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3화 (303/521)

*

고요의 산맥에서의 수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루멘은 새롭게 얻은 기술을 다듬으며 완성도를 높였고, 가르엘은 빛과 마기의 혼용을 단련했으며, 라이돈은 카델과 함께 협동 마법을 훈련했다.

요젠 또한 한 달에 3주씩 산에 머물며 다른 동료들과 기술을 맞춰 보곤 했다. 오로지 성장과 단합에 초점을 둔 시간이었다.

그렇게 10개월이 흐르고, 황제가 예고했던 탐색 기간을 2개월 앞둔 시점. 일주일의 외부 활동을 마친 요젠이 카델을 찾았다.

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계곡물에 얼굴을 푹 담갔다. 뇌가 시릴 만큼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체온을 낮추며 땀을 씻어 냈다. 한참 그 색다른 감각을 즐기던 카델이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젖은 얼굴을 벅벅 문지른 그가 상쾌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산에서는 항상 귀걸이를 뺀 채로 지냈기에, 젖은 머리와 맑은 눈동자 모두 본래의 색을 띠고 있었다.

물기 맺힌 속눈썹 아래 드러난 고동색 눈동자가 옆자리를 훑었다. 그곳엔 바닥에 앉아 카델을 지켜보듯 고개를 기울인 요젠이 있었다.

“이번엔 하루 일찍 왔네?”

“응.”

그의 옆에 몸을 눕히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근래엔 유독 날씨가 좋았다. 비도 오지 않고, 볕도 세지 않다. 수련으로 지친 몸을 아무 곳에나 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뻐근한 근육을 살살 달래 주었다.

요젠이 카델의 위치를 가늠하듯 손을 뻗었다. 카델은 그런 요젠의 손을 덥석 쥐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힘들어서 좀 누워 있어. 너도 누울래?”

“난 괜찮아. ……여전히 열심히 하는구나.”

기다란 손가락이 카델의 손바닥을 간질이듯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말랑하던 카델의 손은 산에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거칠어졌다. 벗겨지고 아물기를 반복한 피부에선 그간의 노력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던 카델이 작게 웃으며 손을 오므렸다.

“열심히 해야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2개월. 혹은 그보다 적은 시간. 지척으로 다가온 전쟁을 예감한 듯, 쿤라는 최근 바깥으로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오로지 결계 강화에만 힘을 썼고, 카델을 따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그만큼 훈련 시간을 늘리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안감은 쉬이 해소되지 않았다.

전쟁이 다가온다. 마지막 퀘스트가 다가온다. 그 두 가지 문제가 가진 각기 다른 부담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번 타깃은 누구였어?”

기분을 전환하듯 주제를 돌리자, 손아귀에 있던 요젠의 손이 빠져나갔다. 매달 요젠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면, 빠짐없이 타깃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면 그 타깃이 어떤 짓을 저질렀고, 요젠은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고, 마지막엔 어떤 처벌을 내렸는지. 그런 것들을 듣곤 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아 하던 요젠도 이젠 여행담을 얘기하듯 별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요젠?”

하지만 오늘의 요젠은 조금 달랐다. 그는 곧장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정면으로 틀며 예쁜 호선을 그린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10개월간의 동거 생활로, 카델은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망설임. 요젠은 뭔가를 망설일 때마다 저렇게 뻣뻣하게 굴곤 했다.

“요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

“이번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다니……. 설마 실패한 거야? 들켰어?”

다급하게 묻자 요젠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걸까. 죽이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되레 이상한 일을 겪은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을 찾아갔어.”

오랜 시간 애써 잊으려 했으나 잊지 못한, 그리운 이름이 들려왔다. 한참이나 입을 벌린 채 벙쪄 있던 카델이 간신히 낸 소리라곤, 얼빠진 반문이었다.

“……누굴 만났다고?”

“예전에 네가 말했잖아. 반에게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얘기하라고.”

“…….”

