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3화 (313/521)

*

“…….”

모든 이야기를 들었으나, 카델은 그에 대한 어떠한 감상도 꺼내 놓지 않았다. 그저 제 앞에 고개를 숙인 데릭을 응시할 뿐이었다.

“자네가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노라 나서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젠가의 오명을 못 본 척 회피하며 뻔뻔스레 제국을 통치했겠지. 아니, 결국은 끝까지 나의 일을 남의 손에 떠맡기는 것일 뿐이야. 한심한 자이지. ……미안하네.”

제국의 황제가 한낱 기사단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참으로 의미하는 바가 많은 파격적인 행위였지만, 카델에겐 그다지 충격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는 데릭이 알린 과거사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델 라이토스의 것일지 모를 씁쓸함이 차올랐으나, 무시했다.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예. 미안하셔야죠.”

그럼에도 불쾌한 감각이 남았다. 카델은 딱딱한 목소리로 냉담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날의 진실을 알리게 된다면, 라이토스가의 오명은 단숨에 벗겨질 겁니다. 하지만 제국에 충성하던 가문을 팔아 권력을 거머쥔 폐하와 황실의 지지도는 폭락하겠죠. ……그걸 막기 위해 제가 전쟁의 승전고를 울릴 영웅이 되어야 하는 걸 줄은 몰랐습니다.”

만약 카델 라이토스가 세계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 되고, 그의 찝찝한 과거가 사실은 숭고한 희생의 결과물이었음을 알린다면. 세상은 그 원흉인 황실을 타박하겠으나, 그마저도 오래 집중하진 못할 것이다. 그저 지나가듯 혀를 차고, 그 후엔 돌아온 영웅을 칭송하기 바쁠 것이다.

제국의 기사인 카델 라이토스의 명예는 황제의 바람막이가 된다. 그는 약간의 불신을 얻는 대신, 역대 최강의 전력을 얻게 되리라.

결국은 이번에도 황제는 젠가가 아닌 제국을 택한 것이다.

“누구의 희생도, 양보도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치도 않은 희생의 대상이 되어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폐하. 그러니 계속 미안해해 주세요.”

“…….”

“제가 승리한다면, 그때 지키지 못했던 저희 가문을…… 그냥 내버려 두십쇼. 그저 먼발치에 떨어져 행복만 빌어 주십쇼.”

이것은 젠가의 계획에 없던 결말이었겠으나, 그가 한 선택의 대가는 참혹했다. 그의 희생으로 죄 없는 가문의 일원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카델은 그곳에서 어렵사리 살아남은 라이토스가의 형제들을 기억했다. 그들만큼은, 타인의 선택으로 삶이 허무하게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데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과연 그가 약속을 지킬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얘기대로라면 라이토스 가문이 또다시 황실에 농락당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카델은 황제를 더 채근하는 대신, 짧은 인사와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지하실의 긴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는 때에도. 데릭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재를 완전히 빠져나온 카델이 뒤늦게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문을 닫고, 부산스레 눈을 깜빡였다.

‘더럽게 싱숭생숭하네.’

기분 나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가슴을 꾹 쓸어내렸다.

“걱정하지 마. 잘 마무리 지을 테니까.”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존재를 달래듯 말했다. 긴 시간을 보내며, 여환은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쿤라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 영혼의 감정을 받아들여. 어떤 게 네 것인지 분별하는 걸 멈추고, 모조리 네 것이라 여기며 살아라. 만약 마지막에 가서 그 영혼과 함께 많은 감정을 잃는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그 영혼이 너와 함께 느낄 수 있게 해.”

결말에 다다라 수많은 감정을 잃는다 할지라도, 더는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를 부정하며 방황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그 나름의 속죄이자 결심이었다.

‘……산으로 돌아가야겠어. 곧 파견 임무가 내려질 것 같으니, 잘 준비시켜야지.’

그러니 카델 라이토스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코앞으로 다가온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

부드럽게 윤기 흐르는 짙은 보랏빛의 머리칼.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검은 눈동자, 얇은 입술과 창백한 피부, 가녀린 체구. 몇 차례 기침하던 그녀는 어깨에 두른 담요를 여미며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열중하는 눈빛은 강렬했으나, 핏기 없는 안색이나 기침을 따라 들썩이는 마른 몸은 보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골몰했다. 넓은 책상 위에는 인간계와 마계의 지도, 용도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술식의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가 몇 겹씩 쌓여 있었다.

그녀의 집중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깨졌다. 살짝 미간을 좁힌 그녀가 고개를 들자,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지팡이를 짚은 여자의 반대쪽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이 들려 있었다.

“……셀레브.”

“내가 방해했어?”

“조금.”

단호한 대답에 셀레브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가 작게 웃으며 컵을 눈짓했다.

