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3화 (323/521)

라이돈의 마력만으로 방어전을 개시하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라이돈은 물론 자신의 마력까지 합쳐도 제국을 두르는 장막을 열 시간이나 유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위급한 상황에 인간들의 목숨을 걸고 사기를 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게 뭐야, 카델?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네가 먹어야 할 거.”

마법 전개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라이돈과 둘만 있을 공간을 마련했다. 모두가 사라진 방 안에서, 카델은 그의 앞으로 작은 덩어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먹어야 한다고? 싫어! 맛없게 생겼잖아!”

그것은 너무도 새파래 하얗게까지 보이는 반투명한 덩어리였다. 겉면이 울룩불룩하게 솟아 정갈하지 못한 덩어리의 안쪽에는, 복잡하게 얽힌 연보라색의 선이 혈관처럼 뻗쳐 있었다.

그 선이 박동하는 것 같다며 격한 거부감을 표하는 라이돈의 앞에서, 카델은 가만히 생각했다.

‘눈치가 빠르네.’

박동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박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 덩어리의 이름은 [빙결의 핵]. 메인 퀘스트 ‘마계의 탑’에서 루멘이 엘비를 처치하며 얻은 아이템이었다. 게임에선 이것을 엘비가 가진 심장의 복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싫어도 먹어야 해, 라이돈. 네가 이걸 먹을 걸 염두에 두고 방어전을 제안한 거니까.”

[빙결의 핵]은 누구나 섭취할 수 있지만,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라이돈이 먹어야 했다. 이것을 먹으면 얼음 마력을 다룰 수 없는 사람도 일시적으로 높은 수준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카델이 먹는다면 아이템의 유지 시간 동안 4속성 마법사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얼음을 다루던 마법사가 [빙결의 핵]을 섭취하면 능력치가 7배나 올라. 지금 라이돈 수준에서 7배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제국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마력 소모만 제대로 조절한다면 보호에 전념하는 게 가능하다. 그 말인즉슨, 제국의 존망이 이 말썽꾸러기 요정에게 달렸다는 것.

“매번 자기 음식 먹어 준 것도 모자라서 이젠 이 흉물스러운 덩어리까지 먹어 달라고?”

“거기서 내 음식이 왜 나와?”

“어쨌든 싫어!”

조금만 구슬리면 알아서 먹을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반항이 거셌다.

‘본능적으로 마기를 감지한 건가.’

복제품이라 할지라도 마족의 심장. 워낙 마기를 싫어하는 라이돈이었으니, 거부감을 느낄 법도 했다. 잠시 다른 설득법을 떠올리던 카델은 곧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남은 시간이 없다. 어르고 달래기엔 위험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결단을 내린 카델은 거리낌 없이 [빙결의 핵]을 제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뭐야, 카델이 먹을 거면 왜…….”

가볍게 고개를 틀어 라이돈과 입술을 맞댔다. 단단한 턱을 움켜쥐고, 얄밉게 떠드느라 벌어진 입술을 파고들어 제 혓바닥에 얹은 [빙결의 핵]을 넘겨주었다.

카델의 갑작스러운 입맞춤보다 제 입안에 들어온 덩어리의 존재가 더 충격적이었는지, 라이돈이 움찔거리며 혀뿌리를 들썩였다. 다시 덩어리를 뱉어 내려는 듯한 낌새였다. 그에 카델은 맞닿은 입술에 꾹 입을 주고, 턱을 쥐었던 손을 움직여 그의 목덜미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으읍…!”

매끈한 혓바닥이 자꾸만 구부러지며 어떻게든 덩어리를 삼키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카델은 책상 앞까지 라이돈을 밀어 내곤, 자연스럽게 어깨를 눌러 그를 눕혔다. 상체를 밀착시켜 몸에 무게를 실은 그가 라이돈의 혀뿌리를 들추듯 쓸어 올렸다. 그러자 경사를 버티지 못한 덩어리가 라이돈의 목구멍까지 미끄러졌다. 습격과도 같은 행위에 라이돈이 켁켁거리며 아래 깔린 몸을 비틀었다.

“착하지.”

카델은 그런 라이돈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듯 문지르며 속삭였다. 결국 큰 들숨과 함께 덩어리를 삼켜 버린 라이돈의 위에서, 카델이 작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잘 먹네.”

