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10/521)

바닥에 꽂힌 대검이 붉게 물들며, 대기가 진동했다. 미친 듯 흔들리는 시야에 위험을 감지한 젤리카가 증식을 멈춘 채 집합했다.

그들은 한 명을 중심에 세우고, 그 주위를 덮듯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몸뚱이가 겹겹이 쌓이며 순식간에 높다란 첨탑 같은 형태를 갖췄다. 젤리카는 괴상한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닥쳐올 위기를 대비했다.

하지만 쓸모는 없었다. 하늘의 붉은 달도, 반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강한 진동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들의 작은 뇌가 두개골을 쿵쿵 울리며 굴러다닐 만한 진동이었다.

한참을 묵묵히 버티다, 분신의 틈에 머리를 쑤셔 박고 있던 최상단의 젤리카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하이야…….”

붉은 방울이었다. 조그만 방울들이 사방에 너울거렸다. 붉은 달의 그림자 아래 넘실대는 짙고 진한 방울은, 꼭 매끈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넋을 놓고 방울을 감상하던 젤리카는 제 코앞으로 다가온 방울에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 눌린 얇은 막이 터지며, 그 안의 액체가 젤리카를 덮쳤다.

그것은 피였다. 킁킁거리며 축축하게 젖은 몸 냄새를 맡은 젤리카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들의 주위를 메운 것은, 아름다운 보석이 아닌 잔인한 핏방울이었다.

이 새로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 생각한 젤리카가 아래를 내려 보았으나.

“……!”

그의 아래에 깔린 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동료가 아니었다. 몸속의 수분을 모조리 빼앗긴 채 납작하게 찌그러진 시체 더미. 그가 밟고 있는 것은 메마른 뼛가죽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손끝과 발끝, 눈과 귀, 몸에 난 온갖 구멍에서부터 피가 샘솟았다. 경악한 젤리카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붉은 달이다. 붉은 달이 그들의 피를 앗아 가고 있었다. 둥실둥실 떠오른 젤리카의 핏방울은 붉은 보름달을 향해 상승했고, 달은 새로운 제물에 기뻐하듯 몸을 떨었다.

빠르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생존 본능에 잠식된 젤리카는 서둘러 새로운 분신을 생성하려 들었다. 그러나.

“해 봐.”

그런 젤리카의 앞으로 반이 다가왔다. 작은 젤리카의 눈에, 붉은 달을 등진 그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단 죽음의 사신에 가까웠다. 섬뜩하게 가라앉은 적안과 비틀린 미소. 그는 말라붙은 젤리카의 시체를 지르밟으며 말했다.

“계속 낳아 봐. 이 쥐어짜인 걸레 같은 꼴을 보고도 낳고 싶으면, 해. 몇 번이든 잘 먹어 줄게.”

빠르게 빠져나가는 피와 느려지는 심장 박동. 공포에 질린 젤리카의 귓가로, 인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것이 그가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소리였다.

“…….”

전부 죽였다.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사방에 만연한 죽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의 기술은 성공이었다. 붉은 달은 맡은 바를 전부 다 했다.

“……사라지지 않는군.”

하지만 달은 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떠오른 채, 여전히 굶주렸다는 듯 진동했다. 그것을 응시하던 반이 천천히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보았다. 살짝 뜯긴 손끝의 상처에서 피가 차오르고 있었다. 방울진 핏물은 곧 젤리카의 피처럼 붉은 달의 인력에 끌려 상승했다. 거두지 못한 기술이 적을 넘어 주인까지 물어뜯으려 드는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참, 쓰레기 같은 힘이야.”

조소와 함께 주먹을 그러쥔 반이 걸음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카델의 자리였다.

“미안해요. 오래 걸렸죠, 단장.”

저 거대한 달이 기어코 자신을 물어뜯어 탐식한다 할지라도, 여환만큼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랬기에 반은 피가 쑥쑥 빠져나가는 생경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나아간 그가 카델을 안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몸은 그의 의지에 순순히 따라 주지 않았다.

살짝 들렸던 카델의 몸이 떨어지며, 반은 거친 호흡과 함께 바닥을 짚었다. 흐려지는 시야 가득 카델의 얼굴이 들어찼다. 말없이 그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낮은 신음과 함께 카델을 덮듯이 끌어안았다.

붉은 달 아래, 살아 있는 것은 가느다란 목숨줄을 쥔 두 남자뿐이었다.

