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6화 (306/521)

적룡에게 진실을 들은 뒤, 가장 많이 떠올렸던 이름은 카델이 아니었다.

신여환.

그 신기하고 낯선 이름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 소리 내어 불러 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해 왔던 이세계의 단장. 그가 용병단의 이름을 지은 순간부터 자신의 옆을 차지해 왔었다는 사실은, 제법 큰 혼란을 가져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카델을 좋아했다. 동경했고, 존경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쭉, 감정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순간부턴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자라나서, 그가 이 감정을 알고 도망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래. 그 ‘어느 순간’이 문제였다. ‘좋아한다’가 ‘사랑한다’라는 감정으로 자라 버린 그 ‘어느 순간’엔, 신여환이 있었다.

그럼 자신이 사랑하는 건 신여환인가? 단언할 수 없다. 카델 라이토스가 없었다면 그 감정의 뿌리 역시 존재하지 못했을 테다. 그렇다면 만약 신여환이 아닌 카델 라이토스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그래도 자신의 감정은 기어코 열매를 맺었을까? 지금과 똑같은 거대하고 처절한 열매를?

무슨 수를 써도 확인할 수 없기에, 어쩌면 영원토록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하지만 온통 애매하기 짝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장담 가능한 몇 가지가 있다.

그에게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가 손을 뻗었고, 안아 주기를 바랐다는 것. 오직 그의 바람만이 자신을 진창에서 끌어낼 수 있다는 것. 그의 손짓과 숨결로 자신은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비참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

진실을 알고도 지워지지 않던 감정은 끝끝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불가항력의 힘처럼, 거센 감정의 흐름 앞에 이성이나 의지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붕대랑 지혈제, 물약도 종류별로.”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숨이 가빴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대충 쓸어 내며 점원을 닦달하자, 겁에 질린 눈초리가 닿아 왔다. 주문한 물건을 찾는 내내 이쪽의 눈치를 보는 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꾸물거리는 동안에도 그는 피를 흘리고 있을 텐데.

“마물 핍니다. 동료가 다쳤으니 서둘러 주십쇼.”

“아… 아아, 마물…! 금방 드립죠!”

사람을 해친 게 아니라는 소리에 그제야 점원의 손이 바빠졌다. 허겁지겁 물건들을 내온 그에게 돈주머니를 건네고, 가방에 물건을 넘치게 쑤셔 넣었다.

급히 길을 돌아가는 반의 얼굴에선 초조함이 엿보였다.

*

“왜 나와 있어요? 들어가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는데.”

안전한 동굴을 찾아 불을 지피고 카델을 눕혀 뒀다. 하지만 돌아온 동굴 앞, 카델은 상처 난 옆구리를 감싸 안은 채 바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터무니없는 모습에 기겁한 반이 서둘러 다가오자, 카델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그냥, 언제 오나 싶어서.”

사실은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을 먹었다. 반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아예 동굴을 벗어나 마을까지 헤집었을 것이다.

카델은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고자 애써 밝게 웃었다. 그런 카델을 가만히 응시하던 반이 낮은 한숨과 함께 그를 안아 들었다.

“사람 말 좀 들어요.”

다행히 모닥불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동굴 안의 훈기도 적당했다. 반은 바닥에 깔아 놓은 얇은 천에 카델을 조심스럽게 내려 두었다. 곧장 가방 안에서 지혈제를 꺼내려던 그는,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시선을 돌렸다. 카델을 담아낸 그의 눈이 당혹감으로 벌어졌다.

“왜, 왜 울어요.”

카델은 입을 앙다문 채 소리도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황하며 다가가자, 카델이 한껏 울상이 된 얼굴로 와락 안겨 들었다.

갑자기 왜 우는 걸까. 상처가 너무 아팠나? 그럼 어서 지혈부터 해야 할 텐데. 여러 걱정이 뒤섞여 시시로 바뀌던 표정은, 이어지는 카델의 말에 깔끔하게 굳어 버렸다.

“보고 싶었어.”