「기사 ‘라이돈’이 고급 아이템 [빙결의 핵]을 섭취하였습니다!」

「기사 ‘라이돈’의 마력이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합니다.」

“……너무해, 카델.”

억울함에 새빨개진 얼굴로 쌕쌕거리던 라이돈이 울상을 지었다.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에 맺힌 눈물과 칭얼거리는 붉은 입술은 묘하게 사람의 배덕감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잠시 홀린 듯 라이돈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델이 헛기침과 함께 거리를 벌렸다.

“그러게 말로 했을 때 알아서 먹으면 좋았잖아.”

“변태.”

“네가 했던 짓은 기억 안 나나 보지? 난 아직도 네가 먹인 사탕 맛이 기억나는데.”

“난 맛있는 걸 줬잖아!”

분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던 라이돈이 문득 말을 멈춘 채 제 복부를 짚었다. 미간을 좁히고 그대로 굳어 있던 그가 이내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 카델을 보았다.

“몸이 이상해.”

“걱정하지 마. 일시적으로 네 안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일종의 영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니까, 그때까지 넘치는 마력을 즐기도록 해.”

“으음…….”

뭔가 탐탁지 않다는 듯 배를 문지르면서도 라이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델이 자신에게 해로운 걸 먹였을 리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엘비의 심장을 섭취한 라이돈을 데리고, 카델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방어벽 구축에 돌입했다.

*

“이게 전부 라이돈 경의 마력으로 이뤄 낸 거라니…….”

“대단하지? 가르엘은 죽었다 깨도 못 할 거라고. 어차피 죽지도 못하겠지만!”

제국의 입구를 봉쇄한 얼음 장벽. 병사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과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섬세한 꽃문양까지 새겨진 이 얼음벽은, 고개를 들고도 한참은 더 시야를 옮겨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드높았다.

라이돈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제 실력을 과시하며 한껏 으스댔다. 앞을 보지 못하는 요젠에게는 자신이 새긴 꽃문양의 생김새를 정성껏 묘사하기도 했다.

카델은 잔뜩 들뜬 라이돈을 뒤로한 채 루멘을 불러냈다.

“넌 장벽으로 가서 그쪽 상황을 전달해 줘. 혹시 얼음벽에 손상이 가면 제때 보강해야 하니까, 바로 알려 주고.”

“그러지.”

“전투에 도움은 주되, 과하게 힘쓰지는 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최대한 힘을 아껴 두는 걸로 하자.”

타 기사단과 협력하며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인물엔 루멘이 적격이었다. 루멘도 그것을 인지한 듯 카델이 황제에게 새롭게 받은 [울로]를 들고 군말 없이 장벽을 향했다. 나머지 동료들은 라니아에 머물며 주민들의 보호와 장벽 유지에 힘쓰기로 했다.

얼음 장벽에 도착한 루멘이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호계 기사단 5대대의 대장. 드레프 엔티였다. 드레프는 예고 없이 등장한 루멘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적린 기사단의 쾌검사?”

“오랜만입니다, 드레프 경.”

“그러네. 거의 1년 만이지?”

앳된 얼굴도 여전했고,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투도 여전했다. 드레프는 루멘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곤 다른 누군가를 찾듯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대장은 지금 라니아에 있습니다. 저는 장벽의 상태 확인을 위해 따로 움직이는 거고요.”

“따, 딱히 그쪽 단장을 찾은 건 아니거든.”

“그렇습니까.”

놀아 주는 형이 없어 실망한 얼굴을 하고선 잘도 발뺌해 댔다. 루멘은 무감한 눈빛을 돌려 장벽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래에는 장벽을 넘지 못한 마물과 마족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벽, 요정이 만든 거라며? 덕분에 한시름 놨어. 전쟁 내내 유지할 수 있다면 마음 놓고 마족 놈들을 때려잡을 수 있을 테지만 말이야.”

“저희 요정은 아직 어려서 거기까진 못 합니다.”

맥없이 밀리던 제국군의 전세는 얼음 장벽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날개가 달린 적이라도 장벽 위까지 날아오는 건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에, 마법사와 궁사, 검사의 검기만으로 충분한 제압이 가능했다.

장벽을 뚫으려는 적들의 시도도 무용했다. 라이돈의 마력은 질과 양이 전부 상승한 상태였으므로, 웬만한 공격으론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엘비가 만들어 냈던 ‘마계의 탑’을 장벽으로 치환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었다.