*

「기사 ‘반 헤르도스’ 한계 돌파 퀘스트 완료!」

「축하드립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가 한계 돌파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가 운명의 궤도를 벗어납니다.」

「자체 수정 모드 진입. 정보 업데이트를 위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의 정보 열람이 일시적으로 제한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 창의 등장에 넋을 놓고 있기를 약 2시간. 회복 모드에서 풀려난 카델이 드디어 눈을 떴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자, 가장 먼저 하늘이 보였다. 대낮의 맑은 하늘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몸을 덮은 온기가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감싼 채 쓰러진 반의 얼굴이 보였다.

“반……? 반! 정신 좀 차려 봐!”

바닥에 엎어진 그의 몸은 피와 상처로 엉망이었다. 반의 등을 두드리던 카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루멘의 각성 퀘스트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반도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진 것일까. 끔찍한 상상과 함께 반을 흔들자, 다행히도 반응이 돌아왔다.

“너무 흔들지 말아요, 단장…….”

“바, 반! 괜찮은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살아남은 마족이 있었어?”

힘겹게 고개를 든 반이 눈을 움직여 카델을 마주 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더듬는 눈빛을 응시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제야 횡설수설하던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마을을 못 찾았어요.”

“…….”

“많이 아플 텐데. 조금만 쉬다가, 치유사한테 데려다줄게요. ……정말 조금만 쉴 테니까요.”

반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으나, 몹시 지쳐 보였다. 카델은 그가 어떤 식으로 무엇과 전투를 치른 것인지 알지 못했다. 무슨 수로 한계를 돌파했길래 시스템의 벽까지 뛰어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승리와 성장은, 오롯이 단장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잠깐 눈 좀 감아 봐.”

“네…?”

“빨리.”

머뭇거리던 반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카델은 조용히 몸을 숙여,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을 맞댔다. 움찔거리는 뺨을 감싸고, 맞물린 입술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약속의 도장을 찍듯 지그시 눌린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내자, 반의 놀란 시선이 닿아 왔다.

“고마워.”

“가, 갑자기…….”

“좋아해.”

반이 좋았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동료였고, 친구였고,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으로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엔 크나큰 상처까지 줘 버렸지만. 그럼에도 끝내 상처 가득한 손을 내밀어 준 반이 좋았다. 그의 다정함을, 순수한 열정을 사랑했다. 이젠 그것을 숨길 이유도, 회피할 이유도 없었다.

“……저도요.”

그랬기에 카델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반의 품에 안겨, 더없이 따뜻한 둘만의 시작을 만끽했다. 이 순간이 먼 훗날, 반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되기를 바라며.

카델과 반 모두 넝마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므로, 고요의 산맥까지 복귀하는 그들의 여정은 가히 눈물겨웠다.

몇 번씩 기절하고 깨어나길 반복하며 산을 넘었다. 둘 다 깨어 있을 때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보통은 깨어 있는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지켜 주며 이동했다. 그나마도 카델이 깨어 있을 때는 자리에 멈춰 주위를 경계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루 반나절을 걸려 간신히 마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는 치유사가 없었다. 대신 약재와 새로운 붕대를 얻어 상처를 관리할 순 있었다. 마을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여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그 후에는 카델의 이동 마법으로 곧장 고요의 산맥을 향했다.

며칠이나 자취를 감췄던 단장과 거의 1년 동안 소식이 없던 동료의 등장. 기사단은 금세 시끌벅적한 활기를 되찾았다.

“우와, 목숨줄 한번 엄청 질기네, 반! 안 돌아오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죽이려고 했는데!”

“헛소리 마라, 요정 놈. 넌 날 못 죽여.”

“아하하! 저 근거 없는 자신감 좀 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뭣하면 대결해 보든지.”

“좋아, 그럼 반이 카델한테 허락 맡아.”

“……네가 해.”

“싫어, 반이 해. 난 혼나고 싶지 않아.”

라이돈은 돌아온 반을 반기며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 댔다. 동료를 약 올릴 때는 작은 몸집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요정의 몸으로 그의 머리 근처를 배회하며 깐족거리기 바빴다. 반은 그런 라이돈을 짜증 가득한 얼굴로 상대하다, 다가온 가르엘에게 시선을 두었다.

“오랜만이네요, 반 경.”

“……예. 오랜만입니다.”

“상처 치료해 드리죠. 앉으세요.”

“단장은요? 다 끝난 겁니까?”

“상처가 깊긴 했지만, 응급 처치가 잘 돼 있었어요. 금방 회복했습니다. 지금은 쿤라 님의 호출을 받고 떠나셨고요.”

