분 나빠?”
“어?”
“내겐 익숙한 일이지만, 네 눈엔 기분 나쁠 수 있으니까. 불쾌하면 말해. 네 앞에선 하지 않을게.”
뜻밖의 배려에 카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요젠의 얼굴은 어느샌가 그림자 분신이 아닌 카델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이게 진짜 사람인 것도 아니고, 내가 관여할 부분도 아니니까.”
“괜찮다면 됐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어. 네 암기에 노출된 인간을 이런 식으로 감시할 수 있는 거면, 나도 마찬가지인 거야?”
혹시 미행 중에도 자신을 암기로 빚어내 관찰했던 걸까. 설마 하며 질문하자, 요젠은 대답 대신 새로운 그림자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렇구나.”
카델은 제 맞은편에 저와 똑같은 자세로 앉은 그림자 분신을 바라보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참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부하였다.
요젠과의 대화가 끝난 뒤, 카델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방으로 돌아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야말로 기절과도 같은 숙면이었다. 그 후로 몇 시간이 지났을까.
“카델. 자기야. 일어나.”
몽롱한 의식을 헤집고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카델은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에 꾸물꾸물 힘을 주었다. 푹 잤음에도 아직 피로가 덜 풀렸는지,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안 일어나면 계속 괴롭힐 거야.”
“으응…….”
“아하하! 표정 봐, 귀여워.”
그렇게 카델이 피로 때문이라기엔 과하게 묵직한 몸뚱이에 이상을 느낄 무렵. 입술 위로 말캉한 촉감이 느껴졌다. 힘겹게 눈을 뜬 카델의 시야 가득 들어찬 것은, 다름 아닌 라이돈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반사적으로 라이돈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무언가가 그의 아랫입술을 물고 놀리듯 잡아당겼다. 촉촉하고 따뜻한 것이 퍼석한 표피를 지그시 훑어 내기도 했다. 그 간지러운 감각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둔해진 사고는 한참 뒤에야 라이돈이 제 위에 엎어진 채 괴롭힘에 가까운 입맞춤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경악스러운 현실에 번쩍 눈을 뜬 카델이 다급하게 라이돈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읍……!”
라이돈은 카델을 짓누른 채 경악의 말까지 쪼아먹을 기세로 쪽쪽 입을 맞추더니, 카델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고서야 옆자리로 몸을 굴려 누웠다. 뻔뻔하게 웃는 낯짝에선 한 치의 부끄러움도 비치지 않았다.
라이돈에게 벗어나자마자 벌떡 상체를 일으킨 카델이 손등으로 입술을 가린 채 씩씩거렸다.
“갑자기 뭐야? 사람 자는 데 와서 허락도 없이…….”
“흐응, 결혼한 사이에 뽀뽀 허락까지 받아야 해? 야박하구나, 자기는.”
“결혼한 적 없잖아!”
난데없는 봉변에 제대로 잠이 깨 버렸다. 카델은 하도 혹사당해 얼얼해진 입술을 문지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진을 뺀 탓에 하루의 시작부터 피곤해졌다.
라이돈은 그런 카델을 무시한 채 뒹굴거리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꿔 카델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납작한 배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해, 카델.”
애교 가득한 고백이 복부를 따끈하게 울렸다. 한껏 어이없는 표정으로 제 품에 안긴 금발 머리를 내려다보던 카델이 설설 고개를 저었다. 매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라이돈도 라이돈이지만, 매번 애교에 넘어가는 자신도 문제였다.
“아직 점심도 안 된 것 같은데. 다들 뭐 하길래 혼자 여기 왔어?”
“땀 흘리러 갔어.”
“땀?”
“수련.”
이 아침에 단체로 수련을 하고 있다는 건가. 설마 루멘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가르엘이 알아서 막았겠거니 싶었지만, 온전히 믿기도 뭣했다. 제 장례식을 코앞에 두고 술 사러 나갔던 인물이 아니던가. 가끔씩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상식적인 행보를 보이곤 하니, 안심할 순 없었다.
“요젠도 같이 갔어?”
“아니. 한 번 싸워 볼까 싶어서 찾아갔었는데, 안 보이더라. 걘 기척도 안 느껴지고 냄새도 안 나. 이상한 인간이야.”
“좀 특별해서 그래.”
“그래 봤자 인간인데.”
투덜거리는 라이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불퉁해진 얼굴이 고개를 돌려 카델을 바라보았다.
“요젠보다 내가 더 좋지?”
“응?”
“뭘 응, 이야? 카델, 당연히 내가 더 좋지?”
부하들에 대한 애정도를 개별 측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대답을 망설인다면 앞으로 며칠은 귀찮아질 것이다. 카델은 라이돈의 뺨을 톡톡 두들기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당연한 걸 물어. 당연히 네가 최고지.”
“나도 알아!”
금세 기분이 풀어진 그가 샐쭉 눈웃음을 치며 카델의 손등을 덮고 깍지를 꼈다. 참으로 솔직한 감정 변화였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은 카델이 잡힌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넌 왜 수련 안 따라갔어.”
“근처에 인간이 많길래. 내가 있으면 우리가 적린 기사단이라는 게 바로 알려지잖아?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안 갔어.”
“……그랬어?”
황제에게는 기사단이 잉첸 마을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그를 제외하면 현재 적린 기사단의 위치를 아는 이는 없다. 루멘의 위중한 상태라든가, 가르엘의 신분이라든가. 숨기는 게 좋을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사들의 얼굴까진 알지 못하니 행동에 큰 제약은 없지만, 라이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환상의 날개]나 환혹술을 사용하지 않는 한, 요정인 그의 존재는 확연히 눈에 띈다. 적린 기사단은 요정이 있는 기사단으로 한번 크게 이름을 알렸으므로, 그의 존재가 곧 기사단의 증명인 셈이었다.
‘그걸 라이돈이 신경 써 주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여관에 머무를 때도 객실 내부가 아닌 이상 라이돈은 항상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그것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창문을 통하거나, 늦은 시각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행동에 이유가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카델은 남은 손으로 라이돈의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나랑 같이 구경 가자. 간 김에 다 같이 식당에서 밥도 먹고.”
“그래도 돼?”
“환상의 날개 걸고 가면 되지. 네 날개만 없애면 되잖아. 돌아오면 금방 풀어 줄게.”
“그래, 좋아.”
카델과 함께라면 뭘 해도 좋다고, 아이처럼 순진하게 웃는 얼굴에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괜히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던 카델이 라이돈과 함께 침대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