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마족의 볼록한 배를 ‘가르고’ 나왔다. 잘 익은 과육이 툭 터지듯, 아주 쉽게 반으로 갈라진 뱃가죽 사이로 머리가 튀어나왔다. 정체불명의 체액을 뒤집어썼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마족의 생김새와 똑같았다. 거침없이 뱃속을 헤치고 나온 생명체는 마족의 새끼라기보다는 마족의 복제품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 표현이 옳을 것이다. 갓 태어난 녀석이 구부리고 있던 팔다리를 펴자, 금세 마족과 똑같은 체형으로 변모했으니까. 심지어 불룩한 배까지 똑같았다.
번식이 아닌 복제. 새롭게 태어난 녀석의 볼록한 배가 갈라지며, 직전과 똑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갈라지고, 태어나고, 갈라지고, 태어나고…….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장면이 네 번째 반복될 즈음, 반은 깨달았다. 이 정체불명의 마족이 당당하게 괴성을 내지른 이유를.
“대체 언제 이렇게…….”
언제부터 마족이 ‘복제’를 시작했는지,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여환과 자신이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아군의 수를 늘렸다. 그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반은 짐가방을 버려둔 채 카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어젯밤 미리 봐 두었던 길을 따라 망설임 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싸울 시간 따윈 없어.’
마을을 찾아가야 했다. 이곳에서 놈들을 제대로 떨쳐 내지 못하면 다음 마을까지 마족이 따라붙을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카델만, 아니, 여환만 치료할 수 있다면. 마을쯤이야 몇 개가 쑥대밭이 된다 해도 알 바 아니었다. 여환이 들었다면 놀라 까무러칠 생각이지만, 자신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이니 멍청한 순애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야아앗!”
마족들은 반과 카델이 도주하도록 얌전히 놔두지 않았다. 충분히 수를 늘린 그들은 부상자의 존재를 고 있다는 듯 승리를 확신하며 달려들었다.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날려 보내고, 앞에 있던 두 마리가 날아온 동료를 다시금 앞으로 던져 올렸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발사된 마족들은 도망치는 반의 등허리와 종아리, 허벅지 뒤에 달라붙었다.
“젠장…!”
괴성과 더불어 따끔한 통증이 번져 올랐다. 보지 않아도 달라붙은 놈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반은 힘을 주어 땅을 박차며 그 반동으로 마족을 떨쳐 냈다. 하지만 아무리 떨쳐 내도 소용없었다. 뒤따라오는 마족들은 달리는 와중에도 ‘복제’를 멈추지 않았으니.
결국 무사히 마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저 징그러운 놈들을 몰살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그의 두 다리가 넝마가 됐을 즈음 내려졌다.
“…….”
그는 오르막의 꼭대기에 카델을 바닥에 눕힌 뒤, 그를 등진 채 섰다. 물어뜯긴 다리에서 흐른 피가 바지를 흥건하게 적셨다. 움푹 팬 상처에 달라붙는 천의 감촉이 쓰라렸다.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 오르막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마족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놈들은 반과 카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들뜬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속에서 온갖 욕설이 치밀었다. 마족의 자신만만의 모습에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분노가 들끓었다. 저것들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여환을 땅바닥에 방치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곳에 내가 있으면 안 됐어.’
가르엘이 있어야 했다. 그가 곧바로 카델의 상처를 치료했어야 했다. 아니, 라이돈이 있어야 했다. 녀석이 이동 마법진을 타고 동료들을 찾아가거나, 하늘을 날아 마족을 떨쳐 내야 했다. 루멘이 있어야 했다. 저깟 놈들이 따라잡지도 못할 속도로 단숨에 마을을 찾아가야 했다. 요젠은 어떤가? 기척도 없이 저놈들을 모조리 도륙했겠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처리한 뒤, 여유롭게 카델을 운반했을 거다.
그래. 그러니 이곳에 자신이 있어선 안 됐다. 빌어먹게 약하니까. 쓸모가 없었다. 모두가 차례차례 강해지는 와중에도, 자신은 언제나 한 발짝 뒤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스스로의 힘에 잡아먹히는 바보 같은 짓들만 연거푸 해 댔다. 지금도 결국엔, 결국엔 그 거지 같은 ‘폭주’ 때문에. 여환을 다치게 했고, 쓸데없이 체력을 빼 그를 지킬 힘까지 낭비했다.
