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2화 (3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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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의 분위기는 소란스럽고 급박했다. 실려 온 기사들을 치료하기 바쁜 치유사들과 성의 결계를 강화하는 마법사, 각지에서 밀려드는 보고를 전달하기 위해 달려가는 신하들.

“흐응, 정신없네. 우리 둘만 빼고 전부 얼려 버릴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옆에 딱 붙어.”

“얼마나 가까이? 이만큼?”

라이돈은 샐샐 웃으며 카델의 허리를 끌어안아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을 익숙하게 밀어 내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도착한 곳은 황제의 집무실 앞이었다.

“황제한테 조롱 금지, 마법 금지, 역정 금지. 알았어?”

“못 하게 하는 것도 많아라. 나처럼 불쌍한 요정이 또 있을까, 자기?”

“글쎄다. 불쌍한 요정은 모르겠고, 불쌍한 인간은 하나 있는 것 같네.”

자신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노크부터 하는 카델의 무심한 태도에 라이돈이 입술을 삐죽였다. 저렇게 굴면서 얌전히 있기를 바라다니. 참으로 욕심 많은 인간이었다.

그런 라이돈의 토라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델은 들어오라는 황제의 대답이 멎음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오, 이제야 실물을 보는군.”

집무실 안에는 황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풍채를 가진 남자. 턱을 덮은 거친 수염과 또렷한 녹색 눈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오래돼 주름진 흉터가 얼굴과 목 곳곳에 자리했고, 삐뚜름한 눈빛 때문인지 거칠고 야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보는 남자의 등에는 새파란 망토가 달려 있었다. 호계 기사단의 단복이다. 황제에게 인사한 카델이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큰 보폭으로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호계 기사단의 단장, 엑토 엔티라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엑토 경. 전 적린 기사단의 단장―”

“카델 라이토스. 알고 있소.”

악수를 위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엑토는 당황한 카델의 앞에서 우악스러울 만큼 거세게 손을 흔들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 이름은 어떻게…….”

“적린 기사단의 명성은 제국 바깥에서도 자자하거든. 몇 되지 않는 인원으로 고위 마족을 줄줄이 소탕하고 다닌다기에, 제국에도 드디어 정예 기사단이 생긴 건가, 호기심이 동했었소.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쁘군. 시기는 좀 별로지만 말이오.”

껄껄 소리 내 웃는 엑토의 즐거운 낯을 따라 애써 입꼬리를 올린 카델이 뒤편의 황제를 일별했다. 이자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그에 황제가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엑토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그는 악수하던 손을 거두고는, 솥뚜껑만 한 양손을 들어 카델의 얼굴을 와락 감쌌다. 그러고는 작은 얼굴 곳곳을 들여다보며 즐겁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젠가 선생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폐하! 이거, 머리랑 눈알만 바꿔서 되겠습니까? 잘못 눈에 띄었다가는 큰일 나겠는데요. 크하하!”

“……그만두게, 엑토.”

“뭘 말입니까? 크하! 소름 끼치도록 빼닮았구만.”

엑토는 혼자만의 추억에 빠진 듯 카델이 받은 충격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열심히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데릭의 만류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리고 과하게 가까운 두 남자의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이돈의 머릿속에선, 한 가지 생각이 바삐 떠오르는 중이었다.

‘황제한테 조롱 금지, 마법 금지, 역정 금지. ……하지만 쟨 황제가 아니지?’

“잘라 버리기 전에 손 떼.”

카델에게 고정되어 있던 엑토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자신을 겨눈 세 개의 얼음 창이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위협에 스르륵 팔을 떨어뜨리자, 당황한 카델의 옆에 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맑아지는 듯한 화사한 미모의 남자였다.

“그 추레한 꼴로 왜 우리 자기한테 치근덕거리는 거야? 꼴불견이네. 보기 역하니까 스스로가 싫어지면 언제든 말해. 바로 죽여 줄게.”

생글거리는 낯짝과는 상반되는 살벌한 언행이다. 엑토는 조금씩 회전하는 얼음 창과 라이돈의 투명한 날개를 번갈아 보며 까끌한 턱을 쓸어내렸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싸해진 분위기에, 카델은 진땀을 빼며 슬쩍 엑토의 앞을 가렸다.

“조금 전까지 전투를 치르고 온지라, 제 부하가 조금 예민해졌나 봅니다. 대신 사과드리죠.”

