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라의 결계 강화는 그로부터 3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그동안 카델은 시끄럽게 굴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보로 수치스러운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눈을 붙였다.
“…….”
기다란 그림자가 카델을 덮치듯 드리웠다. 지척으로 다가왔음에도 웅크린 몸은 단잠에 빠진 듯 미동조차 없다.
쿤라는 그런 카델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제법 불량한 자세로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 위, 긴 적색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가볍게 머리칼을 쓸어 올린 쿤라의 눈에 일순 이채가 스쳤다. 불쑥 뻗어진 커다란 손아귀가 카델의 얼굴을 향하고.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단단한 껍질을 내리치는 듯한 경쾌한 타격음과 짧은 비명이었다.
“아악!”
“일어나라, 반쪽이.”
“뭐야……?”
“뭐긴. 딱밤이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번쩍 눈을 뜬 카델이 비몽사몽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제 이마를 감쌌다. 잠기운이 달아날수록 얻어맞은 이마에 열이 몰리며 통증이 생생해졌다.
“왜 자꾸 때려요! 깨우고 싶으면 말로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무식하게 구는 거예요?”
“뭘 얼마나 세게 때렸다고. 엄살이 심하구나.”
인간형이 됐다고 본인이 정말 인간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인가. 점점 부어오르는 이마를 문지르며 매섭게 눈을 치떴으나, 쿤라는 뻔뻔스럽게 눈썹을 까딱일 뿐이었다.
“……말을 말죠. 할 일은 다 끝났어요?”
“그래.”
“그럼 얘기해 봐요. 빨리 듣고 저녁 먹으러 가야 하니까.”
잔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봤자 쿤라의 눈에 비친 카델은 먹이를 빼앗겨 분개한 다람쥐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성난 것을 달래기보다 지켜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 존재.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쿤라가 여전히 이마를 가리고 있는 카델의 팔을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작게 솟은 혹을 가볍게 건드렸다.
“왜 건드…… 와아악! 불! 불붙었잖아요!”
“이리 시끄러워서야.”
쿤라가 건드린 혹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곧 빠르게 사그라졌다. 그동안 제 이마에 불이 붙었다는 충격에 휩싸였던 카델은 사라진 열감과 함께 자취를 감춘 고통에 멈칫했다.
조심스럽게 다시 이마 위를 더듬자, 조금 전까지 웅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혹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쿤라에게 치유 능력까지 있었던가. 놀라워하는 카델의 앞으로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반쪽이. 넌 마계 전쟁의 요주의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지?”
“예……?”
마계 전쟁의 요주의 인물이라니. 쿤라의 질문에 카델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그야 셀 수 없이 많지. 아쉬브카만 봐도 그놈이 완전히 빠져나왔을 땐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막막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인데.’
지금까지도 꾸준히 고위 마족을 처치해 왔지만, 마계 전쟁의 싸움은 급이 다르다. 오죽했으면 대규모 패치 이후 퀘스트가 막혀 스토리를 보지 못한 유저들의 항의가 빗발쳤겠는가. 얼마 뒤에 기사 성장을 위한 재화를 잔뜩 뿌려 주었지만, 끝끝내 난이도는 낮추지 않았다.
‘그 덕에 입소문이 나서 유입은 더 늘었던 거로 기억하지만.’
게다가 빨리 깨겠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무과금이나 소과금 유저도 어찌어찌 클리어는 가능했다.
문제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이 느긋하게 해치우겠다고 마음을 먹든 말든, 전쟁의 흐름과 속도는 개인의 의지를 거스를 것이다. 과연 자신의 기사단이 그 각박한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금세 심각해진 낯으로 뺨을 문지르던 카델이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나 쉬운 놈이 없는데요. 한 놈만 골라내긴 어려워요.”
“……넌 정말 ‘운명의 이야기’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모양이군.”
“그럼 제가 그런 거로 거짓말을 쳤겠어요?”
‘운명의 이야기’란 쿤라가 받아들인 게임 속 ‘메인 스토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쿤라 역시 카델의 설명으로 그가 스토리의 큰 틀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 세세한 설정이나 순서들엔 무지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쿤라가 말을 이었다.
“마계 전쟁의 종결을 위해 무조건 죽여야 할 마족. 그 녀석은 전투 인원이 아니야.”
“전투 인원이 아니라뇨?”
“마계 대마법진의 주인. 그놈이 전쟁의 핵심이다.”
