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국경선이 뚫렸습니다! 다수의 마물이 침입, 제국 내 안전 확보가 어렵습니다! 당장 지원을……!]
[라니아에 고위 마족 다섯 출현! 대피소가 무너졌습니다! 제국 기사단은 속히…….]
“……뭐? 라니아에?”
[울로]의 뒤섞인 음성에 집중하던 카델의 표정이 굳었다. 두 마족과 대치하던 이 짧은 순간에 제국의 북쪽 국경선과 수도가 함락당했다. 심지어 수도 내에는 마법진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었건만.
“놈들이 땅굴을 판 모양입니다. 저 시끄러운 마족도 땅을 파서 올라왔다고 했으니까요. 봉인이 풀리면서 마족들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모양이에요.”
가르엘 역시 심각해진 얼굴로 [울로]를 바라보았다. 국경선이 뚫리고, 중앙 수도가 무너졌다면. 제국은 안팎으로 포위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제국 내부가 공격당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단장님.”
기사단이 당장 출동하기엔 소르라는 마족의 존재가 문제였다. 소탕에는 적어도 30분이 걸릴 테고, 그 시간은 마족들이 제국을 점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가 라니아에 도착한다 해도 민간인과 마족이 섞여 있는 한, 사용 가능한 광역기의 종류엔 한계가 있어.’
그렇다고 지원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계 소환 진행도 : 25%」
「인간계 침략 진행도 : 76%」
시작부터 제국이 함락당한다면 진행도의 상승세를 감당할 수 없을 터. 무리하는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전투 중인 부하들을 일별한 그가 옆에서 대기 중이던 요젠을 불러 세웠다.
“가르엘이랑 나는 지금 라니아로 이동할 거야. 이곳은 너희에게 맡길 테니까, 해치우는 대로 찾아와.”
“알겠어.”
믿음과 격려를 담아 요젠의 어깨를 두드린 카델이 공중에 뜬 [울로]를 낚아챘다.
“여기는 적린 기사단. 라니아에 병력 지원 갑니다. 부상자는 자리에서 멀리 떨어뜨리지 마시고, 주민 대피를 우선으로 해 주십쇼.”
*
국내와 동맹국, 그 인근 국가까지 이어진 ‘이동 관문’. 최첨단 기술과 마법을 융합해 각국의 주요 위치마다 설치한 이 관문은, 거리와 비례한 양의 마력을 주입함으로써 관문끼리의 왕래를 도왔다.
“이런 단둘만의 데이트, 너무 오랜만인데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한번 만져 볼래요?”
“진짜 쥐어 터뜨려 줘?”
“음, 야한 발언.”
“……긴장이 과한 모양이네. 정신 차려라.”
카델과 가르엘은 주둔지 근처에 자리한 이동 관문을 작동시켜 제국의 수도, 라니아의 입구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안쪽으로 돌입하는 내내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백성들과 그들을 대피시키는 병사, 운반되는 부상자들을 수도 없이 봤다.
[울로]에서는 점점 커지는 피해를 감당하지 못해 허덕이는 보고들이 늘어났고, 자기 구역 맡기도 버거운 기사단이 억지로 병력을 떼어 놓아도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며 고함을 질러 댔다.
이 난장판의 근원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르엘은 적당한 건물 뒤편에 말을 묶어 두곤 먼저 땅을 디뎠다. 손을 뻗어 카델을 안전하게 내려 준 그가 주위에 안개처럼 퍼진 마기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여기까지 빠져나온 마족은 없는 것 같네요. 안쪽의 병사들이 잘 묶어 두고 있는 모양인데……. 여길 시작점으로 잡으면 되겠어요.”
“그래. 그럼 일단 위로 올라가 보자.”
카델은 옆쪽에 자리한 건물의 높이를 가늠하고는, 바닥으로 작은 마법진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 위로 마력을 불어넣자 상승 기류가 생성되며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카델은 마력의 양을 조절하며 건물의 지붕까지 고도를 올렸고, 가르엘은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카델의 허리를 낚아채 지붕 위로 착지했다. 살짝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쓴 그가 가볍게 목을 돌리며 숨을 골랐다.
“어떡하죠, 단장님? 저 정말 긴장하고 있나 봐요. 응원의 한 마디 부탁할게요.”
응원의 한마디를 해 달라던 가르엘은 정작 카델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긴장 중이란 말은 농담이 아닌지,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가르엘을 바라보던 카델이 불쑥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저항 없이 끌려온 가르엘의 뺨에 짧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단장님……?”
“네가 응원보다 좋아하는 육체적 접촉이야. 성공하면 한 번 더 해 줄게.”
단숨에 긴장이 풀려 멍해진 시선이 무뚝뚝한 카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호쾌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커 버렸네, 우리 단장님. 귀에 바람만 불어도 몸서리를 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싫으면 말고.”
“싫을 리가요. 무조건 성공해서 돌아가면 모두에게 자랑할 겁니다.”
「기사 ‘가르엘 몬자시’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84/100」
1년간 야금야금 오른 가르엘의 호감도 창을 일별한 카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작하자.”