“……정말 요정인가?”

“그럼 가짜 요정이겠어? 눈은 장식이야? 별로 예쁘지도 않은 거 그냥 뽑아서 없애 줄까?”

이 난데없는 급발진은 대체 뭐란 말인가. 밝은 목소리의 농담조였으나, 긴 시간 동안 라이돈과 함께해 온 카델은 알 수 있었다. 이 변덕쟁이 요정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는 것을.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인해 심사가 뒤틀린 라이돈은 다루기 까다롭다. 심지어 마음껏 그를 어르고 달래기 힘든 상황이면 더더욱.

“왜, 왜 이럴까, 라이돈? 여기 들어오기 전에 한 약속을 잊은 걸까?”

목소리를 낮춰 라이돈의 빈정거림을 멈추려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뭘 자꾸 쳐다보고 있어? 카델 옆에서 멀리 떨어져. 저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면 더 좋고.”

“흐음, 역시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크군그래. 내 상상 속 요정과는 많이 달라.”

“그 덥수룩한 머리통에 들어 있는 거야? 날 멋대로 상상한 더러운 뇌가? 불쾌하네! 비켜 봐, 자기. 꺼내서 던져 버려야겠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엑토는 흘려듣기 능력도 단장급이라는 점이었다.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점만 보는 실력 또한 상당했다.

“크하하! 호전적인 모습이 보기 좋군. 이 커다란 키에 곱상한 얼굴이라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오.”

엑토는 자신을 가로막은 카델을 자연스레 밀어 내며 라이돈의 앞으로 다가갔다. 라이돈이 진심으로 자신을 해치진 못하리라 여기는 건지, 무슨 공격을 하든 막아 낼 자신이 있는 건지. 폭력적인 요정에게 거리낌 없이 접근한 그는, 살짝 고개를 들어 라이돈과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듣기로는 과거 관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리엘의 목숨을 구해 줬다던데. 늦었지만 감사를 표하지. 아끼는 부하거든.”

“기억 안 나.”

“이 정도 은혜는 사사롭다는 건가?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네 마음에 들고 싶지 않아.”

“내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네.”

엑토의 능청스러운 발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델이 멈칫했다.

“엑토 경. 방금 이야기는…….”

“음? 왜 그러시오, 카델 경. 내게 부하를 뺏기기라도 할까 봐 불안하오?”

“하하……. 짓궂은 면이 있으시네요.”

엑토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라이돈은 절대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농담으로라도 수락할 리 없다. 그리 확신하면서도, 카델은 기어코 라이돈과 엑토의 좁은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몇 명 있지도 않은 기사단의 인재를 탐내시는 겁니까?”

“그럼 이쪽의 1대대와 바꾸는 건 어떻소. 소린 그 녀석은 날이 갈수록 융통성이 없어져. 이 쾌활한 청년과 바꾸면 좋을 것 같군.”

소린과 라이돈을 바꾸자니. 물론 소린이 부하라면 라이돈처럼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을 테고, 이런 자리에서 지금처럼 곤란해질 일을 벌이지도 않을 테고, 기사단의 화합도 한결 편해지겠지만.

“부하가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바꾸겠습니까. 라이돈은 제 소중한 인연입니다.”

“으응? 연인이라고?”

슬쩍 카델의 허리를 끌어안은 라이돈이 한층 풀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은 엑토에게서 돌아왔다.

“크하하! 물론 그렇지. 경이 내가 요정에게 관심을 표하는 게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이기에, 살짝 놀려 봤소.”

“……그런 표정 지은 적 없습니다.”

“본인은 본인의 표정을 모르는 법이지.”

능글거리며 웃은 엑토가 자석처럼 달라붙은 두 남자를 뒤로한 채 데릭에게로 몸을 돌렸다. 데릭은 흡족한 표정의 엑토를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전쟁 중에 장난이나 치고 있다니. 팔자가 좋군, 엑토.”

“죄송합니다, 폐하.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와서 그런가,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그래서, 카델. 급히 전할 정보라는 게 뭔가?”

방문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본론을 꺼내게 됐다. 엑토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 버린 탓이었다. 낮은 한숨을 삼킨 카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라이돈을 매단 채 마족이 제국을 습격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가설을 늘어놓았다.

가장 확실한 증거인 시스템의 진행도 표기를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쿤라의 존재를 이용해 가설에 힘을 실었다.