“그거 주려고 온 거야?”

“응. 커피야. 마시고 다시 집중하라고.”

“좋아, 고마워.”

절뚝거리며 다가온 셀레브에게서 커피를 건네받으니 곧 흥미로운 탄성이 들려왔다.

“거의 다 완성됐잖아? 역시 천재라니까.”

“더 빨리할 수 있었어. 몸만 멀쩡했다면…….”

“무리하지 마. 네 능력이 없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단 말이야, 공주님.”

“그런 말 하지 마. 누구도 빠져선 안 돼. 나도, 너도, 우리의 동족들도. 모두의 힘이 필요해. 이 정도로 무리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천천히 셀레브의 몸을 훑어 내렸다. 시선이 멈춘 곳은 의족을 끼운 오른쪽 다리였다.

“그 다리, 정말 회복시키지 않을 거야? 네 재생 능력이라면 가능하잖아.”

“안 해.”

“왜?”

“이건 내 치욕의 증거야, 에밀리아.”

셀레브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의족을 툭툭 건드렸다. 눈빛에선 어느새 차오른 살기가 번들거렸다.

“절대 잊지 않아. 그때의 치욕을 두 배로 갚아 주기 전까진, 절대로 고치지 않을 거야.”

그런 셀레브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컵을 가져다 댔다.

“다속성 마법사…라고 했었지?”

“내 발목을 잘라 간 놈? 그랬지. 하지만 뭐, 그땐 내가 너무 들떠서 방심했으니까. 다시 붙는다면 제대로 밟아 줄 수 있어.”

“물론이야. 널 믿어. 하지만 다음에 그 마법사를 만난다면, 이름을 알아 왔으면 좋겠어.”

“이름? 쓸데없이 왜?”

“부탁할게.”

그녀가 얇게 눈을 휘자,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던 셀레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작업해야겠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하지…….”

셀레브의 걱정을 물린 그녀가 몇 모금 마신 잔을 책상에 올려 두며 다시 펜을 들었다. 청초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으나, 이어지는 말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업이 코앞이야, 셀레브.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한시라도 빨리 인간들을 몰살하고 싶어 미치겠는걸.”

그녀의 의욕에 찬 눈빛을 마주한 셀레브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게, 공주님.”

<여성향 카드 게임에 빙의해 버렸다> 1부 完

4개월 뒤, 제국의 국경선.

산맥을 사이에 두고 중립국 ‘사투스’와 뺨을 맞댄 그곳은, 근 1년 만에 주어진 적린 기사단의 새로운 파견 지역이었다.

“오래 서 있기도 힘든 이 엄동설한에 파견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날이 좋으면 정찰을 해도 산책하는 기분일 텐데요.”

몸을 녹이기 위해 가져왔던 술도 전부 마셨고, 카델이 챙겨 준 보온석의 열기도 다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시탑을 두드리는 칼바람은 몸에 흐르는 피까지 차갑게 얼려 버릴 기세였다.

가르엘이 혹독한 업무 환경에 투덜거리며 팔짱을 끼자, 그의 옆에 있던 요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 시키지 마.”

“이런, 그건 곤란하죠. 바깥이 이렇게나 서늘한데, 저희 사이의 분위기까지 썰렁하면 얼마나 춥겠어요. 제가 힘을 내 봐야죠.”

“…….”

“지금 저 자식은 입을 찢어도 소용없으니 20분만 참아 보자고 생각했죠? 이젠 요젠 경 입꼬리 각도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답니다.”

요젠은 온 힘을 다해 가르엘을 향한 살의를 다스렸다. 이곳에서 가르엘의 귀찮은 도발에 넘어가선 안 된다. 이미 한 번 가르엘을 공격했다가 카델에게 주의를 받은 전적이 있었다. 썩 좋지 못한 경험이었으므로, 두 번은 겪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요젠의 자제력과 가르엘의 활기가 어우러진 20분이 지나고. 할당된 시간을 모두 채운 두 남자가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아래에는 교대조인 루멘과 라이돈이 있었다.

“두 분, 옷을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시는 게 나을 겁니다. 감시탑 위는 아래보다 훨씬 춥거든요.”

가르엘이 얼어붙은 팔을 문지르며 말하자, 한 품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 온 라이돈이 콧방귀를 꼈다.

“나를 연약한 인간이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 시원해서 딱 좋은걸.”

“뭐, 라이돈 경은 그렇겠죠. 아, 오래 서 있었더니 배고프네요. 루멘 경, 오늘은 식사 당번이 누구였죠?”

“대장입니다.”

“……그래요?”

저 멀리 자리한 천막을 일별한 가르엘이 시선을 돌렸다. 라이돈의 간식 가방을 턱짓한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이돈 경이 간식을 한가득 챙겨 온 이유가 있었군요.”

