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예민해진 쿤라에게 어렵사리 위치를 물어 도착한 곳에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한가로이 사과를 베어 물고 있는 요젠이 있었다.
그는 카델이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지면으로 착지했다. 높이가 꽤 되었음에도 추락의 소음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카델의 앞으로 다가온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맥의 지형을 파악하려던 것뿐이야.”
카델은 갑작스러운 노성에 놀랐을 요젠을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물론 나야 알지. 네가 안 좋은 의도로 암기를 퍼뜨린 게 아니었다는 걸. 하지만 적룡은 그걸 모르거든. 지금 한창 신경이 곤두선 시기이기도 하고.”
요젠에게는 쿤라가 그의 악의 없는 행동을 오해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라고 둘러댔으나, 사실 카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설마 케인슈타인 백작가에서 암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던 일을 담아 둔 건가.’
쿤라는 요젠이 암기 사용자임을 알고 있다. 카델의 부하가 자신의 구역을 함부로 들쑤시지 않으리란 것도 알 테고. 그런데도 굳이 콕 집어 요젠의 암기가 거슬린다 지목한 것은, ‘힘이 온전하면 이런 암기 따위 자면서도 감지한다’는 일종의 과시처럼 느껴졌다.
‘아니었으면 좋겠네. 진짜 쪼잔해 보이니까.’
어찌 됐든 시간이 지나면 쿤라의 예민함도 한풀 꺾일 테다.
“내가 잘 얘기해 둘 테니까, 일단 지금은 쉬어 둬. 혹시 움직이는 게 불편하면 내가 도와줄게.”
“불편하진 않아. 거슬릴 뿐이지.”
카델이 나무둥치에 기대앉자, 요젠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잎새로 비쳐 드는 햇볕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둘 사이로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대화가 오가지 않음에도 불편함은 없다. 요젠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주 오래전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당시 느꼈던 지독한 살기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만으로 편안해진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암살자에게 있어 이보다 큰 호의는 없을 테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그 고요한 분위기에 잠겨 있던 카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시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1년 정도 남았어. 그동안 뭘 할 거야?”
일부러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을 고르긴 했지만, 사실상 요젠에게 수련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완성형이다. 인간과 마족의 살해 방식이 달라 잠시 헤맬지는 몰라도, 그건 약간의 실전만으로 보완할 수 있다.
요젠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는 카델이 어떤 의도로 질문을 던졌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일 순위가 없으면 이 순위를 찾아가는 게 당연하잖아.”
상대할 마족이 없다면 본래의 타깃을 찾아 죽이면 된다.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었고, 카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덤덤하게 답하는 카델의 옆에서, 요젠이 고개를 기울였다. 쓱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카델의 얼굴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제 눈가를 거침없이 더듬었으나, 카델은 얌전히 기다릴 뿐이었다.
한차례 카델의 얼굴을 쓸어내린 요젠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1년 내내 여기 머물렀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알기 쉬워, 넌. 심장 소리도, 표정도, 목소리도, 전부 솔직하니까.”
고집스레 침묵을 지켰으나, 사실은 그랬다. 그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암살을 하든 학살을 하든 막을 이유는 없다. 그는 케인슈타인 백작 같은 쓰레기들 아래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구원해 줄 테니.
다만, 그동안 요젠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까 염려됐다. 카델은 요젠이란 인간을 알고 싶었다. 서로 간 필요에 의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으나, 그건 카델의 최종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델은 그의 부하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높은 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랐다. 자신을 도와 치열하게 싸워 준 대가를 받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싶은 것이다.
루멘에겐 동료가, 라이돈에겐 자유가, 가르엘에겐 긍지가 필요하다. 그것을 안겨 주기 위해서라면 카델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요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단순한 정의? 약자의 구제?
만약 요젠과의 1년을 별 소득 없이 흘려보낸다면, 마계 전쟁이 끝나고도 그에게 마땅한 보답을 해 주기 힘들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같이 갈까?”
“어딜?”
“네 암살 작전을 지켜보는 거. 어떻게 생각해?”
차마 돕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렇게라도 요젠을 알아 가고 싶었다. 나름대로 큰 결단이 필요했던 발언을 마친 후 묘한 긴장감과 함께 요젠을 바라보자, 예상보다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필요 없어. 난 암살 동료가 필요한 게 아니야.”
