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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이 인간이 많다고 했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뭐야, 이 상황은?’
부하들은 마을 외곽에 자리한 공터에서 수련 중이었다. 시장가나 주택가와는 거리가 멀어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서성거리는 인파가 상당했다.
근처에서 무슨 이벤트라도 하는 걸까. 의아해하며 다가가는 동안, 카델은 이 사태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머, 어쩜 저렇게 몸이 좋아? 술통 다섯 개는 너끈히 들겠네!”
“세상에, 저쪽 남자 생긴 것 좀 봐요. 어쩜 저렇게 고급스럽게 생겼을까. 기사일까요? 아니면 용병?”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난 지금 집에 있는 우리 남편 얼굴 보기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어휴, 훤칠하다 정말.”
대체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마을의 여자들이란 여자들은 온통 몰려온 듯했다. 그녀들은 마을에 등장한 미남들에게 환호하며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그들의 수련을 훔쳐보고 있었다. 문제랄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척’을 하는 여인들이 사방에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난 또 뭐라고. 하여튼, 라이돈이 일부러 숨어 있으면 뭐 해. 저놈들 얼굴을 가려야 관심이 끊길 텐데.’
저 수많은 관심 속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현실이 급격히 불편해져 이대로 떠날까 고민했으나, 도주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어, 단장!”
어떻게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자신을 찾아낸 것인지, 반이 팔까지 흔들며 단장의 등장을 환영한 것이다. 그에 부하들에게 향했던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동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 카델과 라이돈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 과도한 관심에 카델이 삐거덕거리고 있자, 라이돈이 그의 손을 잡고 동료들의 틈으로 걸어갔다.
“카델이랑 데이트하다가 잠깐 들렸어.”
뻔뻔한 거짓말에 기다렸다는 듯 반의 욕설이 날아 꽂혔다. 어김없이 투덕거리기 시작하는 두 남자의 옆에서, 카델은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런 미남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저 수많은 관심 중 제 것은 없다는 사실부터 인지해야 했다.
물론, 실상은 아주 달랐지만.
“어디서 저런 남자들이 줄줄이 나오는 거야? 우리 마을에 뭐 미남 땅굴이라도 있었나? 동면을 끝내고 하나둘씩 나오는 거야?”
“알 게 뭐니, 그냥 즐겨. 언제 또 올지 몰라.”
카델은 저를 향한 시선을 제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루멘과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걱정대로 가르엘은 휴식이 필요하다던 루멘의 수련을 막기는커녕 함께 대련하는 중이었다.
“움직임이 전보다 더 좋아졌는데요, 루멘 경. 그 마족과의 전투가 꽤 좋은 영향을 준 모양이죠.”
“확실히, 나쁜 점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었기에 서로 간 검기나 마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검과 검을 맞대는 평범한 대련이었으나, 그들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물 흐르듯 유연한 기술 연계만으로도 뛰어난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카델은 조금 황당한 기분으로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다, 둘의 검이 다시 맞붙기 직전. 그 틈으로 아주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그에 반사적으로 동작을 멈춘 두 남자가 뒤늦게 카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장? 언제 온 거야?”
“아침부터 얼굴이 눈부신데요, 단장님.”
얼마나 집중한 건지, 자신을 부르던 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듯했다. 카델은 반갑게 인사하는 둘에게로 다가가 가르엘을 흘겼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환자가 왜 여기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건데. 이유 좀 알려 줘요, 치유사님.”
“하하, 생각보다 차도가 좋아서요.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가르엘은 떨떠름한 표정의 카델에게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카델이 대놓고 한숨을 쉬자, 옆에 있던 루멘이 대신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지금 움직여 두지 않으면 그때 익혔던 감각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나온 거야. 난 대장처럼 쉽게 쓰러지지 않으니까 걱정 마.”
“바로 어제까지 쓰러져 있던 놈이 할 소리냐? 그때 익혔던 감각이란 건 또 뭔데?”
“그 고위 마족을 해치우기 직전에 성공했던 기술이 있거든. 무리해서 해낸 기술이긴 하지만, 몇 번 더 시도하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말하는 루멘의 눈에선 성장에 대한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열망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식을 되찾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검을 휘두르는 꼴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마음대로 해. 대신 나도 옆에서 같이 수련할 거니까, 내가 돌아갈 땐 너도 돌아가야 해.”
“수련? 이 좁은 마을에서 마법을 연습하겠다고?”
“또 마을 하나 태울 일 있어? 마법이 아니라 운동을 할 거야. 산에서 약속했잖아. 고요의 산맥만 벗어나면 나도 체력 좀 길러 보겠다고.”
카델이 당당하게 말하자, 그를 빤히 바라보던 가르엘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련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겠네요, 루멘 경.”
“……그거 무슨 의미야.”
“이렇게 귀여운 단장님을 옆에 두고 수련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요. 10분 버티는 게 최선일 거란 얘깁니다.”
아닌 것 같은데. 의심하는 카델의 눈초리를 회피한 가르엘이 자신의 검으로 루멘의 검을 툭툭 건드렸다. 다시 대련을 시작하는 의미였다.
