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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비우고 라이돈이 잠든 모습을 지켜보기를 몇 시간. 카델을 움직이게 한 것은 여태 소식이 없던 요젠의 등장이었다.
라이돈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카델의 시선이 창가에 걸터앉은 요젠에게 닿았다. 언제나처럼 완벽한 그의 은신은 제국의 성내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카델은 옅은 미소를 매단 요젠의 입술을 일별하곤 협탁에 놓인 잔에 물을 따랐다.
“내가 깨어난 걸 어떻게 알았어?”
“네가 어디서 뭘 하든 알 수 있다고 했잖아.”
“……그래. 그랬었지.”
편리하다고 해야 하나, 무섭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유용하긴 한 능력이었다. 카델은 물이 든 잔을 들고 요젠의 앞으로 다가갔다.
“물 마실래?”
“아니. 괜찮아.”
그를 대신해 물을 들이켜자, 요젠의 손길이 뻗쳐 왔다. 카델의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손길이 차가운 유리잔과 그를 감싼 손가락을 더듬고, 미끄러지듯 팔을 쓸어내렸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스킨십을 얌전히 받아 내던 그가 마시던 잔을 내리며 물었다.
“내가 쓰러져 있던 동안 자리를 비웠다고 하던데. 어디 갔었어? 마족을 처리하느라 신경 못 쓴 돼지를 잡으러 갔나?”
딱히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요젠은 마족을 훌륭하게 격퇴하며 맡은 바를 다 했다. 이외의 일은 오로지 요젠 개인의 몫이었다.
요젠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족을 상대하는 일이 생각보다 바빠서. 아직 타깃을 못 정했어.”
“뭐, 좀 정신없긴 하지. 그럼 뭘 했는데?”
“찾았어.”
“새 타깃을?”
“반 헤르도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카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저히 동요를 숨길 수 없어, 카델은 처음으로 요젠이 앞을 볼 수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놀라울 만큼 한심한 모습에 단장의 자질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반을 찾으라는 부탁은 한 적 없는데.”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잖아.”
“그건 그냥 내가 의식을 잃었으니까―”
“네가 추적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멈출게. 어차피 반 헤르도스를 쫓은 건 널 위해서였으니까.”
추적은 쓸모없는 짓이었다. 반은 기사단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그를 찾아갈 생각이 없다. 만약 본인이 추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추적을 멈춰라’는 한마디가 목구멍에 달라붙어 그대로 말라비틀어졌다. 목이 타는 듯 연신 물을 들이켜던 카델이 비어 버린 잔을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동료들한테도 말했어? 네가 반을 추격 중이라는 거.”
“아니. 도망친 것 같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 찾은 걸로 해 뒀어.”
“잘했네.”
짧게 마른세수를 한 그가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겨우 비워 냈던 머리가 다시금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일단은…… 주시해 줘. 하지만 반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돼. 이쪽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을 때만…… 그때만 알려 주면 돼.”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반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는대도, 그는 자신의 도움을 바라지 않을 테다. 그럼에도 그의 행적을 좇아 달라 부탁하는 건, 아직도 놓지 못한 미련의 끝자락. 그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일 뿐이다.
입술을 짓씹자 건조해진 피부가 찢어지며 비린 쇠 맛이 흘러들었다. 따끔한 통증도 알아채지 못한 채 불안한 감상에 젖어 들기를 잠시. 요젠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것도 가져왔어. 방치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방 한구석에 가지런히 세워진 대검 하나가 들어찼다. 대검을 발견한 카델의 안광이 짧게 번뜩이다, 이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힘없는 걸음으로 대검 앞에 다가간 카델이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끄트머리에 조각된 늑대 머리는 그 격한 전투 속에서도 여전히 흠집 하나 남지 않은 상태였다. 바닥에 구른 듯 먼지가 조금 쌓이긴 했지만. 맨손으로 먼지를 훑어 낸 카델이 부산스레 눈을 깜빡였다.
‘더 좋은 걸 사 주고 싶었는데.’
