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화 (283/521)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무거웠다. 방에 가까워질수록 주위를 감싼 공기가 갑갑해졌다. 눈꺼풀의 깜빡임을 따라 푸른 눈동자에 새겨진 수심이 깊어져 갔다.

문 앞에 선 루멘은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잠시 숨을 고르다, 노크 없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둡기만 한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바깥은 대낮이다. 커튼을 젖혀 둔 창 너머로 눈 부신 햇살이 비쳐 드니, 방 안이 어둡다는 것은 그저 분위기가 그러하다는 뜻일 뿐이었다.

문을 닫은 루멘이 가장 먼저 침대 위의 카델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죽은 듯 얌전히 누워 있는 채였다. 어젯밤과 다르지 않다. 그의 옆에는 카델의 손을 잡고 엎드린 라이돈이 있었다. 저것 또한 어젯밤과 다르지 않다. 아마 종일 그의 옆을 지켰으리라.

반대편에는 가르엘이 있었다. 그는 루멘과 시선을 마주치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별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루멘은 실망감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한 시간 뒤에 마법사들이 도착할 겁니다. 준비해 두십쇼, 가르엘 경. 대장이 깨어나기 전까진 되도록 정체를 숨기시고요.”

“……예. 제가 준비할 동안 단장님을 지켜봐 주세요. 라이돈 경도요. 하루 종일 물도 안 마신 상태라, 걱정이 좀 되네요.”

“알겠습니다.”

가르엘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멘은 가르엘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카델의 모습을 응시했다.

꼭 그때와 같았다. 바스킨 마을에서 무리한 마법을 운용한 그가 후폭풍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한 결과로 며칠이나 의식을 잃었을 때.

다시는 그렇게 놔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 기분 나쁜 감정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카델과 함께 성장하며, 이젠 그가 홀로 부담을 짊어질 일은 없으리라 자신했다. 더는 카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막연히 기뻐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대장.’

그가 가르엘과 함께 봉인진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팔라익은 암기에 꿰뚫려 절명했고, 모두의 석화도 풀렸다. 그러나 카델은…….

당시의 광경을 되새긴 루멘이 거칠게 뺨을 쓸었다.

‘적룡의 가호가 없었다면 죽었을 거다.’

산산이 부서져 내린 비늘 갑옷과 피투성이의 몸. 어긋난 채 살을 뚫고 나온 뼈마디. 그런 카델을 끌어안은 채 미친 것처럼 가르엘을 불러 젖히던 라이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 반은 가르엘이 카델의 응급 처치를 마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요젠에게 추적을 부탁한 뒤 여관을 찾아갔으나, 돌아온 요젠은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할 뿐이었다.

결국 반은 그들이 제국으로 복귀하는 오늘까지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가르엘은 실종을 걱정했으나, 루멘은 아니었다. 그는 반이 기사단을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제 맡은 바를 다 한 뒤, 그대로 떠나 버린 것이다. 이유가 궁금했으나 지금은 그를 찾아 물어볼 여유조차 없었다.

상처를 회복했음에도 카델이 깨어나지 않는다. 그것보다 큰 문제는 없었으니.

가르엘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후였다. 긴 로브를 입고 가면까지 썼으나, 피로감은 가려지지 않았다. 무리하며 마기를 뽑아내 카델을 깨우려 한 대가였다.

“바깥에 벌써 마법사들이 도착한 것 같던데요.”

“이동 마법이 준비되면 부르러 오겠죠. 미리 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반 경은…….”

루멘의 옆모습을 바라본 가르엘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도 기사단의 일원이었지만, 루멘은 자신보다 반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사람이 수색을 포기했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젠 경은 다른 볼일이 있다더군요. 알아서 합류할 테니, 이동 마법진은 저희끼리 타고 가랍니다.”

“그러죠. 영면의 사자라면 대장이 어디에 있든 알아서 찾아올 테니.”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루멘과 가르엘 모두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것은 라이돈이었다. 잠시 잠에 빠져들었던 그는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카델의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반쯤 풀려 있던 눈이 잠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카델의 모습을 확인하곤 작게 흔들렸다. 말없이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가르엘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표정을 굳히며 라이돈에게 다가갔다.

카델을 잡고 있던 라이돈의 손을 낚아챈 그가 경악에 찬 목소리를 냈다.

“대체 뭘 한 겁니까?”

“…….”

“설마 지금까지 계속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어요?”

가르엘이 제게 잡힌 라이돈의 희게 질린 손끝과 카델의 뒤집힌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라이돈이 쥐고 있던 카델의 손에 살얼음이 뒤덮여 있었다. 그가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상대가 마력 고갈 상태거나, 마력의 순환이 필요할 때라면 상관없다. 오히려 컨디션 조절에 이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마력관에 이상이 없는 상태라면 말이 달랐다.

상대에게서 거부당한 마력은 주인에게 되돌아가지 않는다. 제 마력을 내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 라이돈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제 마력이 바닥에 버려지고 있음을 느꼈음에도. 온종일 마력 주입을 시도한 것이다.

“……미쳤군요. 나란히 쓰러지고 싶은 겁니까?”

“시끄러워.”

“라이돈 경까지 쓰러지면 그건 짐입니다. 단장님의 곁을 지키진 못할망정 이런 쓸데없는 소모를―”

“시끄럽다고 했잖아!”

가르엘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 라이돈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퀭하게 물든 눈가나 창백한 낯빛은 그를 안쓰럽게 비출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카델과 함께 실신할 듯한 라이돈의 모습에, 가르엘이 이마를 짚었다.

흥분한 듯 한참을 씨근덕대던 라이돈은, 이어지는 적막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안 깨어나는 건데?”

“…….”

“왜……?”

라이돈이 저 정도로 동요하는 것은 루멘으로서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눈앞에서 카델이 짓이겨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카델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다며 따라다니던 녀석이다. 그 충격이 어땠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루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장을 안아라, 라이돈. 제국으로 돌아가야 해.”

“루멘, 카델은…….”

“깨어날 거야.”

그 진지한 단언에 라이돈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듯 앓는 소리를 낸 그가 카델의 손을 쥐고 그 위에 이마를 댔다.

*

팔라익의 해머가 그들을 노린 동시에, 석화가 해제됐다. 후두둑 떨어지는 돌의 파편과 함께 몸이 자유로워진 것이 느껴졌다.

가장 먼저 반응한 라이돈이 날개를 이용해 해머의 범위를 빠져나가고, 요젠 또한 위험을 피했다. 카델은 그들처럼 재빠르게 움직이지 못했으므로, 일단 공격을 막은 뒤 안전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넓게 퍼져 있던 장막을 거두면 한 번 정도는 너끈하게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

그리 생각했으나.

[기사 ‘반 헤르도스’가 기사단을 이탈했습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를 잃었습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발견한 순간. 그의 사고가 정지했다.

“카델!”

“위험해……!”

라이돈과 요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으나, 카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해머의 그림자가 가까워지고, 전신을 짓누르는 둔탁한 충격이 전해지는 찰나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건지, [폭혼]을 사용했을 때처럼 무의 공간에 돌입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던 것 같다.

얼마 뒤엔 퀘스트 완료 창이 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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