“식기 전에 서두르십쇼. 따뜻할 때가 그나마 나으니까요.”

루멘은 위로하듯 가르엘과 요젠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시탑을 올랐고, 라이돈은 얄밉게 웃으며 하늘을 날았다. 금세 덩그러니 남게 된 두 남자는 무거운 걸음을 떼어 천막을 향했다.

천막에 가까워질수록 따뜻한 열기와 짙은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조금씩 몸을 덥히는 훈기와 함께, 천막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카델과 반의 모습이 드러났다.

“쯧, 이번에도 양 조절을 못 했네. 너무 많이 만들었어. 루멘하고 라이돈한테 좀 더 줄걸. 반, 너라도 더 먹어.”

“네……? 저, 전 괜찮아요, 단장. 배불러요.”

“벌써? 평소보다 적게 먹었잖아. 속이 안 좋은 거야?”

“그건…….”

“아니야? 그럼 더 먹어야지. 여기 들어간 양배추가 속을 편하게 해 줄 거라고. 자, 그릇 가져와.”

카델은 머리에 하얀 두건을 질끈 동여맨 채 커다란 냄비 앞에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곧 끓어 넘칠 것 같은 스튜를 부지런히 젓고, 고기와 야채의 비율이 애매하다며 계속해서 재료를 추가하고, ‘간은 감’이라는 논리로 맛도 보지 않으며 마구 향신료를 쏟아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르엘과 요젠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들은 말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서로 간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둘을 발견한 반이 희번득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단장! 저기 단원들이 오는데요? 저 두 놈한테 먹으라고 하면 되겠어요.”

“어! 가르엘, 요젠! 딱 맞춰 왔네. 빨리 와, 밥 먹자.”

요젠의 입꼬리가 움찔 떨렸다. 가르엘이 보았을 때, 현재 요젠의 감정 상태는 ‘극한의 인내’를 띠고 있었다. 물론 가르엘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가 굳이 저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는 카델의 예쁜 얼굴 때문이었으니까.

“하하, 단장님……. 식사 당번은 저희끼리 돌아가면서 하겠다니까요. 우리 단장님은 그냥 안에서 쉬면 되는데.”

“무슨 소리야.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나만 빠져? 그럴 수야 없지. 그리고 몇 번 해 보니까 요리도 좀 재밌는 것 같아.”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요젠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한계까지 차오른 거무튀튀한 녹색 스튜를 받아 든 요젠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아. 덜어 줘.”

“뭐? 이게 어디가 많아? 넌 너무 조금 먹어서 탈이야. 이렇게 추울 때는 배를 든든히 해야 한다고.”

“몸이 무거우면 움직이기 힘들어.”

“금방 소화되는 재료만 엄선했단 말이야.”

“……알았어.”

나름의 반항이 먹히지 않자 요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스튜를 들고 한사코 거절하던 추가분을 해치우기 시작한 반의 옆에 앉았다. 반은 씹지도 않고 음식을 삼켜 대며 코웃음을 쳤다.

“어딜 도망가려고. 수작 부리지 마라, 암살자.”

한참을 머뭇거리던 요젠이 작은 들숨과 함께 숟가락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스튜를 떠 한 입 삼키자, 혓바닥 위로 쉬이 형용하지 못할 독특한 맛이 퍼졌다. 그것은 맛이 있다, 없다로 표현할 수 없는, 실로 기묘한 맛이었다. 온갖 향신료의 향이 입안에서 각기 따로 놀았다. 초마다 맛이 바뀌어 맵기도, 짜기도, 싸하기도, 달아지기도 했다. 전쟁은 다름 아닌 제 혓바닥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충격적인 맛.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다. 아무리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요젠이라지만, 그에게도 마지노선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하지만 참다못한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던 때.

“오늘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어. 어때? 저번엔 맛이 좀 싱거운 것 같아서 이번엔 재료를 듬뿍 넣어 봤거든. 좀 기운이 나? 응?”

잔뜩 들뜬 카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얼굴을 만지지 않아도 기대에 찬 표정이 그려졌다.

반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요젠의 발을 티 나지 않게 걷어차자, 그제야 요젠이 입을 열었다.

“재밌는…… 맛이야. 잘 먹을게.”

“맛이 재밌어? 흠……. 뭐, 먹으면서 즐거우면 됐지. 많이 있으니까 다 먹으면 말해!”

모든 방면에서 자기 검열이 철저한 카델이었으나, 그가 유일하게 너그러워지는 분야가 바로 요리였다. 요젠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치환한 그가 제법 흡족한 얼굴로 묽어진 스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엔 카델의 음식에 토를 달 수 있는 인물이 없었으므로, 모인 단원들은 냄비를 가득 채운 스튜를 전부 비워 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찌들어 우울한 식사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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