“몇 달 전부터 반의 ‘그림자 분신’이 이상 행동을 보였어. 처음엔 그냥 넘어갔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졌거든. 그래서 이번에 확인을 위해 찾아갔고……. 응. 도움이 필요해 보였어.”

타깃이 아니라 반을 찾아갔었구나. 흘리듯 말한 약속을 지켜 주었구나. 그런 감상을 전부 밀어 내며, 요젠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니…….’

다친 걸까? 누군가의 모략에 빠진 걸까? 괴롭힘을 당했나? 혹시 과거처럼 삶을 포기하려고 하나? 온갖 걱정과 불행한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생각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요젠은, 침묵하는 카델의 앞에서 복잡한 혼란의 답을 주었다.

“광전사의 고질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 문제를 해결해 줄 순 없더라도, 직접 만나 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요젠이 감지했던 반의 오라는 ‘파멸의 기운’에 가까웠다고 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고, 마땅히 막을 방도도 없어 보인다고.

그는 여느 광전사처럼 본인의 힘에 잠식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 두는 게 어떻냐고. 요젠은 권유했다.

‘왜 그렇게 된 거야. 대체 왜…….’

그가 자신을 떠나 잘 살기를 바랐다. 아주 가끔 자신과의 여행을 떠올리며, 먼 훗날의 언젠가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모험이었지, 기분 좋게 꿈꾸었으면 했다.

자신도 잊고, 가능하다면 카델 라이토스도 잊고. 그가 그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매일 몇 번씩 떠오르는 반의 존재를 꾹꾹 밀어 내며, 그 위에 행복의 기도를 덮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 때문이야. 내가 반의 인생을 망친 거야.’

그는 자신을 떠나서도 행복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에 결국은 미쳐 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때리기라도 하라며 종용해야 했다. 억지를 부려야 했다. 그는 망가지지 않으리라 확신해 버리고는 태평하게 외면해선 안 됐다. 자신에겐 다른 동료가 있지만, 반은 혼자였다. 그걸 망각해선 안 됐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반. 널 위한 선택이란 건 대체 뭐야?’

마지막 인사를 위해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 외의 어떠한 이유도 자신이 반을 만나는 데에 정당한 당위성을 줄 순 없었다. 자신은 반에게 있어 철저한 기만자일 뿐이니까.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사방이 컴컴했다. 카델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요젠과 헤어진 뒤, 거의 반쯤 넋을 잃고 걸었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어디를 가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어두운 하늘을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늦으면 다들 걱정할 텐데.’

쿤라가 있는 한 카델이 이 산에서 다칠 일은 없다. 그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찾으러 나서진 않을 테지만, 오래 자리를 비우면 쓸데없는 걱정을 사게 될 테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건너편에서 왁자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싫다니까, 루멘?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귀찮게 굴지 마!”

“안 괜찮은 거 아니까 귀에 대고 소리 지르지 마라.”

“아하하! 내 마음을 루멘이 어떻게 알아? 날개도 없는 밋밋한 인간이면서―.”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카델은 곧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인물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루멘과 라이돈이었다. 저들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의아해하며 나아가자, 곧 두 부하의 모습이 드러났다.

“너희…….”

“자기!”

라이돈은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에 안긴 채 맥없이 흔들거리던 카델이 어깨 위로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루멘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찾으러 왔어, 대장.”

“내가 길이라도 잃었을까 봐 걱정돼서 온 거야?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길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렵사리 라이돈의 품에서 벗어난 카델이 멋쩍어하며 변명했으나,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카델은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남자를 돌아보았다.

라이돈은 묘하게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쉬었고, 루멘은 뭔가를 고심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하며 입을 떼려던 때.

“요젠에게 들었어. 반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

“내가 캐물은 거야.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카델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요젠이 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걸까. 그리고 왜 그걸 캐물어 자신에게 알리는가. 의도를 알 수 없어 황망하게 멈춰 있으려니, 라이돈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멘이 알고 싶지 않은 소식을 나한테 억지로 알려 줬어. 정말 괘씸하지 않아?”

