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521)

팔라익이 분사기를 꺼내지 않고 품고 있는 한, 석화 가루의 경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팔라익이 분사기를 계속 품으려 든다면 유효타를 먹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언뜻 답 없는 고착 상태로 비칠 수 있으나, 카델의 생각은 달랐다.

‘난 저놈이 분사기를 꺼내기 전까지 부하들에게 근접전을 시킬 생각이 없어. 견제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팔라익은 아니겠지. 언제든 후방의 기사들까지 모여 본인을 포위할 수 있다는 걱정을 떨칠 수 없을 거다.’

아무리 풍압으로 석화 가루를 밀어 냈다 한들, 팔라익이 가루를 전부 자신에게만 집중시킨다면 이쪽은 꼼짝없이 석화 당한다. 거슬린다면 바람을 무시한 채 이쪽을 집중 공격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다른 기사들이 공격한다면? 해머는 마법사가 묶어 두고 있고, 원거리 견제는 끊임이 없다. 마법사를 석화시키는 동안 무사할 수 있는가?

팔라익은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카델은, 팔라익의 결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팔라익의 전투 방식을 간파하고 있군. 어떻게? 인간들 사이에 벌써 정보가 퍼졌나? 하지만 알고 있다 한들 이런 식의 대응은……. 터무니없는 인간이다.’

석화 가루의 경로를 비틀어 마법사를 노렸다. 석화 가루에도 그의 마기는 섞여 있다. 고작 바람만으로는 가루를 온전히 막아 낼 수 없었다. 최전방에 서 있는 자라면 더더욱.

그 증거로, 허벅지까지 진행되었던 석화가 이제는 그의 허리까지 타고 오르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전부 굳기 전에 날 해치울 자신이 있다는 건가? 건방진…….’

자신을 향한 카델의 눈빛에선 한 점의 두려움도 비치지 않았다. 팔라익은 그것이 무엇보다 불쾌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법사가 펼친 덫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과는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무력함이 분노로 치환되었다.

“인간에게 두 번이나 가로막힐 성싶으냐!”

우렁찬 포효와 함께 팔라익의 허벅지가 부풀었다. 하체를 단단히 받친 그가 불꽃에 묶인 해머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기함할 만한 파워였다. 카델은 풍압을 유지하는 동시에 불꽃에 마력을 더했다. 불꽃은 그야말로 가닥가닥 찢겨 나가며 팔라익의 힘 앞에 무너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의 표정에선 당혹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기 힘만 믿고 무식하게 돌진하는 놈이면 애초에 분사기를 방어용으로 쓰지 않아. 생긴 거완 달리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다. 만약이란 걸 무시하고 돌진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겠지.’

불꽃은 더 이상 해머를 잡아 둘 수 없었다. 노을빛이 희미해진 하늘 위에 웅대한 호선을 그린 해머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단장님!”

일순 흐트러진 바람결을 파고든 가루가 카델의 가슴과 왼쪽 팔을 석화시켰다. 카델은 멀쩡한 오른팔을 뻗어 부하들의 접근을 저지했다.

“아직! 아직 아니야.”

올라간 해머는 카델을 노리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팔라익은 해머 헤드를 지탱한 기둥에 가까운 장대를 어깨에 걸치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카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팔라익의 행동을 주시했다. 팔라익에게서 분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면. 자신의 역할은 끝이다. 남은 승리는 부하들의 전투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팔라익이 품속에서 손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을 숨기리라 예상했으나, 팔라익은 보란 듯이 카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굵직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꽂힌 직육면체의 기둥 세 개. 그것을 발견한 카델의 눈빛에 동요가 비쳤다.

“네놈이 어떻게 이 팔라익의 능력을 간파했는지는 모르나, 이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석화 분사기! 네 녀석은 이 분사기가 하나뿐일 거라 예상했을 거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뒤늦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팔라익의 전투가 게임 속 패턴과 어긋난 것은 그의 기술 활용 능력으로 만들어진 변수일 뿐이었다. 팔라익이 사용하는 기술의 종류가 변동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분사기가 세 개라고……?’

게임 속 팔라익이 생성할 수 있는 분사기의 최대 개수는 하나. 그 이상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건 팔라익이 제 기술을 아무리 독특하게 활용한대도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설마 이젠 적의 기술까지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인가? 충격에 굳어 버린 카델의 앞에서, 팔라익은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분사기는 한 개가 맞다.”

“……?”

“이 중에서 진짜 분사기는 하나뿐이지. 나머지는 에밀리아 양이 만들어 준 가짜에 불과하다. 하지만 네게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을 터!”

당당하게 외친 팔라익이 분사기를 하늘 높이 던져올렸다. 직육면체의 기둥은 팔라익의 손을 떠나자마자 스무 배 이상으로 몸집을 불렸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위로 세 개의 거대한 기둥이 떠오르고. 팔라익은 어깨에 걸쳐 두었던 해머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그러쥐었다.

“네놈들을 산산이 부숴 새로운 제국의 거름으로 삼아 주마!”

그는 한계까지 뒤튼 허리를 탄력 있게 되돌리며 낙하하는 분사기를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헤드에 적중한 세 개의 분사기가 시원스러운 타격음과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진 분사기가 순식간에 숲 안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은 카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분산시키겠다?’

이로써 팔라익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더 큰 문제가 생겨 버렸다. 분사기를 저렇게 먼 곳에 처박아 두면 가루가 날아드는 곳을 특정하기란 어렵다. 전투 중에 치명적인 석화를 당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애초에 팔라익 공략의 첫 번째 순서는 석화 분사기의 파괴. 팔라익을 공격하는 동시에 분사기를 찾아 부수기 위해서는, 전력의 분산이 필연적이었다.

‘본인은 반 토막 난 전력을 상대로 석화 가루까지 뿌려 대겠다는 거고.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렇다 한들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번에 표정을 굳힌 카델이 뒤편의 라이돈에게 손짓했다.

“라이돈! 시간 좀 벌어 줘!”

“응? 나 혼자? 마음대로 해도 돼?”

“그래, 마음대로 해.”

“아하하! 드디어!”

날개만 석화되지 않았더라면 더 즐거웠겠으나, 라이돈은 행복한 걸음으로 카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이젠 2/3 이상이 석화된 카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배시시 웃었다.

“심심해서 죽을 뻔했잖아.”

“절대 장막 해제하지 마. 조금이라도 석화를 늦춰. 알겠지?”

“응응, 카델 말은 전부 들을게.”

자신을 담아내는 붉은 눈동자에 묘한 광기가 번들거리는 듯했으나, 카델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라이돈의 힘이 필요했다.

몸을 틀어 팔라익과 마주 선 라이돈이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띠었다.

“카델이 시간을 벌라고 했으니까, 나랑 오래 놀아 줘. 함부로 죽지 않게 조심해야 해?”

“크하하! 이 팔라익에게 하는 말인가? 날개 잃은 요정이 헛소리를 늘어놓는구나!”

팔라익의 해머가 위협적으로 젖혀짐과 동시에, 라이돈의 주위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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