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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 돌아왔더군.”
카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말하자 작은 움찔거림이 느껴졌다. 그를 타박하듯 납작한 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으나, 카델은 기어코 훅 고개를 꺾었다. 거꾸로 뒤집힌 시야로 쿤라를 담아낸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네. 다시 기사단에 들어왔어요.”
“제대로 앞을 봐라, 반쪽이.”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라, 신여환의 기사가 돼 주겠대요. 진짜 가망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긴 하군.”
꺾인 고개를 따라 몸이 젖혀지며, 아예 쿤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카델이 신난 얼굴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반이 한계 돌파를 했어요. 시스템이 정해 준 등급을 뛰어넘었다고요!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쵸?”
“시스템이 전능한 건 아니니까.”
“맞아요. 이젠 반의 호감도…… 전에 말해 줬죠? 시스템이 상대가 저한테 가진 호감을 숫자로 표기해 준다고. 그게 안 보이더라고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함부로 측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까 기분은 좋아요.”
쿤라는 제멋대로 엉겨 붙는 동물을 상대하듯 요령 좋게 기운을 불어넣으며, 샐샐 웃는 카델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확실히 그 광전사가 강해지긴 했더구나.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
“반이 한계 돌파하는 모습을 못 본 게 안타까워요. 쿤라, 당신이 있었으면 뭐라도 방법이 있었을 텐데. 생각해 보면 꼭 필요할 때만 없는 것 같아.”
“갑자기 이 몸에게 화살을 돌리는 거냐?”
“결계 작업은 다 끝났어요? 저 며칠 뒤에 제국으로 가야 해요. 황제가 불렀거든요. 아마 대마법진 탐색 작업이 슬슬 마무리돼서 부르는 것 같은데, 복귀하라고 하면 힘을 돌려줘요.”
“그때까진 돌려줄 수 있을 거다.”
꿈틀거리는 카델을 상대로 무사히 작업을 마친 쿤라가 쯧쯧 혀를 차며 옷 속에서 손을 빼냈다.
“어째 갈수록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구나. 기운을 불어넣을 땐 얌전히 있으라고 했거늘.”
“그쪽이 먼저 말 걸었잖아요.”
“그럼 입만 움직여. 몸까지 흔들지 말고.”
“내가 언제 몸을 흔들었다고 그래요? 애초에 이렇게 꽉 잡고 있는데 몸을 어떻게 흔들어요? 맨날 트집이야.”
카델이 제 허리를 꽉 옭아맨 단단한 팔뚝을 두드리며 투덜거리자, 헛웃음을 뱉은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허공으로 뜬 몸에 카델이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난리를 피웠으나, 쿤라는 그 간지러운 몸부림을 가뿐히 무시한 채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뭐예요! 아래로 던지게요?”
“고민 중이다.”
“성격이 왜 그렇게 더러워요?”
“요새 어떤 인간이 이 몸의 성질을 박박 긁어 대거든. 쥐방울만 한 주제에 아주 용맹하기 짝이 없지.”
설마 진심으로 던져 버리려는 걸까. 살짝 질린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낭떠러지를 힐끔거리자,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결계 작업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니,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요령을 알려 주마. 반쪽이, 넌 이 몸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
“이 몸의 힘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지. 방어막과 화염 마법, 그리고 순수 마력이다. 인간의 힘으로 세 종류의 힘을 전부 다루는 데엔 한계가 있어. 반쪽이 네 마법 실력은 꽤 쓸 만하니, 이 몸의 힘은 방어에 치중시키는 게 나을 거다.”
현재, 카델은 쿤라에게 개인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딱히 쿤라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삐뚤어진 반항심보단 적룡의 지식에 기대는 편이 낫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반쪽이, 집중 안 하냐?”
“하고 있거든요.”
“그럼 이 암벽을 보호막으로 덮어 봐라. 힘을 나눠 주지.”
빙 돌아 카델의 뒤에 선 쿤라가 그의 등을 짚었다. 카델은 쾌속하게 흘러드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눈 앞에 펼쳐진 암벽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만 해도 정신 나간 적룡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갖은 욕을 해 댔는데. 그 상스러운 발언들을 참아 넘기고 수련을 도와주는 걸 보면, 쿤라도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 듯했다.
“네 마력은 완전히 배제해라. 온전히 이 몸의 힘으로만 보호막을 생성하는 거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단단한 바위 위에 손끝을 대고, 깊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르르륵!
그의 손끝을 중심으로 비늘이 퍼져 나가며, 아득하게 높다란 암벽을 빠르게 뒤덮어 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늘의 움직임을 좇던 카델은 비늘 장막이 절벽을 완전히 덮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됐죠?”
“…….”
“된 거죠? ……왜 대답이 없어요.”
나름 잘 해낸 것 같은데.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트집을 잡으려는 걸까. 불만스럽게 뒤를 돌자 보이는 것은, 묘하게 얼빠진 듯한 쿤라의 얼굴이었다. 카델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주의를 끄니 그제야 쿤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왜 그래요? 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잘했다.”
“그래요?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요.”
과하게 잘해서 놀랐다. 쿤라는 절벽을 통째로 집어삼킨 비늘 장막을 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재능은 재능이군.’