황실에서 제작한 무기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었으나, 반은 거절했다. 꼭 이 대검으로 싸울 거라며 답지 않은 고집도 부렸다. 단장이 사 준 무기니까. 그의 선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가치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적어도 반에게는 그랬으리라. 꾹 입을 다물고,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무언가를 눌러 참듯 한참을 자리에 멈춰 있던 그가 휙 몸을 돌려 요젠을 마주 보았다.
“배고프지 않아? 밥이나 먹자. 제국에 돌아왔으니까, 네 신분을 어떻게 발표해야 할지도 고민해 보자고.”
“별로 배고프진 않은데.”
“이번엔 다 같이 모여서 안 먹을 테니까 벌써부터 빼지 마. 진짜 낯 엄청 가리네.”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알겠어. 혼자 먹기 외로우니까 제발 같이 먹어 줘. 중간에 라이돈이 깨도 도망가진 말고.”
묘하게 억울해 보이는 요젠에게 농담처럼 말한 카델이 협탁 위에 잔을 올려 두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을 꾹 주먹 쥔 그가 어색하게나마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그에겐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었으니.
깨어난 뒤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쿤라가 조사한 ‘마법진 조각’의 정보였다. 카델이 회복하는 동안 리셀라 고원을 찾아갔던 쿤라는 그곳에서 또 다른 마법진 조각을 발견했고, 분석에 필요한 최소한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분석 결과. 완성 예정의 대마법진은 인간계 전체를 아우르는 범위를 가졌으며, 대규모 마족, 혹은 마계를 통째로 꺼내 올 일종의 소환진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예상 범위를 바탕으로 남은 조각들의 개수와 위치 또한 특정할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약 200여 개. 예상 출현 장소 또한 소수 국가의 힘만으로 탐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다. 뭘 어떻게 해도 마계 전쟁은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멀뚱히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전쟁에서의 준비 기간은 중요하다. 적의 기습을 알고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비 역시 질의 차이가 확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계 대마법진에 대한 정보는 전략의 핵심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보를 가진 카델이 충분한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못할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입 기사단장의 추상적인 주장으로 세계 전체를 움직이는 건 힘들 테니.
“몸은 좀 어떤가. 치유사들의 말로는 며칠은 더 휴식을 취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제국의 황제, 데릭 오스마. 카델의 맞은편에 자리한 그는 기품이 몸에 밴 듯한 자세로 앉아 차를 홀짝였다. 카델 역시 향긋한 홍차로 입을 축이며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습니다. 제국의 기사가 되어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 드리다니, 부끄럽군요.”
“부끄럽다니. 이 단기간에 자네의 기사단이 해치운 고위 마족만 셋이네. 파견된 곳마다 고위 마족이 나온 것도 놀랍지만, 그 적은 인원으로 번번이 마족을 해치운 점은 가히 충격적이지. 자네가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겸손을 차린 카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제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폐하께서 지정해 주신 첫 번째 파견지인 인테 설원. 그곳으로 가기 전, 적린 기사단은 둥켈하이 왕국을 거쳤습니다.”
“둥켈하이? 스니벡 공국을 통하지 않고?”
“예. 전에 폐하는 적린 기사단의 기사 임명권을 제게 일임한다고 하셨죠.”
“그랬지.”
“새로운 기사의 영입을 위해 들렀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인물이 등장했다는 보고를 들었네. 그 가면의 사내를 말하는 건가?”
“아뇨, 폐하. 그도 새로운 기사 중 한 명이긴 합니다만, 둥켈하이에서 데려온 기사는 아닙니다. 아마 성내의 누구도 그 기사를 보지 못했을 겁니다.”
“보지 못했다? ……암살자인가.”
“예. 아마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영면의 사자’라는 별호로 유명세를 치른 암살자죠.”
카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황제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면의 사자가 누구인가. 귀족과 왕족을 가리지 않고 죽여 평민의 찬사와 귀족의 두려움을 얻은 악명 높은 암살자가 아니던가.
황제의 표정이 엄하게 굳었으나, 카델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 기사의 신분은 비밀에 부쳐 주셨으면 합니다. 적린 기사단은 제국의 기사단이며, 모두가 황제 폐하의 아래에서 제국을 수호하고자 맹세했습니다. 영면의 사자가 폐하의 땅을 피로 물들일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장담할 순 없었다. 요젠의 다음 타깃이 제국의 귀족일지, 다른 곳의 귀족일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얘기할 순 없지 않은가. 요젠에게 제국에서의 살인은 조금만 삼가 달라고 부탁하는 정도가 카델의 최선이었다.
