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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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때 자신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의식을 되찾고, 빠르게 회복했다면. 기사단은 안전하게 늪지대를 정찰한 뒤 봉인만 강화하면 됐을지 모른다.

그런 아쉬움이 들었으나, 감정은 감정일 뿐이었다. 루멘은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전방을 주시했다.

그와 나란히 선 반 역시 오라를 끌어올린 채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붉어진 눈동자로 뒤편에서 봉인을 실체화 중인 라이돈과 가르엘을 일별한 그가 주변을 서성이는 제프를 향해 말했다.

“이봐, 당신은 이제 돌아가.”

“예?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봐야 폐하께 보고를 드릴 수 있는―.”

“떠드는 것도 살아야 할 수 있는 거지. 네 실력으론 여기서 살아남지 못해.”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었으나, 제프는 마땅한 반박 거리를 찾지 못했다. 적린 기사단장 역시 봉인진까지만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고, 이후의 싸움에 동참하라는 말은 없었다. 그것은 곧 안내가 끝났으면 돌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도 어엿한 정찰대장이다. 아무리 이곳에 마족이 등장한다 한들,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폐하에게 ‘늪지대에 고위 마족이 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봉인이 깨졌을지도 몰라요. 직접 확인은 못 해 봤지만’이라는 한심한 보고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

암담한 미래에 퇴장을 망설이는 제프를 구원한 이는 가르엘이었다. 라이돈을 도와 마법진에 빛 마력을 불어넣던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지켜 드릴 수는 없어도 살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머리통 간수 잘할 자신이 있다면 남아 계셔도 상관없어요.”

“머, 머리통 간수요…….”

든든한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제프는 봉인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전체적인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생존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 여차하면 적의 정체만 확인한 뒤 곧장 내뺄 셈이었다.

“흐응, 제국 봉인보다 훨씬 허접하네, 이거.”

봉인의 실체화가 완료되었다. 라이돈은 허공에 떠오른 타원형의 봉인을 바라보며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봉인은 알리티스의 것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가르엘은 마기가 일렁이기 시작하는 왼손을 감추듯 움켜쥐며 그를 위로했다.

“외부 봉인진이잖아요. 제국 봉인 같은 수준이었다면 다른 기사단이 함께 왔어야 했을 겁니다. 아직 봉인엔 이상이 없으니, 그걸로 만족하세요, 라이돈 경.”

“그게 제일 불만족스러운 거야!”

한껏 툴툴거린 그가 공중으로 떠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늪지대의 정중앙. 주위에는 봉인진이 자리한 땅을 둥글게 둘러싼 늪이 넓게 펼쳐져 있다.

갈색에 가까운 탁한 늪 위로는 까맣게 메마른 수초만 둥둥 떠다닐 뿐, 살아 있는 생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산한 고요함이 불길한 기운을 머금은 채 일렁였다.

잠시 그 스산한 풍경을 감상하던 라이돈이 가볍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습기 가득한 공기를 양껏 들이마신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짜 왔네.”

카델의 말은 정확했다.

“봉인진 바깥에서 나온 녀석이야. 아직 봉인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지금 이쪽이 봉인에 접근하는 중이란 정도는 알아챘겠지. 녀석은 기척을 숨기고 있다가 봉인이 활성화된 시점에 무조건 모습을 드러낼 거다. 그러니 우리는 마족이 봉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위치를 선점한 뒤, 봉인진을 사수해야 해. 엘비 때와는 달라. 각개격파가 아닌 협동이다.”

그것이 기사단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라이돈은 카델의 말을 떠올리며 전방의 늪을 응시했다.

사아아―.

돌연, 바람이 불어왔다. 부드러운 바람결이 그들이 선 땅을 한 차례 휩쓸고는, 이내 늪 한가운데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범한 소용돌이와는 달랐다.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결을 따라 어디서 나온 지 모를 검은 꽃잎이 섞여 들었다. 바싹 말라 썩어 버린 꽃잎이 시원스러운 마찰음을 빚어내며, 점점 빨라지는 소용돌이의 색깔을 까맣게 물들었다.

반과 루멘, 라이돈, 가르엘은 봉인진의 앞에서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웅……!

소용돌이가 터져 나가듯 흩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늪 위에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인간들이 찾아왔군요.”

허리까지 물결치며 내려온 흑발과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피부. 기사단에게 고정된 흰자위 없는 새까만 눈동자. 그에게서는 마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피처럼 새빨간 입술을 늘이며 미소 짓자, 등에 달린 검붉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셀레브, 엘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자태였다. 과시하듯 한 차례 날개를 펄럭인 그가 우아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은 멘델 할리에프. 상대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죽는다면 원통할 테니, 미리 알려드리지요.”

