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핵심 메인 퀘스트 아니랄까 봐, 떠오르는 시스템 창의 길이부터가 달랐다. 실패 페널티의 가혹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스템 창에 떠오른 그 어떤 문장보다 카델의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이 있었으니.
‘인간계 침략 진행도가 벌써 70%라고?’
설마 다른 지역의 마법사들이 마법진 해제에 실패한 것일까. 섣불리 판단하기엔 함께 표기된 마계 소환 진행도는 고작 21%였다. 21%의 소환으로 침략이 70%나 진행된 것이라면, 100%는 숨만 쉬어도 달성이다.
곤혹스러운 의문이 떠올랐으나,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이 나왔다.
“아하하! 자기, 완전 멋있잖아! 그렇게 빨리 마법진을 부수다니, 역시 내 인간이야.”
공중에서 카델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돈이 그를 덥석 안고서 하늘을 날았다. 난데없는 비행에 당황하기도 잠시. 마법진 해제와 함께 멈췄던 지진이 다시금 시작됐다.
“뭐지? 마법진은 확실하게 파괴했는데.”
“도시가 나오는 게 아니야. 저길 봐.”
라이돈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것은, 마기가 사라진 균열의 틈. 그리고 그 사이를 헤집고 튀어나오는 수십 개의 붉은 손아귀였다.
“저건…….”
먼 거리에서도 그 흉측함이 느껴지는 불그죽죽한 속살. 살가죽이 뒤집힌 인간의 형태를 한 저것은, 더 볼 것도 없는 ‘레드 맨’이었다. 과거 셀레브와 함께 소환되었던 마계의 마물.
‘대마법진에 이상이 생긴 걸 감지하자마자 전력부터 내보낸 거군.’
이미 대마법진의 발동은 시작되었고, 마계 봉인진은 효력을 잃었다. 막막한 상황이나, 마계 도시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대마법진을 파괴하고, 몰아치는 적들을 막고, 새로운 봉인을 구축하는 것.
메인 퀘스트의 제목이 ‘마계 전쟁 – 전편’인 것 또한 같은 맥락일 테다. ‘전편’에서 해야 할 일은 대마법진의 파괴와 적의 섬멸이다.
“일단은 저놈들부터 처리해야겠어. 라이돈! 내려가자.”
“난 위에서 싸우고 싶은데?”
“지시하다가 목 나가기 싫거든. 빨리 내려 줘.”
알아서 싸우라고 하면 되잖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라이돈은 순순히 동료들의 곁에 착지했다. 카델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놈들은 어떻게든 마법진을 복구하려 들 거야. 대마법진이 완전히 붕괴하기 전까진 절대 멈추지 않을 거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지. 대마법진을 부수고, 마족을 쓸어버린다. 할 수 있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이었다. 그동안 기사단은 공기 좋은 산에서 요양이나 해 온 게 아니다.
그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물 군단이 땅을 뚫고 등장했다.
“출격한다!”
빠져나올 구멍을 확보한 레드 맨 군단은 무서운 속도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보다 기사단의 공격이 더욱 빨랐다.
“반이 선두로! 나머지는 새어 나온 마물을 상대해!”
광전사인 반은 시작부터 등장한 대량의 마물에 기쁜 마음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마물의 틈으로 뛰어든 그의 사방으로 우악스러운 손길이 날아들었으나, 쿤라의 비늘 갑옷이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반은 몰려드는 레드 맨 군단의 압박을 무시한 채 꿋꿋하게 검기를 날렸다. 팔을 잡아채는 손아귀를 오직 힘만으로 떨쳐 내고, 육탄전도 서슴지 않았다. 레드 맨은 검기에 꿰뚫려 관절이 꺾이면서도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반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순식간에 충분한 피를 흡수한 그의 대검이 낮게 공명하며, 반이 오라를 개방했다. 대기를 물들이며 넓게 퍼져 나가는 붉은색의 기운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예열을 마쳤으니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전투를 시작하라는.
“우리가 지키는 곳은 국경선이다! 한 마리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전부 죽여!”
카델은 후방에서 [화마의 화살]을 장전하며 가르엘에게서 받은 여분의 [울로]를 작동시켰다. 그가 가지고 있던 [울로]가 쿤라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간 탓이었다.
