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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보이네요, 단장님.”
책상 끝에 가볍게 걸터앉은 가르엘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들과 그 중심에 파묻히듯 고개를 처박은 카델을 부드럽게 훑어냈다. 느리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켜켜이 쌓인 피로로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차라리 마족을 상대할래…….”
“이런, 정말 피곤하신가 보네.”
앓는 소리를 낸 카델이 괴롭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마족과 싸우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제국에 복귀한 뒤로 보고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느라 안 그래도 바쁜 나날을 보냈는데, 연회가 끝난 뒤에는 말 그대로 숨 쉴 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쿤라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대마법진 조각의 위치 예측과 기사단장들의 마족 대응 회의, 마법사 신분으로 참여하게 된 마법진 분석 회의 등,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업무가 몰아닥친 것이다.
만약 여기서 적린 기사단이 대마법진 탐색 작전에 투입된다면, 카델은 전쟁이 아닌 과로로 죽을지도 몰랐다.
“호계 기사단 단장이 왜 매번 자진해서 밖으로 나도는지 알겠어. 어떻게 밖에 있을 때보다 할 일이 많지? 단장들은 원래 다 이렇게 살아?”
“흠, 일반 단장은 몰라도 국가 직속 기사단의 단장은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게다가 지금은 시기도 안 좋잖아요.”
힘들어하는 카델이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 가르엘이 자리를 옮겨 그의 뒤편에 섰다. 그리고 돌처럼 뭉친 어깨를 마사지하듯 살살 주물러 주었다.
“보고서 작성 정돈 도와드릴 수 있는데. 대신 해 줄까요?”
“……진짜?”
“단장으로 산 세월이 얼만데요. 보고서도 다 양식이 있답니다.”
“그럼 해 줘. 제발. 부탁할게.”
“맨입으로요?”
“갖고 싶은 거 있어? 나 돈 많아. 황제가 마시는 술은 어때. 나 흑마법 쓰잖아. 지하실 가서 훔쳐 와 줄 수도 있어.”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릴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난데없는 헛소리의 향연에 가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주무르던 어깨를 쓸어내리며 팔을 문지르고, 허리를 숙여 카델의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가 언제 단장님한테 그런 걸 원했던가요. 전 술보단 몸이 좋은 사람인데.”
고개를 돌린 카델이 제 앞으로 다가온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잠시 멍한 정신을 가다듬듯 눈을 깜빡이던 카델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변태 같아.”
“언젠 변태 가면으로 부르겠다면서요.”
“그래서 뭘 원하는데. 키스? 키스면 돼?”
“키스는…… 그걸로만 끝낼 자신이 없는데?”
능청스럽게 미소 지은 가르엘이 허리를 세우고. 그의 음흉한 눈빛을 발견한 카델의 얼굴이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 최후의 마지노선은 사수해야 한다는 이성과 일하다 죽기는 싫다는 생존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듯했다.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표정 변화를 즐겁게 감상하다, 그의 검은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주며 말했다.
“싫으면 관두죠. 저도 나름 바쁜 몸이라.”
“……일단 조건부터 듣고 생각할래.”
중요한 거래를 성사하듯 진지하게 눈을 빛내는 카델에게, 가르엘은 보고서를 대신 작성하는 동안 카델이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을 말했다. 그의 조건을 들은 카델의 표정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정말 그거면 돼?”
“그럼요.”
“생각보다 쉽긴 한데…….”
“우리 단장님을 상대로 흑심을 채우려면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가르엘을 훑어 내린 카델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르엘은 빈 의자에 대신 걸터앉고는, 뚱한 얼굴의 카델을 보며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들겼다.
“앉아요, 단장님. 사양 말고 푹 자 둬요.”
본인이 보고서를 작성할 때까지 품에 안겨서 자고 있으라니. 간단한 조건이긴 하다만, 간단하기에 더욱 변태 같은 발상이었다.
사각. 사각.
고요한 집무실 안. 가르엘의 정갈한 글씨가 빈 종이를 채워 나갔다. 진중한 표정과 바른 자세, 막힘없는 집필은 언뜻 그가 여전히 한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인 것처럼 건실하게 비쳤다.
그의 품 안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한 남자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보였을 테다.
‘불편하다고 가 버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자네. 정말 많이 피곤했나 보군.’
한 면을 꽉 채운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긴 가르엘이 제 어깨에 기댄 작은 머리통을 일별했다. 처음엔 몸이 온통 딱딱해서 돌에 누운 것 같다느니, 심장 소리가 거슬린다느니,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내더니. 이젠 그의 허리까지 끌어안은 채 편안한 단잠에 빠져 있었다.
품을 메운 무게감이 귀엽기만 하다. 무게감이 귀엽다니. 정말 중증이지 않은가. 새근거리는 숨소리나, 어린애처럼 뜨끈한 체온, 체향인지 목욕 향인지 모를 달큰한 냄새까지. 모조리 먹어 치우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카델의 다정함이나 단장으로서의 능력, 카리스마,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도,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취향이었다. 하는 행동, 짓는 표정 하나하나가 무서울 만큼 매력적이라, 진지하게 카델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악마가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악마라기엔 너무 힘들게 살아서 그런 의심은 관둔 지 오래지만.’