뻔뻔스럽게 장담하는 카델을 빤히 응시하던 황제가 일순 웃음을 터뜨렸다. 설설 고개를 저은 그가 부드럽게 찻물을 넘기며 카델과 눈을 맞췄다.
“시험받는 처지에 암살자를 단원으로 들였다고 당당하게 밝힐 정도라면, 걸리는 게 없다는 얘기겠지. 만약 뭔가의 흉계를 꾸미고 있다 한들, 자네의 승부사 기질만큼은 칭찬해 주겠네.”
“저는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을 뿐입니다, 폐하. 그런 음험한 계획을 세울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제국의 기사가 되지 않았겠죠.”
“……그래. 그럼 가면의 사내는? 그도 암살자인가?”
“가면의 사내는…….”
영면의 사자 다음으로 가르엘을 소개하려니 그의 신분을 조작한 스스로도 어이가 없긴 했다. 하지만 회피할 구석은 없었고, 어차피 근시일 내에 퍼뜨려야 할 정보이기도 했으니.
혀로 입술을 축인 카델이 차마 멋쩍음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 출신의 마검사……입니다.”
“흑마법……. 잘못 들은 것 같네만. 방금 뭐라고 했지?”
“지금은 완전히 조직을 벗어났습니다, 폐하. 과거의 연이 닿아 우연히 그를 만났고, 마족 소탕을 위해 힘을 합치기로 했죠. 조직에 신물이 나 도망쳐 나온 사람입니다. 그의 흑마법이 아군을 해칠 일은 없습니다.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말이 절로 빠르게 나왔다. 하필 영면의 사자와 연달아 소개하려니 아무리 카델이라도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이제 기사 임명권을 빼앗으려나? 이미 들여올 사람은 다 들여왔으니 딱히 타격은 없겠지만……. 설마 기사로 인정 못 한다고 하진 않겠지.’
황제가 그렇게 나온다면 요젠과 가르엘을 정식으로 들일 수 없게 된다. 어떻게든 빌고 매달려 설득시킬 수야 있겠지만,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카델이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대책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충격적인 소식에 넝마가 된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황제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기가 빨린 것 같기도 한 반응이었다.
“실로 놀랍군. 암살자와 흑마법사라. 이 성에 암살자는 짐의 개인 호위를 위한 소수가 있을 뿐이고, 흑마법사는 오랜 세월 동안 성안에 발끝 하나 들이지 못했다.”
“…….”
“짐이 일임해 준 권한을 알차게 써먹은 듯하군. 과하다는 생각은 안 해 보았나?”
“실력 있는 자들입니다. 적린 기사단에도, 제국에도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못은 없다는 태도다. 그 당당함이 되레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황제는 카델을 타박하는 대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믿어 보지. 자네가 하는 것 없이 입만 산 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충분히 증명해 주었으니. 그 암살자와 흑마법사가 제국에 거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이제 새로운 기사들의 충격적인 신분 공개는 끝난 건가? 슬슬 봉인진의 보고를 듣고 싶군. 전보엔 적히지 않은 더 자세한 사항을 말해 보게. 특이점은 없었나?”
“그 전에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더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또 어떤 괴상한 출신의 기사일까. 황제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적린 기사단의 괴상망측한 조합은 단장인 카델만의 부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조합을 공표하고 수습하는 것은 황제인 데릭의 몫.
아무리 입단 권한을 온전히 내어 줬다지만,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여오는 것 아닌가. 머리가 아파진 데릭이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었으나, 카델이 꺼낸 정보는 또 다른 단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적린 기사단은 둥켈하이 왕국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르기 위해 ‘고요의 산맥’을 넘었죠.”
“적룡의 둥지를……?”
“예. 그곳에서 적룡을 조우했습니다, 폐하.”
암살자나 흑마법사와는 비견이 안 되는, 듣기만 해도 혼미해지는 카델의 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