마계 대마법진의 주인이라니. 설마 그 어마어마한 마법진을 한 명이 만들었다는 소릴까? 예상 밖의 전개에 카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쿤라는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마왕은 이미 1차 마계 전쟁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간신히 죽음은 면했기에 놈의 힘으로 봉인된 마계의 숨통을 이을 수 있었지만, 녀석은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곧 죽어. 그러니 현 마왕에겐 전쟁을 일으킬 힘도, 권력도 없지.”
“…….”
“그렇다면 누가 마왕을 대신해 마계의 봉인을 풀고자 나섰을까. 그건 마족들을 이끌 만한 표면적인 권력과 인간계에 대마법진을 설치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동시에 가진 놈밖에 없어.”
힘을 잃은 마왕의 뒤를 이어 마계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존재. 보통 그런 존재는…….
“후계자가 있는 겁니까?”
“내 기억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마왕의 자식들은 모조리 전사했다.”
“그럼…….”
“하지만 애초에 참전조차 하지 못한, 전투력이 전무했던 자식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묘한 긴장감에 목이 탔다. 건조한 입술을 혀로 쓸어내린 카델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던 때. 쿤라의 나지막한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에밀리아 스웰르. 당시엔 어린애에 불과했던 데다, 부각된 재능도 없던 막내 공주지. 싸울 수 없기에 위협도 되지 않았고, 승리가 코앞이니 굳이 공주를 찾아내 죽이는 것보다 봉인을 서두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만…….”
“…….”
“인간들의 멍청한 선택이었지. 그 녀석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싸우는 타입이었던 모양이야. 결국 마계의 부활을 알리는 건 누구도 아닌 그 어린 공주의 역작이 될 거다.”
쿤라의 판단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전쟁에서 아무리 많은 마족을 죽이고 그들을 다시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한들. 대마법진의 주인, 에밀리아 스웰르를 죽이지 못한다면 전쟁은 언제고 다시 발발할 것이다.
그리고 카델은, 이미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에밀리아……. 그 녀석의 정체가 마계의 마지막 공주였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스토리가 아닌, 바로 이 세계에서 종종 듣곤 했던 이름.
“오오, 성공이다, 성공! 진짜 소환됐잖아. 대박이잖아! 어? 천재냐고, 에밀리아!”
“에, 에밀리아 누나가 전부 처, 청소하랬으니까. 다 죽일… 죽여 버릴 거야….”
“미, 미안합… 에밀, 리아…….”
“에밀리아 양이 말했지! 최근 소환진을 통해 빠져나간 동족들이 크게 다치거나 복귀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 또한 조심하라고!”
만난 고위 마족마다 빠짐없이 ‘에밀리아’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이리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대마법진의 주인이자 현 마계의 유일한 후계자일 줄은 몰랐다.
‘스테이지에서 상대한 적 없던 적이니까. 전투 인원이 아니라 그런 거였나……. 어쩌면 컷신에서만 등장하는 주요 인물일 수도 있겠어.’
안 그래도 빡빡한 기준을 가진 시스템이다. 전쟁의 씨앗을 확실하게 제거하지 않는다면, 클리어를 인정해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게임처럼 전투만 승리해도 퀘스트를 깼다고 봐줄 수도 있지만…….’
에밀리아를 놔두면 먼 훗날에라도 인간계는 다시금 위협받게 된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 세계를 떠난대도, 부하들은 이곳에 남는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에 조금의 위험 요소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면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텐데요. 꼭꼭 숨어서 마족에게 도움을 줄 겁니다.”
“그래. 그러니 방법은 그 공주님을 바깥으로 끌어내든, 직접 마계로 쳐들어가든. 두 가지뿐이야.”
“이쪽에서 마계로 들어가는 게 가능합니까?”
“마계의 봉인이 풀리면 가능하지. 대마법진이 발동되면 인간들의 봉인진은 효력을 잃을 거다. 서로의 구역에 침입이 가능해질 거야. 물론 인간계에서 마계로 내려가는 쪽이 훨씬 까다롭고 위험하겠지만, 뭐……. 나눠 준 힘으로 잘 처리해 보거라.”
끝까지 직접 도와주겠다는 소리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쿤라의 목적은 인간계의 구제가 아니니까.
그가 바라는 것은 인간과 마족의 충돌 속에서 죄 없는 것들을 보호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붕괴를 막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간섭을 할 뿐이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겠지. 설득할 자신도 없고. 최선의 방법은 에밀리아를 인간계로 끌어내는 건데…….’
현재로선 마계에서든 인간계에서든, 에밀리아를 찾아 처리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을 치르면서 에밀리아와 접촉할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델이 쿤라를 마주 보며 말했다.
“더 많은 힘을 나눠 달라 조르진 않을게요. 대신 당신이 아는 마계의 정보를 전부 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