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5화 (2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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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파견을 위한 물자는 왕국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약 따위의 소모품을 부하들에게 배분하고, 제국에 출정을 알리는 전보를 보낸 뒤엔 짐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시종들이 세탁해 준 단복을 벽에 걸어 둔 카델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시간은 어느덧 초저녁이 되었고, 아직도 반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쪽에서 가야 해.’

이런 애매한 상태로는 반을 제대로 대할 수 없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기분이었으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객실을 나선 카델은 로브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반의 객실이 아니었다.

잉마르 늪지대. 쿤라가 있는 장소.

‘비참하지만 아직 반과 대면할 용기가 없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던 그가 대번 태도를 바꿔 자신을 경멸한다면. 상상만으로 숨통이 옥죄어 왔다.

그가 진실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쿤라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정확했다. 어차피 쿤라에게도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알려야 했으니, 당장의 고통을 회피할 명분은 충분했다.

성을 빠져나온 그는 마차를 잡아 늪지대로 향했다. 일부러 비싼 사두마차를 골랐음에도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완벽히 길을 외운 것은 아니었기에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으나.

[또 웬일이냐, 반쪽이.]

늪지대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쿤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의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걷자, 곧 마계 소환진과 그 옆의 마법진 조각을 살피는 쿤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쿤라는 카델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벌써 떠날 때가 온 건가?”

“내일 아침에 이동할 거예요. ……분석은 잘 돼 갑니까?”

“여전히 모호하다. 완성된 마법진의 정확한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군. 이 단편적인 술식만으로 쓰임새를 밝혀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아. 이 몸이 직접 살핀다면 훨씬 수월해지겠다만, 산을 비울 수는 없으니.”

쉬운 것을 쉽게 돌파하지 못하니 짜증이 나는 듯했다. 카델은 인상을 구긴 쿤라의 옆으로 다가가 함께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가는 봉인 구역에서 새로운 마법진 조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분석에도 진전이 있겠죠.”

“그렇겠지.”

마법진을 노려본다고 해답이 나오진 않는다. 그럼에도 카델은 입을 꾹 닫고 복잡하게 그려진 마법진을 눈에 담았다.

반에 대한 것을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쿤라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자신은 안심할 수 없다. 그저 불안해지냐 불편해지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더 이상 속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잖아. 이렇게 질질 끌어 봤자 반만 괴로워질 뿐이야.’

괴롭더라도 끝장을 내야 한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심호흡한 카델이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가 질문을 꺼내려던 찰나.

“그놈은 어떻게 됐지?”

“……예?”

“어젯밤 이 몸에게 찾아왔던 그놈 말이다.”

내내 마법진에 고정되어 있던 쿤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반쪽이 네가 너에 대한 정보를 들으라고 보냈다던데.”

“그래서…….”

“전부 말해 주었다. 네 영혼에 관해서만 골라 말해 주긴 했다만, 그것만으로도 벅차 보였지.”

전부 들었다. 그 사실에 카델의 안색이 대번 하얗게 질렸다. 쿤라는 그런 카델을 응시하며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정신 나간 꼴로도 잘 걷길래 그냥 보내긴 했지만, 영 마음에 걸리더군. 광전사는 정신력이 중요하지. 위험할 것 같으면 쳐 내라. 그 힘은 한 번 미치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아.”

전부 알고 있는데도 화내지 않았다. 따져 묻지도 않았고, 기사단을 떠나지도 않았다. 카델은 반의 마음이 어떠할지, 어째서 자신을 평소처럼 대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게 반의 선택이라면 따르겠어.’

그가 모른 척 군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연기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면 정리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겠다.

버티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에게 쏟아붓듯이 진실을 알리려 했으니. 결과가 무엇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떠나지만 않는다면…… 뭐라도 할 수 있어.’