“……잠깐 약 사러 갔던 것뿐이잖아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반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카델의 등을 토닥였다.

빌어먹게 애틋했다. 진저리가 날 만큼 가엽고 사랑스러워서, 도무지 밀어 낼 수가 없다. 품에 안긴 온기에 취한 것처럼 한참을 쓰다듬다, 간신히 이성을 잡고 카델을 떨어뜨렸다.

“상처, 많이 아프죠?”

“괜찮아.”

“왜 안 막았어요.”

꽤 깊이 베인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흘렀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쓴웃음을 지은 카델이 부지런히 제 상처를 치료하는 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격이었으나, 결국엔 막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공격을 멈춰 주지 않을까. 악마처럼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했다. 그래서 멍청하게 당해 버렸다.

“……실수했어.”

얼버무리듯 답하자 반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꼼꼼히 붕대를 묶은 그가 억지로 카델을 눕히고 그 옆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과 쌕쌕거리는 숨소리. 그 고요함 속에서 말없이 불빛을 바라보던 반이 툭 던지듯 말했다.

“돌아갈게요. 기사단에.”

카델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원래의 단장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잊지 못할 거예요. 그 사람은 내 삶을 지켜 준 영웅이니까.”

“…….”

“전처럼 굴진 못해요. 아직도 조금은…… 당신이 원망스럽거든요.”

“괜찮아. 원망해도 돼.”

꾸역꾸역 상체를 일으킨 카델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는 불꽃에 음영 진 반의 옆모습에 대고 절박하게 말했다.

“카델 라이토스를 잊지 않아도, 날 계속 원망해도 돼. 넌 자격이 있으니까. 널 속여 온 대가라면 죽음으로라도 치를게. 그러니까…… 옆에만 있어 줘.”

그제야 반의 시선이 옮겨 왔다. 카델의 벌어진 입술과 붉어진 뺨, 축축하게 젖은 눈꼬리를 응시하던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시작해요. 이번엔 카델 라이토스가 아닌…… 당신의 기사가 돼 볼 테니까. 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필요한 만큼 함께해 봐요.”

「축하드립니다! A급 기사 ‘반 헤르도스’ 영입 완료!」

「현재 기사단 코스트: 24/25」

멍하니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을 응시하다, 느릿느릿 눈을 굴렸다. 그의 입가에 머무른 작은 미소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벅찼다. 카델 라이토스가 아닌 신여환의 기사가 되어 주겠다는, 여태 바라고 바라 왔던 망상에 가까운 소원을. 그가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뿌연 시야를 떨치듯 거칠게 눈을 비빈 카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시 시작하자.”

“신여환이라는 이름은 둘이 있을 때만 부를게요. 뭐, 평소 호칭도 단장이니까 그다지 부를 일은 없겠지만.”

“응, 마음대로 해. 바보라고 불러도 돼.”

“……그렇게 부를 리가 없잖아요. 뭐든 봐주려고 하지 마요.”

“응.”

뭘 말하든 전부 응, 이라고 대답할 기세였다. 반은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카델을 간신히 저지하곤, 아이를 재우듯 그의 가슴께를 토닥거렸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깨어나는 대로 돌아가요. 제국으로 가면 돼요?”

“아니, 고요의 산맥. 다들 거기서 수련 중이야.”

“멀리도 갔네요.”

“다들 널 보면 기뻐할 거야.”

“그놈들이요? 기뻐해 봤자 징그럽기만 한데요.”

그대로 긴장이 풀린 카델이 잠들 때까지, 둘은 많은 잡담을 나눴다. 신여환이라는 이름은 어떤 식으로 불러야 하는 건지, 원래 세계에서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간 어떤 마음으로 전투를 이끌어 왔는지.

질문에 성의껏 대답하며 반짝이던 눈이 감기자, 반은 카델을 토닥이던 손길을 거둬 그의 뺨을 쓸었다.

“잘 자.”

눈물이 말라붙은 눈가를 살살 어루만졌다. 곤히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망설이듯 조그맣게 덧붙였다.

“……여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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