“…….”
“날 네가 있는 양지로 끌어올려 보겠다며. 함께 간다면 넌 네 위치를 지킬 수 없어. 그걸 감안하고 말한 거야?”
“……아니.”
괜히 욕심부렸다가 신뢰만 깎였다. 의기소침해진 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곧 본래 말투로 돌아온 요젠이 입을 열었다.
“한 달에 일주일씩 자리를 비울 거야.”
“…….”
“그 외에는, 전부 네 옆에 있을게. 그럼 됐지?”
놀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기쁜 듯한 웃음소리에, 요젠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누구도 그를 알아 가려 하지 않았고, 호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기피 대상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다가오려는 카델이 부담스러우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감정일까.
“그럼 또 기척 없이 머무르지만 말고, 왔으면 왔다고 확실하게 말해 줘야 해. 알았지?”
“……응. 알겠어.”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알아내기 위해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
“이렇게 방치할 거면 왜 부른 건데요?”
쿤라가 머무는 공동 안. 카델은 바닥에 정좌를 틀고 앉아 결계 강화인지 뭔지를 하는 쿤라를 흘겼다. 짜증스런 재촉에도 쿤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벌써 30분째 할 일 없이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컴컴한 동굴이라 볼 것도 없어요. 재미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눈 감고 있을 거면 저 가요?”
지금 쌓인 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든단 말인가. 대꾸도 없는 걸 보니 그냥 골탕 먹이고 싶어서 부른 게 틀림없었다.
카델은 마지막으로 쿤라를 부르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 진짜 갈 겁니다. 뭘 시키든 내일 시켜요. 듣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중에 인사도 없이 갔다고 갈구지나 말아요.”
그렇게 할 말을 마친 카델이 등을 돌리려던 순간.
“……시끄럽기 짝이 없군.”
쿤라의 손이 우악스럽게 카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강한 악력에 버텨 볼 재간도 없이 휘청거리던 카델이 요란스레 넘어지고.
“뭐예요! 놔요!”
쿤라는 제 무릎 위에 엎어진 카델의 등에 팔을 올리곤 가볍게 짓눌렀다. 순식간에 자유를 박탈당한 카델이 바둥거리며 그의 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발버둥은 쿤라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고, 되레 역효과를 냈다.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입 다물거라.”
낮게 일갈한 쿤라가 카델의 둔부를 때렸다. 찰진 소리를 동반하며 퍼져 나가는 고통에, 카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쿤라는 그제야 구겨져 있던 미간을 펴며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한 듯했으나, 카델은 아니었다.
“허… 허어…….”
커다랗게 벌어진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삐그덕 돌아가는 고개는 망가진 로봇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이 평온한 쿤라의 얼굴을 담아냈다.
“미, 미쳤어요, 당신? 지금… 지금 뭐 한 거예요?”
“또 맞고 싶은 거냐?”
“지금, 지금 남의 엉덩이를……. 이 변태 새끼가!”
“……뭐?”
떨리는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지르자 쿤라의 미간이 다시금 구겨졌다. 짜증스레 한쪽 눈을 치켜뜬 그가 홍당무처럼 빨개진 카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변태 새끼? 지금 이 몸을 그리 부른 게냐?”
“이거 놔요! 난 아기 때도 엉덩이를 맞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럼 지금부터 맞으면 되겠구나.”
코웃음을 친 쿤라가 보란 듯이 또 한 번 둔부를 내리치자, 파들파들 떨리던 카델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수치심과 경악, 원망이 섞인 눈빛이 쿤라를 향하고. 그 억울함을 마주한 쿤라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조용히 있으면 맞을 일도 없겠지.”
“이, 이……!”
“마른 녀석이 엉덩이 손맛은 좋군. 뭘 노려보지? 한 대 더 때려 주랴?”
금방이라도 쿤라를 패 죽일 듯 분노로 부들거리던 카델이 휙 고개를 돌려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잠잠해진 카델을 일별한 쿤라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작업이 끝나면 할 말이 있으니.”
만약 자신에게도 호감도가 있다면, 지금 쿤라를 향한 자신의 호감도는 마이너스일 것이다. 어떻게든 그의 역린을 찾아 피의 복수를 하리라. 비참하게 엎드린 채 울분을 삼킨 카델이 홀로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