크게 심호흡한 가르엘이 지붕 위에 검을 꽂고 몸을 지탱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자, 곧 왼쪽 반신을 덮는 마기가 흘러나왔다. 검은 불꽃처럼 기묘하게 구불거리는 짙은 색의 마기.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전의 가르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마기가 개방된 직후.
‘하여간, 엄살은 심해서.’
눈부신 빛무리가 그의 오른쪽 반신을 휘감았다. 마기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새하얀 빛이 성기사의 갑옷처럼 그를 감싸고.
“이런, 곤란하네……. 동료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을 생각을 하니까 자꾸만 웃음이 나잖아요. 이 처참한 전장에서 웃음이라니, 너무 마족 같아.”
완벽하게 배분된 힘을 개방한 그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균형의 추].
마기와 빛 마력을 동시 발동했을 때 생성되는 버프로, 반의 [혈류검]과 비슷한 종류라고 볼 수 있었다. [균형의 추] 상태에 돌입한 가르엘은 두 힘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우선은 치유술에 집중하겠습니다. 고위 마족은 단장님에게 맡길게요.”
가르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편으로 거대한 천칭이 떠올랐다. 한쪽 접시는 마기로, 반대쪽 접시는 빛 마력으로 형태를 이룬 천칭. 그것은 가르엘의 의지를 따라 마기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천칭의 경사가 가팔라짐에 따라 가르엘의 검을 감싼 기운 역시 마기의 비율이 높아졌다. 지옥 불에 담금질한 듯 기묘하게 구불거리는 마기에 적셔진 검이 낮게 공명했다.
공명음에 맞춰 가르엘의 반신을 물들인 마기가 검으로 흡수되듯 빨려들고, 전방을 가리킨 검 끝으로 둥글게 응축됐다. 그리고 천칭의 움직임이 정지한 순간.
[암귀격랑暗鬼激浪].
응축된 마기가 폭발하며, 대량의 기운이 거센 파도처럼 호전적으로 대지를 휩쓸었다. 그 사이사이로 잎맥처럼 뻗친 미세한 양의 빛 마력.
언뜻 반의 기술, [사자의 강]과 비슷해 보이나, 가르엘과 반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저, 저게 뭐야?”
“마기인가……? 그럼 저 번쩍거리는 빛은……. 젠장, 일단 도망쳐!”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전부 근방에 모여 있단 말이다!”
갑작스레 도시를 뒤덮는 불길한 기운에 기사들은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다는 듯 탐욕스레 다가오는 기운의 격랑. 도저히 아군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부상자를 공격 범위 바깥으로 운반하려 했으나, 다가오는 마기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앞에는 마족이, 뒤에는 정체불명의 공격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그들이 절망을 느끼려던 찰나.
[여기는 수도 라니아. 아무도 움직이지 마십쇼. 광역 치유술을 전개하겠습니다.]
그들의 [울로]에서 침착한 카델의 음성이 퍼지며, 마기의 격랑이 수도를 집어삼켰다.
“치유술? 대체 뭐가 치유술이란…… 으악!”
“건물로 들어가! 부상자 데리고 대피……!”
경악에 찬 비명이 도시의 곳곳을 메웠다. 기사들은 이어질 충격을 대비하듯 몸에 바짝 힘을 주었고, 의식이 남은 부상자들은 죽음을 직감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
“모, 몸이……. 상처가…!”
가르엘의 마기는 결코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그의 기운은 주인의 맹세와도 같은 의지를 따라 인간을 보호하고, 치유했다.
작은 생채기부터 치명적인 부상까지. 한번 마기에 닿은 상처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수복되며 본모습을 되찾았다. 유능한 치유사 열댓 명이 달라붙어 마력을 퍼부은 정도의 효율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의식을 잃었던 부상자까지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그제야 머뭇머뭇 웅크렸던 몸을 폈다. 라니아를 잠식했던 죽음의 향기는 암귀와도 같은 마기의 격랑에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마기가 라니아의 모두를 치유한 것은 아니었다.
“……마기.”
“동족의 것은 아니군.”
“크헤헤! 누구야? 이런 시궁쥐 같은 마기를 쓰는 놈은.”
라니아를 궁지로 몰고 갔던 다섯의 고위 마족. 광장에 모인 그들은 자신이 쓰러뜨린 인간을 모조리 부활시킨 익숙한 힘을 감지하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마기의 재생력은 오롯이 마족만을 위한 것. 그 위대한 힘을 열등 종족에게, 그것도 마계의 자유를 앗아 간 종족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였다.
“게다가 이 빛은 또 뭐냔 말이야. 아주 불쾌해.”
쯧쯧, 혀를 차는 동료의 발언에 마족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현재, 광장의 주위로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둥근 원형을 그리며 그들이 선 땅을 포위하고 있었다.
인간들로부터 마족을 격리하기 위한 용도 같기도, 범상치 않은 기술의 전조 같기도 했다.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빛기둥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했으나. 그다지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번 경우, 가르엘의 빛 마력은 오로지 ‘위치 표기’를 위한 용도였으니.
“……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단 말이지.”
저 멀리 눈부시게 치솟은 빛기둥을 발견한 카델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르엘이 광역 치유술로 아군의 전력을 보충해 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불청객의 소탕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