반을 평평한 바위 위에 앉힌 가르엘이 곧장 마기를 개방했다. 어두컴컴한 기운이 체내에 스며들자, 며칠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통이 빠르게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그의 치유술을 받던 반이 툭 던지듯 말했다.

“실력이 늘었네요.”

이전에도 그의 치유술은 받아 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전보다 치유의 속도와 질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칭찬을 뱉고 멋쩍게 입맛을 다시는 반의 앞에서, 가르엘은 사람 좋게 웃었다.

“반 경이 없는 동안 제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를 해 봤거든요.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쁘네요. 이전에는 구박만 들었어요, 서럽게도.”

가르엘은 반의 짧은 칭찬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놀다 다친 라이돈을 마기로 치유해 주려다 얼어붙은 채로 하루를 꼬박 지새웠던 일이나, 루멘에게 과거의 짧은 연애담을 늘어놨다가 한 달이 넘게 무시당한 일이나, 기어코 요젠의 인내심을 폭발시켜 배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던 일 등등. 대부분은 동료에게 거부당한 비참한 일화였다.

“그리고 또…….”

“1년간의 왕따 이야기는 그쯤 하죠.”

“이런, 왕따 이야기라뇨. 섭섭하게. 그럼 다른 얘길 해 볼까요? 반 경 말입니다. 경도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제 마기가 침투했는데도 반 경의 오라가 잠잠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미세한 거부 반응이 있었는데……. 이젠 완벽한 통제가 가능해졌나 보죠?”

가르엘의 물음에 반은 처절했던 며칠 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성공했던 기술은 이전까지 전혀 통제되지 않던 오라를 완벽하게 끌어모아 컨트롤한 새로운 궁극기였다. 하지만 기술의 마무리는 썩 좋지 못했다. 거대한 붉은 달은 주인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을 때에서야 겨우 패악질을 멈추고 피를 돌려주었으니까.

아직은 애매한 실력이다.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그의 머리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라이돈이 툭툭 머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당연히 통제 가능해야지, 반! 1년이나 자율 산책을 하고 돌아왔으면 물어 온 뼈다귀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좋은 말 할 때 머리에서 내려와.”

“반이 언제 좋은 말을 했는데?”

자신을 낚아채려는 우악스러운 손놀림을 피해 날아오른 라이돈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양팔을 흔들었다.

“루멘! 요젠! 여기 집 나갔다 돌아온 반이 있어! 심지어 그다지 강해지지도 않았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시선을 옮기자, 맞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라이돈의 외침을 듣곤 그대로 무리에 합류했다.

“…….”

반은 가장 먼저 루멘과 눈을 맞췄다. 오가는 시선 속에서 수많은 감상이 오갔으나, 둘 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 위에 한참을 머무르다, 반은 꺼내고픈 말을 몽땅 뭉쳐 한 마디로 던졌다.

“못 본 새 더 꼴 보기 싫어졌군.”

그에 픽 웃음을 흘린 루멘이 그의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천으로 길게 감긴 정체불명의 물건이었다.

“이게 뭐냐.”

“풀어 봐.”

“징그럽게 선물 같은 거 주지 마.”

“이게 내 선물일 거라고 기대하는 건가? 불쾌하군.”

짜증스레 루멘을 흘기며 천을 풀자, 안에 싸인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대검이었다. 손잡이에 조각된 늑대 머리를 발견한 반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대장이 보관하고 있던 거다. 찾은 건 이쪽이고.”

루멘이 요젠을 턱짓하자, 반이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선 요젠을 응시했다.

“……날 쫓아왔었던 거냐?”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네놈처럼 기척도 안 내는 암살자의 추격을 무슨 수로 알아채.”

“감으로. 넌 감이 꽤 좋잖아.”

한창 반을 추격하던 때, 그는 때때로 요젠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돌아보고는 했다. 당시를 상기하며 답하자, 반이 스르륵 눈길을 떨궜다. 녹슨 곳 없이 잘 관리된 날을 힘주어 쓸어내린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버리고 간 대검을 정성 들여 닦아 냈을 그의 심경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맙다. 찾아 줘서.”

“인사는 카델에게 해.”

“……그래.”

치유술도 마무리됐고, 대검까지 돌려받았다. 하지만 반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영양가 없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아무도 그가 떠난 이유를 묻지 않았고, 돌아온 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함께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단원들의 틈에서, 반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알아챈다 해도 그저 ‘징그럽다’ 정도의 감상을 남길 뿐이겠지만, 이곳은 분명한 그의 자리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