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4화 (314/521)

*

“흐응, 지루해. 이게 대체 며칠째야?”

감시탑 위.

이미 한차례 카델의 폭력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 라이돈은, 혓바닥 세척을 위해 사탕을 굴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로 21일째지.”

“바보야, 루멘? 누가 날짜를 못 세서 그런 걸 물어본 줄 알아?”

“……네 짜증스러움에 면역됐다는 게 가장 짜증스럽군. 그만 투덜거리고 망이나 봐.”

루멘의 타박에도 라이돈은 끊임없이 칭얼거리며 무료함을 표출했다. 봉인진 조각이 위치한 국경선에 파견된 지 21일째. 대마법진 발동과 관련된 어떠한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21일 동안 기사단의 루틴은 늘 한결같았다. 조를 짜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식사를 하고, 남은 시간엔 단련을 했다. 긴장감은 첫 3일 동안만 유지되었다. 대기 상태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그들은 이 무난한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1년간의 수련과 약 한 달간의 대기. 오래도록 전투를 쉬며 몸이 근질근질해진 것은 라이돈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있는 루멘도 길었던 수련의 성과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루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국경선 너머를 주시하고 있던 때였다.

“어이! 마법진에선 아직도 별 징후가 없어?”

반이 감시탑을 찾아왔다. 루멘이 그가 있는 아래를 내려보며 고개를 젓자, 반이 손짓했다.

“그럼 내려와라. 단장이 불러.”

*

카델은 심각한 얼굴로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손에 들린 종이를 툭툭 건드린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 30분 전에 스니벡 공국, 둥켈하이 왕국 방면 마법진 조각이 발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만약 그쪽이 시작 지점이라면, 우리 쪽 조각도 머지않아 반응을 보일 거다.”

드디어.

카델이 가져온 정보에 기사단의 분위기가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코앞으로 다가온 전투에 흥분과 초조함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과연 발동된 대마법진은 얼마나 대단한 적을 내놓을 것인가. 막연한 상상이 단원들의 머릿속을 채워 갔다.

카델은 그런 부하들의 중심에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수면 시간을 줄이고 정찰 시간을 늘린다. 보초는 두 명이 아닌 세 명씩. 하지만 앞으로 이틀은 두 명, 세 명씩 조를 이뤄야 할 거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됐거든.”

“이런 때에 자리를 비우겠다고?”

루멘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카델은 제 펜던트를 움켜쥐며 답했다.

“말했잖아, 스니벡 공국이랑 둥켈하이 왕국 쪽에서 시작됐다고. 근처 산맥에 사는 용이 확인해볼 게 있대. 그 김에 나도 대마법진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거야.”

카델은 단단한 비늘을 꽉 움켜쥔 채 몸을 바짝 엎드렸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세기의 바람이 뺨과 귓가를 미친 듯이 할퀴고 지나갔다. 매분 매초 제멋대로 바뀌는 고도와 풍압에, 카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필사적으로 짧은 호흡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도착했다.]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과 함께 붕 떠 있던 머리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땀으로 흥건해진 손에 조금씩 힘을 풀며 고개를 들자, 구름 낀 드넓은 상공이 펼쳐졌다.

“무슨 비행 속도가 이렇게 무식해요……? 까딱했으면 전쟁 시작도 전에 낙사할 뻔했잖아요.”

[이 몸이 네가 터진 고깃덩이가 되도록 놔둘 것 같나? 한결같이 겁만 많고 믿음은 없군.]

비명도 무시하고 질주했던 주제에 믿음은 개뿔이었다. 카델은 손을 떼어 내는 척 비늘을 쥐어뜯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저겁니까?”

[그래.]

“설명이랑은 좀 다르네요. 그냥 빛이 좀 나는 정도라더니.”

[널 데려오는 동안 다음 단계로 넘어간 모양이야.]

