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7화 (30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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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 사 온 약을 과하다 싶을 만큼 먹고, 붕대도 새것으로 갈았다. 지혈제 덕에 피는 멎은 상태였지만 격했던 재회 때문인지 몸 상태는 가히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 끓어오를지 모를 은은한 미열이 전신에 퍼졌다. 어지럼증을 동반한 두통 때문에 속까지 불편해졌다.

도저히 움직일 상태가 아니었지만, 카델은 괜찮냐는 반의 물음에 꿋꿋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멍청해서 입은 상처에 반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함께 고요의 산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이동하는 길에 큰 마을이 있으면 치유사를 찾아볼게요.”

“됐어, 어차피 도착하면 가르엘도 있는걸.”

카델은 반 몰래 식은땀을 훔치며 걸음을 서둘렀다. 어서 마차를 찾아 앉아야 조금이라도 살 것 같았다.

“마을은? 좀 더 가야 하나?”

“곧 보일 거예요.”

라이돈이 만들어 준 이동 마법진을 타고 온 것이기에 이곳의 지리는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혼미한 정신을 다잡으며 반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마을. 한창 대낮의 활기로 시끌벅적해야 할 그곳은, 당황스러우리만큼 적막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마을에 들어선 두 남자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마차는커녕 말도 안 보이는데……?”

“이상하네요. 어제만 해도 사람이 많았는데.”

“하룻밤 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마물의 습격을 받았다기엔 건물도 멀쩡했고, 피나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옆 마을에 축제라도 열린 걸까. 전부 구경하러 떠나 버렸다든가.

황당한 가설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마을을 살피던 카델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기다려, 반.”

“네?”

“거기서 움직이지 마.”

굳은 얼굴로 반의 움직임을 저지한 카델이 바닥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빈 상가와 노점이 들어선 길가의 정중앙. 그곳에 있는 것은, 아주 눈에 익은 두 개의 마법진이었다.

“이건…….”

“소환진이랑 대마법진의 조각이야. 이 마을 안에 마족이 있을지도 몰라.”

카델이 아는 바로 이 근방에 봉인진은 없다. 그러니 마족은 오로지 대마법진의 조각을 설치하기 위해 소환진을 타고 넘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대놓고 길가에 설치했어. 이미 마을 사람들을 전부 해치운 건가? 그 하룻밤 사이에?’

마을 사람 중 전투 인원이 없고, 마족의 힘이 압도적이었다면 몰살도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주민을 손쓸 틈도 없이 일시에 죽인 게 아니라면, 반항의 흔적 정도는 보여야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은 외계인이라도 나타나 인간만 쏙쏙 납치한 것처럼 아무런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도대체 땅바닥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학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카델이 아는 마족 중엔 그런 일이 가능한 자는 없었다.

그나마 멘델 할리에프 정도라면 산 채로 분해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만, 그는 기사단이 직접 죽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멘델 정도의 고위 마족이 이런 변방의 마을을 담당하러 왔을 것 같진 않았다.

‘여긴 메인 퀘스트 지역도 아니니까. 당장 고위 마족을 만날 확률은 낮겠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전에도 ‘돌발 퀘스트’란 명목하에 예정에 없던 고위 마족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으니.

“주변에 감지되는 기척은 있어?”

카델이 조심스럽게 소환진 해제 작업을 시작하는 동안, 반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잠시 뒤.

“……근처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마족?”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마족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마족이 아닌 누군가의 기척이라니. 무리하게 마력을 불어넣어 소환진을 단숨에 파괴한 카델이 몸을 일으켰다.

“가 보자.”

반이 감지했던 것은 온통 적막한 마을 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신음은 그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근원지에 도착한 반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여긴…….”

“무기 상점이네?”

카델을 만나기 전, 새 대검을 샀던 상점이었다. 상인에게 퍼부었던 야만적인 협박들이 떠올라 반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요, 안에 누구 계세요?”

이제는 카델의 귀에도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의 주인은 계산대에도, 진열대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의아함을 느낄 무렵.

“사, 살려 주시오…….”

매대 뒤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맞춘 두 남자가 서둘러 매대를 뛰어넘었다. 뒤편에 자리한 낡은 문을 열자 드러난 것은, 비품 상자가 가득 들어찬 창고의 내부. 그리고.

“제발 살려 주시오…….”

창고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달달 떨고 있는 상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잔뜩 몸을 구기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얼굴은 침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엉망이 되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단장.”

카델은 곧장 상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려 했으나, 반은 그런 카델의 어깨를 낚아챘다.

“왜 그래?”

“저것 좀 봐요.”

반이 턱짓한 곳은 상인이 웅크리고 있는 목재 바닥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닥을 살피던 카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야, 저건.”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겨우 들어갈 법한 크기. 수십 개의 자그마한 구멍이 상인을 가둔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 위험을 느낀 카델이 바람 장막을 생성한 그 순간이었다.

“히야아!”

“하얏!”

얇고 가느다란 괴성과 함께, 구멍 위로 무언가가 솟구쳤다. 구멍의 크기만큼이나 자그마한 생명체.

“무슨……!”

카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정확한 정체는 몰라도, 놈들이 바닥에 난 구멍의 개수만큼 나타났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구멍 아래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도 없이 솟구쳤다.

“하이얏―!”

그렇게 우렁찬 기합과 함께 마지막 생명체가 등장했을 때. 반과 카델은 창고의 문 앞까지 밀려나 있었다.