펜을 내려 둔 가르엘이 제 어깨에 뺨을 댄 카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모든 걸 내려 두고 푹 쉬기를 바랐다. 비밀 없는 사이가 되기로 하지 않았는가. 이미 카델에겐 비밀이 생겨 버린 듯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자신의 품에서 안식을 찾길 바랐다.
‘……반 경의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힘드려나.’
카델과 루멘은 그를 이미 떠난 사람이라고 했으나, 가르엘은 아직 기사단과 반 사이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전말을 모르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뭐가 됐든, 카델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서는 반이 필요하다. 얕은 한숨을 삼킨 가르엘이 다시금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이서 뭘 하는 겁니까?”
벌컥 문이 열리며, 굳은 얼굴을 한 루멘이 등장했다. 그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카델과 그를 껴안고 앉은 가르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야말로 꼴값을 하는 장면에 루멘의 눈빛이 빠르게 식어 갔다. 무어라 변명해 보려 입을 달싹이던 가르엘 역시 이 자세의 시작이 자신의 흑심이었음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이 피곤해하시길래요. 재우는 중입니다.”
“피곤해하면 침대에서 재우는 게 상식 아닙니까?”
“전 이런 쪽의 상식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라서. 루멘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넉살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나, 루멘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가르엘과의 끔찍했던 첫 만남이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하룻밤 상대와 대장을 동등하게 여기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절 그런 무뢰한으로 생각하시면 섭섭한데요.”
“다행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열두 토막이 나도 되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봤을 텐데.”
“……살벌하셔라.”
평소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질투를 해 대는 루멘을 조금 더 놀려 봤을 테지만, 지금은 반의 이탈로 기사단의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예민해진 상태였다. 괜한 트러블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가르엘은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는 카델을 가볍게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단장님. 아버지가 찾아오셨어요.”
“……누가 아버지라는 겁니까.”
“아,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루멘 경의 보수적인 참견에 저도 모르게 그만…….”
능청스럽게 발뺌하는 가르엘에게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카델이 눈을 떴다.
“뭐야……. 보고서 벌써 다 썼어……?”
“아뇨,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그럼 왜 깨워.”
“루멘 경이 찾아왔어요.”
짜증과 잠기운이 물씬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졸지에 잘 자던 사람을 깨운 진상이 된 루멘이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카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기어코 카델을 일으켠 그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해 주었다.
“폐하가 부르셔, 대장. 집무실로 찾아오래.”
“여기도 집무실인데 왜 굳이 자기 집무실로 오라는 거야. 지가 찾아오면 어디가 덧나? 내가 급해? 지가 급하지.”
확실히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루멘은 카델 대신 주위의 기척을 살피며 그를 달래 주었다.
“어쩔 수 없잖아, 황젠데.”
“여긴 신분제 폐지 언제 되냐? 지겨워서 못 살겠네.”
“……대담한 발상이었어. 내 앞에서만 얘기하도록 해.”
잠기운에 빠져 한참을 투덜거리던 카델이 큰 하품과 함께 루멘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늙은 황제를 오라 가라 할 수 없지. 가르엘, 나 돌아올 때까진 보고서 마무리 지을 수 있지?”
“물론이죠.”
“루멘, 넌 라이돈랑 요젠 찾아서 여기로 데려와 줘. 황제가 얘기할 게 뭔지 알 것 같으니까, 돌아오면 말해 줄게.”
황제가 그를 따로 불러내 하려는 말. 그건 분명 마계 대마법진 수색 작전에 적린 기사단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결정일 테다.
과연 황제는 어디까지 기사단을 굴릴 것인가. 전혀 기대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카델은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렇게 마주한 황제는, 쓸데없는 서두를 건너뛰어 카델이 원하는 결과를 내주었다.
“이번 마계 대마법진 수색 작전에 자네의 기사단은 포함하지 않을 것이네.”
“큽……!”
카델은 본능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쾌재를 참아 내며 허벅지를 내리쳤다. 만약 황제가 그들을 수색 작전에 투입했다면, 미쳐 버린 라이토스가의 서자가 두 번째 황족 암살 시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카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릭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아쉽다고 생각하진 말게. 적린 기사단은 수색이 완전히 끝난 후, 큰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에 파견될 테니.”
“알겠습니다.”
“수색 기간은 최소 1년을 보고 있지만, 그 기간을 넘긴다면 기사단도 수색에 참여하게 될 수는 있네.”
1년. 그 기간 동안 수색의 결과가 어찌 되든, 마계 전쟁은 일어난다. 카델이 해야 할 일은 한결같았다. 얌전히 데릭의 지시를 듣던 카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1년간의 수색 기간 말입니다만, 폐하. 그동안 저희 기사단은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싶습니다.”
“다른 곳……?”
“마계 전쟁을 대비해 수련에 힘써야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기사단에는 흑마법사와 암살자, 요정이 있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선 수련에 한계가 있어요.”
“맞는 말이군. 해서, 생각해 둔 곳은 있는가?”
수색 임무가 결정되기 전까지 내내 생각해 둔 계획이었다. 마계 전쟁 이전에 부하들의 능력치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련 공간.
“고요의 산맥에 가고 싶습니다.”
그곳보다 적당한 장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