잿빛 눈동자 위로 일직선의 어두운 그림자가 새겨졌다. 카델은 구름을 뚫고 솟구친 음험한 보라색 빛기둥을 응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저 불길한 기운은 두말할 것도 없는 마기.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마기가 집어삼킨 마법진 조각과 주변에 포진한 병사들이었다. 카델은 검은 점처럼 빼곡하게 모인 그들의 인원을 가늠하다, 허리춤을 더듬었다. 곧 그의 손안으로 작은 마름모꼴의 은색 보석 같은 것이 들려왔다.

광역 통신을 위한 마도구, [울로]였다. 그것에 소량의 마력을 불어넣자, 보석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기계 잡음이 흘러나왔다.

카델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조절하듯 울로를 조작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마도구에서부터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둥켈하이 셀브린 숲! 마법진 발동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인근 대피소로 주민들을 이동 중이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숲으로 지원을 부탁합니다!]

[여기는 그림자 기사단. 셀브린 숲으로 지원 갑니다. 근처 대기조도 즉시 합류하십시오.]

[스니벡 인테 설원, 마법진 중앙에서 균열 발견. 대량의 마기가 새어 나옵니다.]

[여기는 둥켈하이 헨데스 굴! 마법진에서 나온 마기가 천장을 무너뜨렸습니다! 부상자 다수 발생, 지원을 요청합니다!]

[울로]에 간헐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을 때마다 채널이 바뀌듯 흘러나오는 음성의 내용이 달라졌다. 그들의 다급한 지원 요청과 상황 보고를 연달아 확인한 카델이 [울로]를 다시금 허리춤에 매달았다.

“스니벡보다 둥켈하이 쪽 진행이 더 빠른 것 같네요. 아무래도 진짜 시작 지점은 여기, 둥켈하이인 것 같은데.”

[이 몸의 거처 앞이 가장 먼저 더럽혀지다니, 실로 불쾌하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콧김을 내뿜은 쿤라가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당장이라도 불쾌함의 근원인 마족을 소탕할 것 같은 기세이지만, 카델은 쿤라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일단은 대마법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죠. 다른 곳에서도 진행 중일지 모르니까.”

그다음엔 진행도가 가장 빠른 곳을 찾아내야 했다. 대마법진 발동이 완료된 뒤, 적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시작부터 주도권을 빼앗길 순 없어. 놈들이 어떤 대단한 수를 쓴다고 해도 최대한 빨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카델은 다시 비행 준비를 하는 쿤라의 등에 밀착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카델의 주위로 반투명한 붉은 장막이 둘렸다. 카델의 뜻이 아닌 쿤라의 선택이었다. 순진하게 장막의 용도를 물으려던 카델은, 이어지는 폭발적인 속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

마법진을 돌아보는 데 길어야 이틀이면 충분하다던 쿤라의 장담은 허세가 아니었다. 카델은 단 하루 만에 전 대륙을 돌았다.

물론 쿤라의 장막이 없었다면 진즉에 살이고 뼈마디고 모조리 쓸려 나가 하늘에서 공중 분해되었겠지만, 결과적으론 멀쩡히 살아남아 대마법진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었다.

알아낸 것은, 마법진 조각의 발광이 둥켈하이를 시작점으로 삼아 시계 방향으로 진행 중이라는 것. 아직까진 일부일 뿐이지만 마법진이 차근차근 발동되고 있음은 확실했다. 또한 그들이 대마법진을 전부 돌아보고 온 뒤에도 마기의 빛기둥 따위가 존재하는 곳은 둥켈하이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날 곳을 둥켈하이 왕국이라 결론짓고, 그곳의 상황을 감시하기로 했다.

“어느 쪽일 것 같아요, 쿤라?”

카델의 윽박을 듣고서야 뒤늦게 속력을 조절해 둥켈하이로 비행하던 쿤라가 눈을 굴렸다.

[뭐가 말이지?]

