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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이 흐릿했다. 얼굴의 절반이 석화된 탓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호흡도 불편했다. 석화 가루의 입자는 아주 작아서, 의식해도 보일까 말까였다. 그저 가루가 분사기의 사방으로 퍼져 나가 피할 구석이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멀리서 검기를 날려도 분사기는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타격할 때마다 금이 가는 것이 보였지만, 완전히 부수기 위해선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신호를 보내 루멘과 가르엘을 불러들인다면 일은 수월할 것이다. 이대로 홀로 버텨 봤자 분사기를 부수기도 전에 전신을 석화 당할 가능성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반은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폐를 위해 힘껏 숨을 들이쉬고, 팔꿈치까지 굳어 버린 오른팔을 무리하게 비틀어 자세를 취했다.
‘앞으로 10번 정도면 부술 수 있다.’
부술 것이다. 이걸 부수지 못한다면, 고위 마족을 코앞에 둔 카델이 위험해질 테니까.
붉게 물든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응축된 검기를 날리며 보이지 않는 가루를 피해 계속해서 위치를 바꿨다. 잡념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 온전히 집중해야만 석화 전에 분사기를 부술 수 있다.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허락을 받은 건가? ……그렇군. 그렇다면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늪에서의 밤 이후, 한 시도 떠나지 않던 쿤라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네가 알던 카델 라이토스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그 영혼은 이제 사념체에 불과해. 얄팍한 의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몸을 빼앗긴 했지만, 그게 녀석의 의지는 아니었을 거다. 그 녀석도 어쩌다 휘말린 것에 불과해. 잡아먹힌 영혼이야 억울하겠다만, 불가항력이지 않겠나.”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대화하고, 죽은 듯 잠을 자도. 떨쳐지질 않았다. 떨쳐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나머지를 버려야 한다. 전부를 얻을 순 없어. 넌 절대 카델 라이토스의 영혼을 구할 수 없으니, 새로운 카델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분노와 공허함. 그것이 며칠 동안 반을 채우고 있던 감정의 전부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마음과, 차게 식어 버린 마음.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 한데 섞이며 정신을 조여 왔다.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나머지를 버려야 한다고? 어느 것이 더 소중하냐고? 그런 건 질문이 될 수 없다.
“난 언젠가 천하를 내 검 아래에 둘 천재 마법사거든! 농담 아니야, 무조건 그렇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넌 그 영광스러운 첫걸음을 함께하게 될 소중한 동반자인 거지.”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도 너한테 진짜 카델 라이토스를 돌려줄 수 없게 됐어. 그런데 있잖아, 사실은……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 없었어. 계속 이 몸으로 살아가려고 했어.”
그 남자는 감정의 시작이었고, 한 번 죽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없어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소중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유일한 존재. 반에게 있어 그 남자가 그랬다.
열 번째 공격. 더 이상 검기를 날릴 수 없어 대검을 직접 휘둘렀다. 어느새 무뎌진 검날 아래 동강 난 분사기가 쓰러져 있었다.
몸을 굳히던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뻣뻣하던 육체가 가벼워졌으나, 반은 여전히 석화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늑대의 머리가 조각된 대검 손잡이에 닿았다.
툭. 투둑.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자, 굳은 뺨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라가 사라진 그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은 황금색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감정을 씻어 내듯 무방비하게 섰다.
한차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골랐다.
“…….”
그리고 잘 떨어지지 않은 손가락을 떼어 내어, 대검을 놓았다. 맥없이 쓰러진 대검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지고. 젖은 얼굴을 천천히 문지른 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당신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