“한심한 새끼…….”
스스로에게 치미는 분노에 이를 간 그가 대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한순간에 붉어진 눈동자와 함께 개방된 오라가 검신 위로 모여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환이 없는 시간 동안 피를 원 없이 모았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검에도 피는 충분했다.
[혈류검 제2식 – 사자의 강]
괜히 힘들게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경사로의 꼭대기를 차지한 게 아니다. 반은 아래에 모인 마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복제할 한 마리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고 기술을 날려 주리라. 분노로 점철된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무슨 게임 세계에 빨리 감기 하나가 없냐고!”
한편, [화마의 화살]의 성공을 대가로 쓰러진 카델은 ‘무의 공간’에 진입한 상태였다. 사방이 새까만 공간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익숙한 시스템 창뿐이다.
「육체와 혼의 결속력 약화. 회복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회복 진행률: 74%」
「완료까지 남은 시간: 2시간 11분」
쿤라라도 있었으면 어떻게 좀 해 달라며 졸라 보았을 텐데. 든든한 뒷배 없는 빙의자는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반은 무사히 도망쳤을까?’
지금쯤 짐짝처럼 쓰러진 자신을 챙기며 이동하느라 진이 다 빠졌을 것이다. 만약 공격을 피해 살아남은 다른 마족을 만났으면 어쩌나.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의미 없는 걱정이 또다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적어도 내가 그 새끼들 정체만 알았으면!”
상대해 본 적 없는 적을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었다. 침착하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거칠게 머리를 헝클인 카델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돌발 퀘스트라든가, 그런 건 뜨지 않았으니까. 끝까지 처리해야 했다면 골치 아팠을 거야.”
시스템도 얄팍하게나마 양심이 있는 모양인지, 퀘스트의 형태로 그 정체불명의 마족을 상대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도망칠 수만 있다면 절반은 해결이다. 회복이 완료되는 대로 마을을 찾아가 동료들을 부르든지, 몸 상태를 보고 이동 마법을 시도해 봐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불안감을 삭히고 있던 때였다. 쓸데없이 명랑한 알림음과 함께,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기사 ‘반 헤르도스’의 의지가 운명의 벽을 두드립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의 한계 돌파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실패 시, 한계 돌파 퀘스트 소멸. 기사 ‘반 헤르도스’ 사망.」
“……뭐? 무슨 돌파?”
그것은 카델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존재할 리 없는 반의 두 번째 각성 퀘스트였다.
*
다섯 번째 [사자의 강].
축적해 두었던 피를 모조리 끌어다 썼다. 마물의 피는 물론 자신의 피까지 쥐어짜 사용했다. 오라는 이미 범람 상태. 통제 불능의 기로에 섰다.
그런데도 그의 앞에는 여전히 마족이 있다. 산의 나무들이 몽땅 베이고, 땅 위로는 핏물이 고여 진창이 되었음에도. 놈들은 서로의 몸을 던져 가며 기어코 한 마리를 지켜 살려 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는, 죽음을 앞둔 바퀴벌레처럼 성급히 스스로를 복제했다. 지긋지긋하리만치 무수히 알을 깠다.
“하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동료들이 몇 차례나 쓸려 나갔음에도 놈들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꼭 반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힘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쓰러지는 때를 맞춰 잡아먹으려는 듯했다.
그 대단한 집념에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었다.
“……뭘 해야 뒈지는 거야, 개자식들아.”
눈앞이 하얗게 질리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네 번째…… 아니, 세 번째 기술을 개방했을 때부터였다. 몇 개월을 내내 폭주 상태로 지냈으므로, 이것이 폭주의 전조라는 것을 잘 알았다. 어쩌면 도주가 아닌 무의미한 싸움을 택했을 때부터 이미 이성의 끈이 너덜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은 고집스레 눈에 힘을 주며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의 뒤에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이성을 잃으면, 여환을 지켜 줄 수 없다. 그럼 자신은 물론 여환까지 잡아먹힐 테니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아서, 멀어졌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아 질주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를 뒤덮은 오라는 안개처럼 널찍하게 퍼져 있었다. 통제하지 못한 힘들이 넘실거리는 것이다. 갈 곳 잃은 힘의 목표물이 자신이 될 때, 그때야말로 광전사는 오라의 꼭두각시가 된다. 그러니 이 흘러넘치는 힘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욕심껏 힘을 끌어 쓰기엔 피가 모자랐다.