그에 콧방귀를 뀌며 물러난 카델이 반을 불렀다. 자신의 운동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그의 도움을 받아 체력을 길러 볼 생각이었다.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세…!”
“옆에서 시끄럽게 뭐 하는 거냐, 요정 놈.”
“우리 자기 자존심 세워 주기.”
옆에서 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카델은 바들바들 떨리는 사지에 필사적으로 힘을 불어넣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푹 수그렸다. 내려간 팔과 함께 들고 있던 돌덩이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가벼운 소리라니. 떨어졌을 때 굉음 정도는 울려야 할 무게였는데.
“이번엔 열 번이나 성공하셨네요, 단장! 성장세가 대단한데요?”
“그, 그래?”
“아하하! 뭐가 그래야, 자기! 이깟 토끼 똥만도 못한 돌을 열 번밖에 못 들었는걸?”
“……넌 좀 닥치고 꺼져.”
속상해하는 카델의 눈치를 살핀 반이 라이돈을 쫓아내려 했으나, 라이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헥헥대는 카델에게 다가가 손을 끌어당겼다. 극히 짧은 운동이었음에도 카델에게는 필사적인 시간이었던 것을 증명하듯, 손바닥이 빨갛게 쓸려 있었다.
“자기, 이 정도면 운동에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랑 같이 마법 연습이나 하는 게 어때?”
“단장한테 재능 없는 분야가 있을 것 같아? 단장은 그저…… 잠시 힘을 숨기고 계시는 것뿐이야.”
“흐응, 반. 말하면서도 어이없지 않아?”
카델은 끝내 반박하지 못하는 반을 일별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그다지 무거워 보이지도 않았던-반은 한 손으로 공처럼 다루던- 돌덩이를 들고 몇 초간 버티는 것뿐인 간단한 운동이었는데. 심지어 시작은 체력 수준을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백만 스물한 번은커녕 열 번 들고 끝났다. 그것만으로 체력이 다 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껏 싸워 온 짬밥이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체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의 전투는 대부분 정신력으로 버텨 왔었다. 고통을 참거나 억지로 버텼고, 제자리에서 마력을 끌어내는 식이었다.
다른 부하들처럼 여기저기 쏘다니며 근육을 혹사하는 전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여태껏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체력을 깎아 먹으며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카델은 라이돈에게 잡힌 손을 빼내 아릿한 손바닥을 주물렀다. 그의 시선이 제 의욕이 꺾일까 노심초사하며 라이돈을 밀어내는 반을 향했다.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늘겠지? 산 정상은 혼자 오를 수 있는 정도면 만족하니까.”
“물론이죠, 단장.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제가 업어드릴 수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반의 친절한 미소에도 카델은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료에게 의지하는 것은 좋지만, 동료의 등에 업혀 다니는 것이 평균이 되어서는 안 됐다. 그런 노인보다도 못한 체력이라면 앞으로의 전투에서 분명 발목을 잡힐 테다.
체력은 없지만 의욕은 남았으므로, 카델은 곧장 반에게 다음 운동을 요구했다.
운동을 마칠 무렵, 공터에 몰렸던 인파는 대부분 사라졌다. 각자의 장사나 집안일을 위해 떠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그 많은 사람이 지금 자신의 꼴을 봤다면, 수치심에 혀를 깨물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단장님.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흠뻑 젖은 채로 누워 있다니,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일단 전 약간 위험해졌는데요.”
카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르엘을 힘없이 흘기며 쌕쌕 숨을 골랐다. 강도 높은 운동은 전혀 없었고, 그마저도 운동 시간만큼 휴식을 반복하며 쉬엄쉬엄 움직였건만. 색다른 자극에 나약한 몸뚱어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르엘과 함께 대련을 끝내고 돌아온 루멘이 카델을 일으켜 주자, 멀리서 돌아온 반이 챙겨 온 물통을 내밀었다. 서둘러 목을 축였지만 손이 덜덜 떨리는 탓에 절반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물통을 비워 낸 카델이 찝찝한 몸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흰 어떻게 몇 시간을 쉼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거냐? 난 지금 고작 한두 시간 운동한 걸로도 진이 다 빠졌는데.”
“지금껏 길러 온 체력이 있으니까.”
간단히 대답한 루멘이 흙먼지로 엉망이 된 카델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똑같은 시간을 움직였음에도 다른 부하들의 얼굴에선 피로한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한 얼굴들이었다.
심지어 같은 마법사인 라이돈마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반을 졸라 검술 훈련을 받았는데, 반의 혹독한 요구도 곧잘 따랐고, 지금도 여전히 팔팔하기만 했다. 같은 포지션이니 체력도 비슷하리라 여겼던 카델은 그 의외의 면에 패배감까지 느껴야 했다.
“으, 찝찝해. 식당은 일단 씻고 난 뒤에 가자.”
카델은 땀에 젖어 달라붙은 옷을 펄럭이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치 체력을 끌어다 쓴 기분이었으나, 그만큼 성장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