입술을 깨문 카델이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휙휙 바뀌는 풍경은 점차 우거진 초목으로 채워지며 그들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가는 봉인진마다 고위 마족을 마주쳤죠. 왠지 이번에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앉은 가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적린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요. 제국 봉인뿐 아니라 외부 봉인을 노리는 마족까지 있다니. 심상치 않아요. 전체적인 보고 내용을 들어 봐야 하겠지만, 다른 곳이라고 마족과의 충돌을 피했을 것 같진 않네요.”

“마계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싸움은 못 피해.”

단호한 대답에도 가르엘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카델이 두 번째 마계 전쟁을 예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곧 큰 전투가 벌어지리라 예상했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세계의 흐름이 좋지 못했다.

“일이 터질지, 안 터질지 가늠하면서 시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절차 따지면서 시간 낭비하는 건 왕족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문제지.”

쓴웃음을 지은 카델의 시선이 맞은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마차에 오른 뒤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요젠이 있었다.

요젠과 가르엘. 카델과 한 마차에 탄 단원은 이 둘 뿐이었다. 요젠은 아직 다른 단원들과 잘 섞이지 못했기에 카델이 직접 데려온 것이고, 가르엘의 자리는 단순 제비뽑기였다. 나머지 인원은 다른 마차에 타고 있다.

가르엘이 걸린 것은 나름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반이었다면 카델이 어색했을 테고, 라이돈이었다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 피곤했을 테다. 가장 무난한 루멘과 가르엘 중 가르엘이 당첨을 뽑은 것이니,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카델의 시점일 뿐이었고, 요젠의 입장에선 썩 좋지 못한 조합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젠 경. 술은 좀 하십니까? 언제 한 번 같이 마셔 보고 싶은데요. 친목 도모에 술만큼 좋은 게 없잖아요?”

“마시지 않아.”

“이런, 긴장이 풀어져서 멀리하는 건가요? 아니면 단순 맛 때문에? 그런 거라면 라이돈 경도 잘 마시는 과실주가 있는데요.”

“이유는 상관없잖아. 음주에는 취미가 없어.”

“안타깝네요. 그럼 차라도 한 잔?”

“…….”

차분한 호선을 그린 요젠의 입꼬리가 작게 움찔했다. 스멀스멀 풍기는 살기를 감지한 카델이 가르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만 좀 귀찮게 해. 요젠한테 왜 그렇게 들이대는 거야?”

“하하, 질투하는 거예요, 단장님? 이건 단장님을 향한 애정과는 종류가 다르니까요. 안심하세요.”

“또 헛소리하네.”

“전 그저 같은 단원끼리 친해지고 싶을 뿐인걸요. 라이돈 경은 단 걸 주면 금방 허물어지던데. 흠, 뭘 하면 호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쪽에 물어도 정보가 없는 건 매한가지다. 굳이 좋아하는 걸 꼽아 보자면, 글쎄.

‘돼지 새끼의 목 정돈가.’

폐기물 귀족의 대가리라면 호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잠시 생각하던 카델이 설설 고개를 저으며 가르엘의 턱을 올려 입을 다물게 했다. 손바닥 위에 올라간 가르엘의 얼굴이 모로 기울며 뺨을 기댄 자세가 됐다.

“이렇게 막 만지면 곤란한데. 요젠 경이 앞에 있잖아요, 단장님.”

“말 이상하게 하지 말랬지.”

기겁하며 손을 뗀 카델이 슬쩍 요젠의 눈치를 살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말만으로 자신이 이상한 짓을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젠은 한결같이 나긋한 목소리로 오해의 소지를 차단했다.

“실체는 볼 수 없어도 윤곽은 느껴.”

“오오, 어떤 식으로요? 시력을 잃었는데도 오차 없이 깔끔한 전투를 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거야.”

“제 이해력을 도발하는 건가요, 요젠 경?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자, 어서 말해 주세요.”

“…….”

잠시 주춤했던 살기가 다시금 들끓는 것이 느껴졌으나, 카델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재생 능력이 있으니. 요젠에게 한번 찔려 봐야 귀찮게 굴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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