‘말도 안 돼…….’

형태는 인간에 가까웠다. 팔다리가 달렸고, 이목구비도 있다. 비록 몸뚱이는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푼 데다 가느다란 음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인상을 가졌으나, 굳이 따지자면 소인족에 가까워 보였다.

문제는 그들의 등에 달린 자그마한 한 쌍의 날개였다.

‘고위 마족이라고? 저놈들이?’

저 암적색의 날개는 분명 고위 마족의 징표였다. 하지만 카델은 저놈들의 능력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정체가 가물가물할 수는 있어도 고위 마족이라면 이렇게까지 초면일 순 없다. 그는 게임 내의 모든 마물과 마족을 상대해 봤으니까. 그러나.

‘모르겠어.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전 처음 보는 녀석들이었다.

‘설마 스테이지가 아니라 스토리나 컷신에서 등장했던 마족인가? 아니면, 활자로 짧게 언급 정도만 된 놈들?’

뭐가 됐든 결과는 같다. 자신에겐 눈앞의 기묘한 마족 무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단장, 물러나세요.”

카델이 혼란에 빠진 사이, 우글우글 모여 있던 놈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은 카델을 끌어당겨 아예 문 바깥에 세워 두고는 앞을 가로막았다. 카델은 반의 뒤에서 상인을 보호하는 장막을 둘렀다.

‘일단 침착하자. 뭐 하는 놈들이건 쉽게 당할 일은 없어. 차분하게 놈들의 기술을 관찰해 보자고.’

대검을 빼든 반이 바닥의 마족들을 겨눴다. 하지만 버릇대로 검기를 날리기엔 상인의 존재가 거슬렸다. 카델의 장막이 있다지만, 상인이 계속 저곳에 처박혀 있다면 기술에 제한이 생긴다.

“이봐! 정신 차리고 이쪽으로 넘어와!”

소리 높여 불렀으나 상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작은 마족들이 등장한 후부터 아예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귀까지 막고 있었다.

“젠장……. 단장, 제가 넘어가서 상인을 데려올게요. 장막을 강화 주세요.”

“알겠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자의 확보였다. 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의 장막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강화된 장막을 두른 반이 상인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하야앗!”

“히랴아앗!”

작은 마족들이 양팔을 번쩍 치켜들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상인. 바닥에 넓게 퍼져 있던 마족들이 모조리 상인에게로 달려들며 꽉 쥔 주먹으로 장막을 두들겨 댔다.

“자, 잠깐……!”

반사적으로 상인의 장막을 강화하던 카델이 새된 소리를 냈다. 저토록 몸집이 작으니 힘이 아닌 물량으로 상대하는 타입이리라 짐작했건만. 장막을 두드리는 저 앙증맞은 주먹 하나하나의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빠르게 몰려든 마족들이 장막을 빼곡하게 뒤덮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먹을 내리찍는 소리가 거대한 북처럼 창고를 울리며, 카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왜 하필 지금…….’

아침부터 시작된 컨디션 난조가 연이은 마력 운용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겨우 피가 멎은 옆구리에서 다시금 격통이 맴돌며 식은땀이 흘렀다.

“단장?”

마족에게 접근하려던 반이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어느새 사색이 된 카델이 허리를 수그린 채 헐떡이고 있었다.

“단장…! 정신 차려요!”

놀란 반이 카델의 어깨를 감싸자, 그가 반의 팔을 쥐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고통을 참듯 핏기없는 입술을 꽉 깨문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장막에 균열이……. 도와줘, 반…….”

카델의 시선은 반이 아닌 너머의 상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끄아아악!”

창고의 구석에서부터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안 돼……!”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중심이 흔들렸다. 반은 휘청대는 카델을 지탱한 채 굳은 시선을 돌렸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균열의 틈새. 굴을 파는 두더지처럼, 마족들은 그 작은 틈새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수백의 마족이 괴상한 환호와 함께 미끄럼틀을 타듯 안으로 쑥쑥 빠져들며, 장막 바깥에 들러붙어 있던 마족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람 장막은 내부의 모습을 투명하게 비춰 주었다.

“대체 저놈들은…….”

얇고 짧은 팔을 마구 휘두른다. 티끌만큼 작은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상인의 살갗을 두부처럼 뭉텅이째 퍼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제 입안으로 날랐다. 그 행위가 우악스러울 만큼 빠르게 반복됐고, 마족들은 무용해진 장막 안을 가득 채운 채 ‘식사’를 즐겼다.

행위가 지속된 시간은 기껏해야 5초. 끔찍하던 절규는 뚝 끊겼고, 카델이 보호하던 인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친 마족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통통하게 부른 배를 두드렸다. 그러나 카델이 그들을 가둔 장막을 거두지 않은 채 보강까지 하자, 앞으로 나아가려던 놈들이 돌연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그리고 다시 양팔을 들어 장막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텨 줘요, 단장.”

지금 카델의 상태로는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눈앞의 무수한 마족들은, 인간을 먹었다. 그들이 인간 한 명을 해치울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수 초.

도망가야 한다. 판단을 마친 반이 거침없이 카델을 안아 들었다. 품에 닿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대체 언제부터 상태가 이랬던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을만 벗어나면 돼.’

그 이후엔 남겨진 마을이 어떻게 되든 조금도 상관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상점을 벗어났으나. 상점의 바깥에는,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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