다시 몸에 상처를 내 볼까? 아니면, 여환을 들고 마물이 많은 곳을 찾아갈까? 턱없이 좁은 선택지는 그 내용마저 얄팍했다.
‘……정신 차려라. 지금 여기서 단장을 살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이곳에 있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 자신이라는 것이 더없이 통탄스러웠으나, 아무리 절망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비록 기사단의 다른 녀석들보다 약하고, 쓸모없고, 있는 것이라곤 비참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뿐일지라도. 단장을 살리고 싶다면 그 사랑이라도 긁어모아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네 기사가 되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너를…… 지키고 싶어.”
그와의 새로운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어야 했다.
마족의 이름은 젤리카. 마계에서 불리는 그의 이명은 ‘무한의 젤리카’였다. 다른 고위 마족에 비하면 힘이 부족하고, 지능 또한 현저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가 당당히 암적색의 날개를 달 수 있었던 이유. 거기엔 그 기함할 만한 ‘증식력’과 ‘식욕’이 있었다.
젤리카가 딛는 땅은 모조리 폐허가 된다. 단 한 마리만으로 수백, 수천의 분신을 뽑아내며 주위의 생명체를 모조리 먹어 치운다. 마계 마족의 일부는 그런 젤리카야말로 마계의 핵심 전력이 아닌가, 주장하기도 했다.
젤리카 역시 그랬다. 그는 생각이 짧고 무식했으나, 자신의 강함만큼은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분신들을 믿었고, 승리를 확신했다. 몇 차례나 피의 파도를 버텨 낸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이얏―!”
자그마한 젤리카에게 있어 이것은 태풍이나 다름없었다. 넓게 퍼져 있던 오라가 일시에 하늘로 솟구치며 일으킨 강풍. 주위를 모조리 휩쓰는 붉은 회오리 속에서, 젤리카는 서로를 붙들어 펄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한차례 돌풍이 지나가자, 간신히 중심을 잡은 젤리카 중 하나가 놀란 괴성을 내질렀다. 그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파랗던 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상공에 얇은 막을 씌워 둔 것처럼, 하늘로 솟구친 오라가 구름마저 집어삼킨 채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재앙을 암시하는 듯한 불길한 풍경에 젤리카의 움직임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얏!”
“하야―!”
그들의 작은 뇌 속에서 수백 개의 의견이 뒤엉켰다. 당장 오라의 주인을 물어뜯어야 한다, 심상치 않은 오라를 피해 도망가야 한다, 또는 누구든 한 명만 살아남으면 되니 방어를 위해 증식을 서두르자는 의견 등등.
나름의 회의 끝에, 젤리카는 저들의 부른 배를 갈라내기로 했다.
늘어나고, 또 늘어난다. 시작된 젤리카의 증식은 끝이 없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해치우지 않는 이상, 놈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가 초마다 늘어나는 젤리카를 담아냈다. 얌전히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반은 차근차근 감정을 버렸다. 놈들을 당장 찢어발기고 싶다는 괴팍한 살의를 버리고, 피의 갈망을 버리고, 분노와 충동을 버렸다.
모조리 비워낸 가슴속, 유일하게 남은 것은 여환의 존재. 모든 것을 비워 낸 순간에도 끝끝내 남아 있는 질긴 순정.
이성을 잃은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감정뿐이었으므로, 반은 오랜 방황 속에서도 결코 마르지 않을 감정 하나에 매달려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채 고요히 일렁이던 오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검 끝에 응축된 기운이 모여들며, 사위가 붉게 저물었다.
대량의 오라가 규결했다. 뭉치고 뭉친 붉은 기운은 곧이어 그와 젤리카가 선 땅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마치 대낮에 뜬 보름달과도 같았다. 주인의 이성까지 탐욕스레 먹어 치우던 기운이 뱉어 낸, 추악한 본능의 덩어리였다. 그 웅대한 붉은 달이 나지막한 공명음을 울렸다.
뜨겁게 들뜬 시선이 하늘의 달을 보았다. 지옥 불에 담근 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흉악한 기운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아주…… 예쁘군.”
멍하게 중얼거린 그가 짧은 들숨과 함께 대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적월만찬赤月晩餐 – 적색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