자발적으로 내어 주긴 했지만, 이것은 적룡의 힘이었다. 인간이 다루는 데엔 명확한 한계가 있는 데다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쿤라가 종종 카델에게 의식을 집중하여 그의 전투를 관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카델 홀로 이 힘을 다루긴 어려울 테니, 도움이 필요할 때를 찾아 직접 나서 준 것이다.
하지만 괜히 이세계에 선택받은 영혼이 아닌 듯하다. 카델은 약간의 설명만으로 완벽하게 감을 잡아 손쉽게 자신의 힘을 활용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쿤라를 크게 흥분시켰다.
“계획이 바뀌었다.”
“예?”
“화염 마법과 마력 운용까지 함께 배우도록 하지.”
“갑자기요? 인간의 힘으로 세 가지를 다 다루긴 힘들다면서요.”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의 머리를 마구 헝클인 쿤라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네가 예뻐졌어.”
“네……? 굉장히 기분 나쁜데요.”
카델은 대놓고 인상을 구기며 쿤라에게서 멀어지려 했으나, 정말이지 오랜만에 가르칠 맛이 나는 지성체를 발견한 쿤라의 눈에는 가벼운 앙탈 정도로 비칠 뿐이었다.
그는 도망치려는 카델을 붙들고 끊임없이 지식을 주입했다. 카델의 입장에선 그저 가르침을 빙자한 괴롭힘일 뿐이었으나, 신난 적룡이 한낱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
분명 며칠 뒤에 제국으로 가야 한다 했거늘. 쿤라는 인간의 일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떠나기 직전까지 밤낮없이 카델을 괴롭혀 댔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는 본인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인간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문제는 그 열정이 너무 과하다는 데 있었다. 잠도 식사도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배움에만 집중하라는 요구는 너무하지 않은가.
고된 훈련의 후유증으로 카델이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쿤라가 다가와 직접 목덜미를 내리쳐 정신을 놓게 했다. 입맛이 없다며 늘어지면 입을 억지로 벌려 정체불명의 환단을 욱여넣었다. 먹어서 힘이 나기는 했다만, 찝찝하고 불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에 화를 내면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게.
/“반쪽이.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만, 상당히 사랑스러운 타입이군. 종달새……. 음, 그래. 무슨 말을 해도 듣기 좋은 걸 보면 꼭 종달새를 닮았어.”/
결계 작업의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아오, 미친놈. ……아오!’
쿤라에 대한 울분으로 속이 타들어 갔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카델은 사방에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끼며 묵묵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째 성에 방문할 때마다 훔쳐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기분이란 말이야.’
오늘처럼 황제와의 만남을 위해 성에 방문하는 날이면, 행방이 묘연하던 기사단장의 등장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다. 카델도 그들의 관심을 이해했다. 제국은 물론 전 세계의 병력이 대마법진 수색으로 바쁜 와중, 제국의 정예 기사단만이 통째로 자취를 감췄으니까.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리라.
그에 대한 변명거리도 몇 가지 생각해 두었으나, 카델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훔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리 지어 속닥거리기도 했고, 스쳐 가는 척 가까이서 힐끔거리기도 했다. 처음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인파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라고. 나도 너희가 내 변명을 소문내 주길 바라니까.’
우연히 눈이 마주친 한 시종에게 가볍게 눈웃음을 친 카델이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복도에는, 무리 지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낸 낮은 비명과 탄성이 머물렀다.
“봐, 봤니? 방금 나한테 웃어 주신 거? 봤어?”
“너한테는 모르겠고, 웃으신 건 봤다. 어쩜 그렇게 예쁘게 웃으실까? 꽃이 필요 없어, 정원에도 카델 님 한 명만 딱 심어 두면 돼.”
“마음 같아서는 정말 어디도 못 가시게 붙잡아 두고 힘들 때마다 보고 싶다…….”
성내에서 카델을 향한 시선이 갈수록 늘어난 것은, 그의 미스테리한 행방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의 뛰어난 외모를 감상하며 노동의 고된 피로를 달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아, 결국 이번에도 못 보여 드렸어. 카델 님한테 이 새로운 술식을 꼭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으휴, 멍청이. 지금 달려오고 있는 애들 앞에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고작 부끄럽다고 이 귀한 기회를 날리다니.”
“하지만 말 걸었다가 귀찮게 여기시면…….”
“그럼 엎드려 빌어서라도 기회를 얻어야지! 그리고 카델 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셔서, 술식 한 번 봐 달랬다고 욕먹을 일은 없다고.”
천재 마법사를 동경하여 배움의 기회를 잡고자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었으며.
“오늘도 혼자 오신 모양이지? 다른 단원들은 어디에 떼어 놓고 다니시는 건지.”
“소문대로 폐관 수련을 하고 있나 봐. 젠장,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궁금해 죽겠네.”
“슬쩍 물어볼까?”
“뭘 어떻게 물어봐? 괜히 잘못 찔렀다가 끌려가서 대련이라도 당하면? 그땐 그냥 네펠리 꼴 나는 거야. 재기불능이라고.”
소식 없는 적린 기사단의 성취를 궁금해하며 자신의 성장과 비교해 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고요의 산맥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래도 외부와 교류가 적던 기사단은 더욱더 두꺼운 베일에 싸인 채 여러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최근에는 그들이 적룡과 연이 있다는 소문까지 퍼진 탓에, 성내에서 그들의 위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물론 그만큼 사람들이 느끼는 거리감도 늘어났으므로, 이 기함할 만한 사실을 카델이 알아낼 방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