카델의 주장을 들은 데릭과 엑토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울로]를 통해 각지의 보고를 확인해 본 엑토는 팔짱을 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외국과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군요, 폐하. 갑자기 타깃을 제국으로 돌렸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만약 적이 잠시 후퇴한 것뿐이라면 지원 요청을 보내기 어려워. 언제 다시 전투를 재개할지 모르니 말일세.”

“하지만 카델 경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지금 당장 지원 요청을 보내도 제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어요.”

“……인셀은 어디 있지?”

데릭은 바깥에 있던 근위대장, 인셀을 불러들여 현 사태를 설명했다. 황제와 엑토, 인셀의 사이로 여러 의견이 오가는 동안, [울로]에서 들려오는 제국 기사들의 음성은 점점 다급해져 갔다.

“모든 마족이 제국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폐하. 한창 전투 중인 병력을 선뜻 이동시키기엔 임시 동맹국이 가진 의리는 얄팍하죠.”

“의리가 있든 없든, 당장 보내지 않으면 제국이 집중 공격을 당할 것 아니오. 중심이 무너지면 균형은 단숨에 깨지지. 협박해서라도 충분한 병력을 요구해야 합니다, 폐하. 헛발을 짚은 거라면 다시 돌려보내면 되고, 그동안 동맹국이 공격받는다면 이쪽에서 병력을 보내 체면을 차리면 될 일입니다.”

“그리 쉽게 왔다 갔다 할 순 없다는 걸 알지 않나, 엑토. 지금은 마법사의 수가 부족해. 이동 마법을 마음껏 사용할 처지가 못 되네.”

“지금 자국이 무너지게 생겼는데 남의 나라 처지나 배려하고 있는 겁니까?”

“단숨에 끝날 전쟁이 아니라면 그 이후를 생각해야 해.”

“여기서 무너지면 생각할 미래도 없어지는 겁니다, 근위대장.”

팽팽한 대립이었다. 그들의 토론에 집중하던 데릭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자 멀찍이서 이쪽을 지켜보던 카델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카델은 인셀과 엑토의 다툼에 끼어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평온한 눈빛에, 데릭이 가볍게 손을 들어 두 남자의 입을 다물렸다.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마족이 제국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찾아왔을 터. 그대도 엑토의 의견과 같은가?”

그 물음에 엑토와 인셀의 시선이 집중됐다. 카델은 어서 동조하라는 듯 눈썹을 씰룩이는 엑토를 일별하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원을 강요해 봤자 쓸모 있는 수의 병력을 지원받진 못할 겁니다. 대마법진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정상회담처럼, 정확한 증거 없이는 협력도 없겠죠.”

“이보시오, 카델 경. 그럼 경은 지금 제국이 침략당한 뒤에야 미적미적 지원 요청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요?”

“그 선택의 문제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제국이 침공을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죠, 엑토 경?”

“그렇소.”

“그럼 그들의 공격을 버티면 될 일입니다.”

그게 쉬우면 여기서 이런 기 싸움이나 하고 있겠는가. 그리 말하는 듯한 엑토의 험악한 표정 앞에서, 카델은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가뿐하게 말했다.

“제국의 외곽을 감싸는 장벽을 생성한 뒤, 방어전에 돌입하는 겁니다. 관문을 지키는 병력도 철수시키고, 장벽을 활용해 몰려드는 마족들을 견제한다면.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버틸 수 있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계획이군. 제국을 통째로 감싸는 장벽을 만들기엔 마도구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네. 장막을 만들 마법사도 마찬가지지.”

실현 불가해 보이는 카델의 계획에 인셀이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카델은 주눅 들지 않았고, 대신 벽에 기댄 채 무료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라이돈을 가리켰다.

“제 부하라면 가능합니다.”

“……응? 나?”

카델의 당당한 선언에 라이돈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제국을 감싸는 얼음벽을 만들어 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유지가 문제였다. 현재 라이돈의 마력으론 채 1분도 지나지 못해 얼음벽이 붕괴할 테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긴 싫어 순진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카델이 다시 한번 그의 능력을 부풀렸다.

“최대 열 시간. 그 정도면 동맹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병력을 기다리며 버티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야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카델만 살면 됐으니 상관없다지만, 카델은 그게 아니지 않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기를 치는 카델의 행태에 잠시 고민하던 라이돈은,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열 시간만 버티면 되는 거야, 자기? 가뿐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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