“대마법진이요. 전부 발동되면 뭐가 소환될 것 같냐고요. 전에 이 마법진이 대규모 마족을 소환하는 용도일 수도, 마계를 통째로 꺼내 오는 용도일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설마 진짜로 마계가 소환되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뭐예요, 그 심심한 대답은.”

[현실적으로 봤을 땐 대규모 마족 쪽이 더 가능성이 클 거다. 마계에서 마족들만 골라 소환시킨다면 그놈들은 제 본거지에서 끊임없이 전력을 보강할 수 있을 테고, 무방비하게 노출된 인간계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테니까. 그보다 손쉬운 방법은 없지.]

“…….”

[하지만 놈들의 목적이 인간계의 정복이 아닌 파괴에 있다면…….]

잠시 뜸을 들이던 쿤라는 부드럽게 고도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마계는 인간계의 지하에 봉인됐다. 지하의 마계 도시가 통째로 소환된다는 건, 그 자체로 놈들의 승리를 의미해. 마계의 소환이 완료된다면 인간계는 흔적도 남지 않고 허물어질 테니까.]

“……그래서 어느 쪽 같다는 거예요.”

[내 직감은 놈들의 파괴 본능을 가리키는군.]

덤덤한 대답에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응시하는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 반대에 걸고 싶네요.”

마계 전쟁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정보라곤 전쟁과 관련된 스테이지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 그리고 각 스테이지마다 쉼 없이 마족이 등장한다는 것뿐. 하지만 만약 쿤라의 말대로 마계가 인간계를 뚫고 소환된다면, 마족을 처치할 새도 없이 인간들의 터전은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다.

‘그러니까 마계 소환은 아니야. 아니어야 해. ……하지만 만약, 정말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습격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대신, 맞설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겠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카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돌아온 둥켈하이에는 여전히 굵직한 마기의 기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새 조금 더 범위가 커진 것도 같았다.

“내일 아침까지 지켜보죠. 그때까지도 저런 현상만 지속된다면 부하들에게 돌아갈 겁니다. 이쪽 상황은 쿤라, 당신이 본체로 확인해서 전달해 줘요.”

[내 본체는 산을 벗어나지 않을 거다.]

“둥켈하이가 코앞인데,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뭐라도 보이는 게 있을 거 아녜요.”

[지금 이 몸에게 정찰을 시키는 거냐?]

“지금 하는 건 정찰이 아닌가 보죠?”

불만스럽게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이동을 멈춘 쿤라는 둥켈하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적절한 위치와 고도를 찾아 허공에 머물렀다. 그와 함께 아래를 살피며 대마법진의 발동을 기다리던 카델은, 밤이 깊어짐에도 달라지는 것 없는 풍경에 혀를 차며 드러누웠다.

“나 잘래요. 뭐 이상한 거 보이면 깨워 줘요.”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다만.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

“당신이 다 받아 줘서 이 모양이 됐다는 건 눈치챘고요?”

[…….]

“잡니다.”

선언한 카델이 곧장 눈을 붙였다. 신중히 감각을 집중하자, 아주 작고 고른 숨소리와 미세한 무게감이 움츠리는 것이 느껴졌다. 적룡에게 정찰을 맡기고 본인은 이 높은 하늘에서 편안히 잠을 청하겠다니. 이 얼마나 오만무도한 인간인가.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여 방자한 인간을 놀라게 해 주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으나, 쿤라는 저도 모르는 새 자신이 날갯짓의 강도를 줄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꼭 잠든 인간을 깨우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진정 자신이 저 작은 인간의 성정을 망쳐 놓았단 말인가. 약간의 충격에 휩싸인 그가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를 굴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뭐든 키우면 정이 든다더니, 최근 카델을 너무 봐준 듯했다.

깨어나면 꼭 제대로 버릇을 들여 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도 쿤라는 슬쩍 방향을 비틀어 카델을 향한 바람을 막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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