선공은 루멘의 몫이었다. 눈 깜빡할 새 사라진 신형과 함께, 멘델의 후방으로 세 개의 섬광이 새겨졌다. 이전보다 향상된 속도에 그를 처음 만난 적이 마땅한 대응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푸슉!

검기를 따라 찢어진 살갗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졌다. 멘델은 살짝 고개를 틀어 어느샌가 제 후방을 점하고 있는 루멘을 응시했다.

“……빠르군요.”

“네가 느린 걸지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린 루멘이 도발하듯 빈정거리며 검에 손을 올렸다. 그 역시 멘델을 주시하고 있긴 했으나, 신경은 조금 전 자신이 베어 냈던 상처에 쏠려 있었다.

‘피의 양에 비해 상처가 너무 얕은데. 게다가 바닥에 떨어진 저건…….’

베어 낸 상처에선 분명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정작 늪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뼛조각들이었다. 핏방울이 뭉치기라도 한 것일까. 누런 뼛조각들은 서서히 늪 아래로 가라앉았다.

“안타깝게도 전 느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공격에 힘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절 죽일 수 없어요.”

차분하게 읊조린 멘델이 오른손을 들자, 그를 중심으로 마기가 섞인 혼탁한 광풍이 폭발하듯 몰아쳤다. 그대로 풍압을 버티려던 루멘은 바람을 따라 쇄도하는 ‘검은 꽃잎’들을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베어 내지 않는 겁니까? 감도 좋군요. 제법 쓸 만한 인간―.”

회피를 택한 루멘을 칭찬하던 멘델의 눈동자로 검은 안광이 스쳤다. 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정면으로 쇄도하는 얼음 창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멘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휘두른 방향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얼음 창의 궤도를 비틀며 그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뻔한 기습. 그것이 멘델이 평가한 공격의 수준이었으나, 그 또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시야를 가리던 얼음 창이 사라지자마자 오라를 두른 반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붉은 검기에 휩싸인 대검이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그의 가슴팍을 노리고. 가볍게 물러난 멘델이 다시 한번 광풍을 일으키려 했으나.

키잉—.

별안간 그의 눈앞에서 섬광이 번졌다.

“큿……!”

찌르는 듯한 고통에 멘델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급히 반이 있던 곳으로 광풍을 일으켰으나, 공격은 전혀 다른 곳에서 그의 몸을 노렸다.

가르엘의 엄호를 받은 반이 멘델이 눈을 감은 찰나에 검의 궤도를 바꾼 것이다. 힘 있게 휘두른 대검이 멘델의 옆구리를 깊숙이 베어 내고. 곧장 다음 기술을 연계하려 했으나, 빠르게 접근한 루멘이 그를 저지했다.

“뭐야?”

“저걸 봐.”

루멘이 눈짓한 곳은 반이 갓 베어 낸 멘델의 옆구리였다. 그리고 그곳에선, 상처에서 흐른 피가 어느새 뼛조각으로 변모하여 늪을 뒹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을 타고 들어온 ‘검은 꽃잎’이 상처의 틈새를 파고들며 살점처럼 빈자리를 채웠다. 까맣게 봉합된 상처는 곧 어떤 흉터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또 빌어먹을 재생인가.”

고위 마족이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저 지독한 재생력에 있었다. 셀레브도, 엘비도, 한쪽 팔만 상대했을 뿐인 아쉬브카도. 웬만한 공격으로는 결코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저 뼛조각의 정체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겠어.”

루멘이 말하자 대검을 고쳐 쥔 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놈의 주의를 끄는 거야. 봉인진은 나머지 녀석들한테 맡기고, 우린 빈틈을 만들어 보자고.”

그사이 시력을 회복한 멘델이 재생된 제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시작부터 맹공을 당했으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선 여전히 고상한 기품이 흘렀다.

“좋은 합이군요. 스피드와 힘을 각각 다른 인간에게서 채우는 겁니까.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협동은 언제나 흥미로웠죠.”

“좀 닥쳐. 싸우는 데 뭘 그렇게 일일이 감상을 지껄이는 거야.”

와락 인상을 구긴 반의 돌진과 동시에, 셋을 둘러싼 원형의 얼음벽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몰아친 한기가 세 남자를 휘감고. 하늘 높이 치솟은 얼음벽을 올려다본 멘델이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식사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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