루멘은 얻은 정보를 동료들에게도 알린 듯했다. 가르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라이돈에게만 선택적으로 알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 묻는 듯한 카델의 시선에, 루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찾아갈 거야?”

“……모르겠어.”

“그렇군.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카델의 망설임을 예상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린 그가 앞으로 다가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푸른 눈동자가 유독 또렷하게 빛났다.

“모르니까 그 녀석을 그냥 보낸 거겠지.”

“무슨 소리야, 그게.”

“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크게 싸웠을 수도 있고,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멀어진 걸 수도 있고. 이유야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

“그 녀석은, 대장이 붙잡았다면 잡혔을 거야.”

루멘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카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붙잡았다면 잡혔을 거라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였다. 경멸당했을 거다. 욕을 먹었을 거고, 진저리를 치며 달아났겠지.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항변하듯 말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그랬겠지. 기사단을 떠나기 전에 봤던 반의 모습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까. 평범한 일로 그렇게 망가질 녀석이 아니란 것쯤은 알아.”

카델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자신이 보았던 반은 기사단을 이탈하기 직전까지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의 심중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런데 그것까지 연기였단 말인가. 루멘은 대체 무엇을 봤던 걸까.

원치 않던 주제가 이어지자 입술이 바싹 말라 갔다.

“하지만 대장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반은 정신 나가지 않은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어. 그걸 알아야 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반을 찾아가, 대장.”

손이 떨렸다. 떨림을 감추듯 주먹에 힘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어깨가 떨렸다. 카델은 루멘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넌 아무것도 몰라.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찾아가면, 반은 더 망가져.”

“망가진대도 보러 가.”

“너……!”

“반을 위한 게 아니야. 대장을 위한 거지.”

곧은 손이 떨리는 어깨를 감싸 왔다. 루멘은 카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숙여 억지로 시선을 맞춰 왔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약간의 슬픔과 우려.

“그리워하고 있다는 거 알아.”

“…….”

“대장의 존재만으로 도움이 될 거야. 망가질지도 모르지만, 보지 않으면 그 녀석은 확실하게 무너져.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동료니까. 같은 사람을 좋아하니까…… 알 수 있는 거야.”

전부 희망에 찬 헛소리일 뿐이다. 루멘과 반이 따르는 사람은 다르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랬기에 반은 떠났고, 그랬기에 미쳤다.

자신의 존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반을 보러 간다는 건 이기적인 욕심의 산물일 뿐이었다. 차라리 안 보이는 구석에 숨어 반이 광전사의 힘을 이겨 내기를 싹싹 비는 편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몸이 떨렸다.

“……진짜 짜증 나네. 왜 떠는 거야, 카델? 반 때문이야? 진심으로?”

내내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라이돈이 돌연 카델의 팔을 잡아채 돌려세웠다. 어느새 물기가 맺힌 카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 굳은 얼굴의 루멘을 노려보고, 다시금 카델을 응시했다.

“보러 가면 반이 다칠까 봐 무서워? 아니면, 그냥 반을 보기 싫은 거야? 그럼 말해. 카델이 괴로워하는 일 없게 내가 반을 죽여 버릴게.”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죽여서 없애 버리면 보러 갈 수도 없어. 고민은 끝이잖아. 아니야? 그것도 싫어?”

“난 반이 살기를 원하는 거야, 라이돈.”

카델의 처량한 목소리에 음험하게 번뜩이던 적안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라이돈은 치미는 충동을 참아 내듯 입가를 들썩이다, 낮은 한숨과 함께 체념하듯 말했다.

“그럼 반을 만나러 가. 카델이 싫다고 해도 이동 마법으로 보내 버릴 거야.”

“하지만 내가 가면……!”

“이런 응석은 그만두는 게 좋아, 카델. 적어도 내 앞에선.”

답지 않게 냉랭한 말투에 멈칫한 카델의 앞에서, 라이돈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선택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그걸 무시해서 후회하고, 계속 내 앞에서 다른 인간을 추억할 작정이라면……. 난 지금이라도 반을 찾아가서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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