통신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침착한 보고의 수가 늘었다. 카델은 지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통신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퀘스트는 우리가 맡은 구역만 잘 지킨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야. 전체적인 방어를 도와야 한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평범한 기사들과 자신의 부하들이 가진 역량의 차이는 상당했다. 게다가 이쪽은 적룡까지 등에 업고 있으니, 구역을 정리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라. 그 증거도 있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23%」
「인간계 침략 진행도 : 74%」
기사단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레드 맨 군단을 압도하고 있었으나, 침략 진행도는 그새 4%가 늘어났다. 타 구역의 제압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습격과도 같은 마계 소환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여기부터 해결하고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이동해야겠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카델이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딱 소리를 내자, 장전되었던 불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카델의 통제 아래 아군을 완벽하게 빗겨 나간 불화살 사이, 반의 [가시]가 덫처럼 펼쳐졌다. 불화살에 쓰러지지 않은 적들의 육체는 [가시]에 묶여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묶인 적들의 위로 순식간에 기다란 섬광이 새겨졌다. 한순간 눈이 시릴 정도로 광대하게 늘어난 섬광의 향연. 그 빛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얼음과 마기, 암기가 적을 관통하며, 동강 난 몸뚱이를 인정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몸이 잘려도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레드 맨을 상대할 전략이었다.
‘수월하군.’
이제 웬만한 마물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카델은 지하에서 빠져나오는 레드 맨 군단의 수가 눈에 띄게 적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생각보다 빨리 동나는데. 이쪽의 전력이 마계의 예상 밖인 건가, 아니면…….’
짧게 입맛을 다신 그가 [화마의 화살]을 거뒀다. 조무래기를 먼저 내보내 적의 혼란을 부추기고, 그 틈을 타 습격을 꾀하려는 술수라면 뻔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거다! 다들 준비해!”
그리고 카델의 짐작대로, 레드 맨 군단이 빠져나온 구멍의 반대쪽에서부터 폭음이 울려 퍼졌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처참하게 허물어진 기사단의 천막. 그리고 자욱한 흙먼지를 해치며 여유만만한 걸음으로 전진하는 한 쌍의 남녀였다.
“미쳤어? 내가 아까운 마력까지 써 가면서 무음 마법진을 만들어 줬더니, 왜 갑자기 바닥을 깨부수냐고! 제정신이야, 누나?”
“어, 네 아가리는 제정신이고? 감히 누나한테 미쳤어? 대가리 딱 대. 반으로 쪼개 줄 테니까.”
검은 옷자락을 흩날리며 다가오는 그들의 등 뒤로는 선명한 암적색의 날개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카델은 눈앞의 적보다 서로의 버르장머리가 중요한 듯 말다툼 중인 그들을 말없이 주시했다.
“이것 봐! 공주님이 협박 같은 거 하지 말고 사이좋게 다녀오라고 한 소리 못 들었어? 요새 그렇게 처먹더니 귓구멍에도 살쪘냐?”
“하, 이 새끼가 나이 좀 먹었다고 살살 기어오르네? 까불지 마라. 안 그래도 지금 두더지처럼 땅굴 파서 등장한 거 멋없어서 짜증 나니까.”
확실히 눈에 익은 외형이다. 구릿빛 피부에 붉은 머리칼, 모델 같은 장신의 체형. 거친 분위기마저 꼭 닮은 저 두 남녀는, 마족 남매 소르와 베리.
‘남동생이 베리, 마법사였고. 누나 쪽이 소르, 격투가였지. 분명히 아는 얼굴이야. 게임에서 공략했던 기억도 있어. 그런데 왜…….’
격파했던 적의 순서를 완벽하게 꿰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저 남매가 이 전쟁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등장 순서가 바뀐 건가? 어째서?’
순서가 바뀐다고 해서 해야 할 일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야, 마계 전쟁에서 맞닥뜨릴 적의 순서는 카델이 그나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기껏 선점한 우위가 무용해진 기분이라 썩 즐겁지는 않았다.
카델은 조금씩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뒤를 보았다. 어느새 레드 맨 군단을 정리한 부하들 역시 새로 등장한 마족을 경계하고 있었다. 카델은 그중 요젠을 향해 가볍게 눈짓하곤, 비행 중인 라이돈을 불러 마족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매의 앞으로 얼음 창이 쇄도했다. 직전까지 남동생을 구박하던 소르는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얼음 창을 쳐 낸 뒤, 인상을 쓰며 베리를 돌아보았다.
“야! 너 일 똑바로 안 해? 네가 제대로 장막을 둘러야…….”
역정을 내던 소르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그녀의 시야 속으로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한 요젠과 남동생이 들어찼다. 언제 온지도 모를 요젠의 존재에 놀랄 틈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요젠에게 붙들린 채 깔끔하게 경동맥을 절단당한 남동생의 핏기 없는 얼굴이 있었으니.
요젠은 제품에서 꺽꺽대며 피거품을 문 베리를 소르에게로 던지듯 밀쳤다. 그리고 요젠이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냄과 동시에, 소르는 제게 떠넘겨진 남동생의 숨이 끊겼음을 직감했다.
“이… 이…….”