“저 밑에 깔린 시체만 봐도 속이 개운해져. 저 꼴을 본 마족 놈들이 허튼 생각 말고 싹 다 꺼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루멘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말끔하던 지평선이 꿈틀거리며 환상처럼 일렁인다. 언뜻 신기루처럼 보이나, 그것은 어마어마한 수를 대동한 채 진군하는 적군이었다. 철새처럼 하늘을 까맣게 채운 고위 마족의 향연. 초마다 불어나는 적군은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저 무수한 마족의 목적은 오로지 제국의 함락. 이번에도 카델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 생각한 루멘이었으나, 이번 작전에선 카델조차 예상치 못한 두 가지 변수가 있었다.

하나는 바로 에밀리아의 실행력. 카델이 그저 무모한 선택이라 여겼던 그녀의 술수에는 확실한 계획과 바탕이 있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라이돈의 잠재력이었다. 그는 카델의 생각보다 월등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천재 마법사였으며, 심지어 전대 요정 왕 헤소니아의 힘까지 물려받은 상태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됐다.

수분기 없이 움푹 쪼그라든 뺨과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고 건조한 팔다리. 간헐적인 호흡에선 듣기 싫은 쇳소리만 흘러나올 뿐이다.

에밀리아는 눈앞의 거대한 산송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족히 3m는 될 법한 신장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쓸데없이 커다란 짐 덩어리에 가깝다. 까맣게 변색한 살갗 위로 퍼지는 짙은 마기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쓸모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사포처럼 거칠어진 마왕의 뺨을 쓸어내렸다. 다정하게 보듬듯 토닥이고, 넓은 어깨를 주무르고, 탄탄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패배라는 치욕을 안고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 가는 모습이 어찌나…… 어찌나 볼품없던지. 몇 번이고 아버지를 찾아가 직접 죽이고 싶었지만요. 저, 참았어요.”

날을 세운 손톱에 마기가 맺히며, 가느다란 손가락이 돌처럼 딱딱한 가슴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거든요.”

느릿느릿 가슴팍을 꿰뚫은 손이 내부를 헤집었다. 무언가를 찾듯 거칠게 휘젓던 팔의 움직임이 정지하고.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단숨에 손을 뽑아냈다. 그러자 질척한 핏물이 울컥 샘솟으며, 작은 손아귀 안에 들린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심장이었다.

혈관이 덕지덕지 매달린 흉측한 심장. 그녀는 미세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무감히 훑어보더니, 이내 사과를 먹듯 심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끈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흰 뺨과 입가가 축축하게 물들었다. 에밀리아는 맛을 음미하듯 우아하게 저작하며 입안 가득 들어찬 심장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행위를 몇 차례 반복하던 에밀리아가 일순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이. 무시하던 막내딸의 배 속에 들어간 기분이 어때요?”

참지 못한 폭소를 터뜨리며 광인처럼 꾸역꾸역 심장을 씹어 넘기고, 손가락에 묻은 피까지 야무지게 빨아 먹었다.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고운 입가를 닦아 낸 그녀가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서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절대 당신처럼 실패하지 않아.”

미련 없이 방을 나서자 밖에는 지팡이를 짚고 선 셀레브가 있었다. 에밀리아는 말없이 셀레브와 눈을 맞추다, 저벅저벅 다가가 그녀의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눈동자가 셀레브의 심중을 파악하듯 번들거렸다.

“방금 아버지의 힘을 흡수했어. 비린 심장을 열심히 씹어 먹었지. 혹시,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해?”

“……그럴 리가. 내 왕은 너야, 에밀리아.”

에밀리아의 겉모습은 침착했지만, 확장된 동공은 그녀가 상당히 흥분한 상태라는 것을 증명했다. 셀레브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쭉 버티자, 그제야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멀어졌다.

“대마법진을 재가동할 거야. 지금 내 힘이라면 인간계의 부서진 마법진도 복구가 가능하겠지.”

“지금쯤 이쪽이 후퇴한 줄로만 알고 있을 거야. 머저리 같은 인간 놈들.”

“글쎄. 낌새를 느끼고 뭔가의 조치를 취해 놨을지도. 하지만 상관없어. 뭘 하든 이미 늦었으니까.”

몸속에 흐르는 충만한 힘은 정확하게 승리를 가리켰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패배한 자신의 아버지는 정말이지 쓸모없는 퇴물이라고. 홀로 생각한 에밀리아가 완벽에 가까워진 제 마기를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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