빠르게 식어 가는 베리의 몸뚱이를 거칠게 끌어안은 소르의 눈에 실핏줄이 터지며, 그녀의 주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요젠은 그때까지도 물러나지 않은 채 가만히 소르의 분노를 마주했다.
“이 씹새끼가……. 넌 내가 무조건 죽인다.”
격투가인 소르의 전투법은 언뜻 셀레브와 비슷해 보였으나, 그 속도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셀레브의 주먹은 잔상이 생길 만큼 재빨랐다. 그에 반해 소르의 주먹은, 당황스러울 만큼 느렸다.
“베리는 말이야, 비록 허접하고 무능하고 연약한 사내새끼지만…….”
기마 자세로 선 그녀는 그러쥔 주먹을 명치 높이까지 끌어 올린 뒤, 오른팔을 천천히 내뻗었다. 어느 스포츠 잡지 표지에나 실릴 법한 군더더기 없는 정권 지르기 자세.
그녀의 정권이 요젠과 가까워짐에 따라, 몸에서 피어오른 마기가 고요하게 일렁였다.
“아무리 허접한 사내새끼라도, 내 남동생이야. 내 소중한 혈육이란 말이다……!”
일순, 소르의 안광이 번뜩이며 쭉 뻗은 정권이 요젠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주먹은 분명 닿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콰앙!
우레와 같은 폭음을 동반하며, 찢어질 듯한 충격파가 대기를 휩쓸었다. 잠잠히 일렁이던 마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디딘 발아래가 움푹 꺼졌다.
단 한 번의 정권 지르기. 그 느릿하고 고요한 행위의 결과물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요젠의 육체는 지척에서 펼쳐진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채 그대로 폭발하듯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소르는 뻗었던 정권을 느리게 거두며 살기 어린 눈을 번뜩였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불그죽죽한 살점이 아닌, 먹처럼 퍼진 암기.
“……분신. 분신이었네.”
바닥에 붙어 꿈틀거리던 암기는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물처럼 흘러가는 암기의 움직임을 따라 소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확장된 동공이 암기의 주인과 그 동료들을 향하고.
“베리는, 분신한테 당한 거구나…….”
빠득, 이를 간 그녀가 귀가 아플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질렀다.
“이 머저리 새끼가아아아!”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소르의 주위로 폭풍 같은 마기가 몰아쳤다. 거꾸로 뒤집힌 머리칼이 마귀처럼 흩날리며, 탄탄하게 자리한 근육이 부풀었다.
가차 없이 뜯겨 나간 옷자락이 날리는 바람을 타고 기사단의 앞까지 날아들었다. 카델은 코앞까지 다가온 옷조각을 가볍게 밀쳐 내며, 곤란하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일단 공략대로 남동생부터 해치우긴 했는데…….’
소르와 베리를 공략할 때는 성가신 방어막과 원거리 마법을 사용하는 베리부터 처리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부하들처럼 저들 역시 한낱 데이터로 이루어진 캐릭터는 아닌지라, 형제의 죽음은 자극이 과한 듯했다. 게임 속에선 베리가 먼저 죽었다고 소르의 공격력이 상승하는 디테일은 없었으니까.
마기의 폭풍 속에서 소르는 홀로 자세를 정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카델이 곧장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저 마족은 요젠을 노릴 거야. 반, 루멘, 너희 둘이 교란을 맡아 줘. 가르엘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대기. 라이돈, 너는 이리 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돌격한 반과 루멘을 뒤로한 채, 카델은 제 앞에 착지한 라이돈의 얼굴을 쥐어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으응? 뭐야, 자기?”
가까운 거리감이 마음에 드는 듯 방싯거리는 얼굴을 꾹 움켜쥔 카델이 붉은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직 마력 괜찮지?”
“물론이지!”
“환혹술 좀 쓰고 싶은데. 가능하겠어?”
“내가 못 하는 일은 없어.”
“좋아.”
카델은 라이돈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귀엽다는 듯 뺨을 가볍게 꼬집고는 얼굴을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라이돈이 소르에게 보여 줘야 할 환상을 설명했다.
옆에서 함께 그의 계획을 듣던 가르엘이 살짝 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단장님, 보기보다 잔인한 면이 있으시네.”
“이쪽을 몰살할 생각밖에 없는 적이야. 개죽음으로밖에 돌아오지 않을 도리를 지킬 필요는 없어.”
“지당한 말씀이네요.”
카델의 설명을 이해한 라이돈은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돌아가 은밀한 환혹술을 개시했다. 고위 마족인 데다 살육에 깊이 집중한 상태인지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라이돈의 눈동자에 새로운 마법진이 새겨지던 때. 카델이 켜 두었던 [울로]에서 급박한 음성이 도드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